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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간 최후의 고결함, 죽을 권리 - <아무르 Amour>(2012, 미하엘 하네케, 오스트리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간 최후의 고결함, 죽을 권리 - <아무르 Amour>(2012, 미하엘 하네케, 오스트리아)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0.07.20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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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동국대교수)

 

 

I.

영화의 시작은 구조대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부인의 주검을 발견합니다. 이야기는 과거로 흘러갑니다. 음악회. 제자의 연주회가 끝나고, 부부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갑니다. 집에 와서 조르쥬는 아내 안느에게 당신 오늘 참 예쁘다고 말합니다. 아침. 식사 테이블에서 안느는 치매 증세를 드러냅니다. 딸 에바가 옵니다. 남편 지오프는 음악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엄마의 증세에 대해 물어봅니다. “뇌졸중으로 진행중이다. 안 좋은 상태”.

 

그들의 고독한 공간. 다섯 개의 쇼트가 그들이 사는 공간이 얼마나 고적한 가를 보여줍니다. 이 다섯 개는 그들이 삶을 영위하는 일상의 공간입니다. 어둠에 묻혀 고적하게 보이는 이 공간들은 이들의 고독을 드러냅니다. 이 장면은 맨 마지막 딸 에바가 들어왔을 때의 거실장면과 짝을 이룹니다. 두 사람이 사라진 빈 공간에 에바는 적적하게 서있고, 그리고 앉아있읍니다. 에바는 이 공간에서 결국 그들과 같이 존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병원에서 돌아온 안느. 거실로 가서 의자에 앉는 장면. 이 장면을 길게 보여줌으로써, 관객은 그들의 고통에 동참합니다. 컷트를 나누지 않고, 일부러 길게 보여줌으로써, 한 노인이 아니라 두 노인이 힘겹게 투쟁하고 있다는 느낌을 잘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안느. 집에 침대를 설치했고, 휠체어를 탑니다. 안느는 병원에 다시 입원시키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아내 안느는 자존심을 부립니다. “나는 장애인이 아니다”. 조르쥬와 안느의 일상이 시작됩니다. 파출부가 가끔씩 오기는 하지만, 매일 거의 둘만의 생활이 진행됩니다. 조르쥬도 간병을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그의 몸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닙니다. 조르쥬는 밤에 침대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친구 피에르의 장례식에 가는 조르쥬. 잔잔한 말다툼. 비오는 날. 장례식에서 돌아오자, 안느는 혼자 마루에 앉아 있읍니다. 놀란 조르쥬. 안느는 더 이상 살기 싫다고 말합니다. 남에게 피해 주기 싫다는 겁니다. 조르쥬는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안느는 뭔가 심각한 표정이 됩니다. 제자 알렉상드르가 찿아옵니다. 그는 안느의 한쪽 손이 마비된 것을 보고 놀랍니다. 안느는 잠시 생활의 활력을 찿으려 합니다.

 

피아노 치는 아내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서 펼쳐집니다. 관객은 들려오던 시디음이 중단됐을 때, 비로소 조르쥬의 환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장면은 그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안느는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침대에서 혼자 내려오다 넘어진 안느를 향해 조르쥬는 호통을 칩니다. 그날 밤 조르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목졸리는 악몽을 꿉니다. 안느는 식사도중 앨범을 보면서, 어린 시절 회상에 잠깁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어느 날 안느는 극도로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뇌졸중. 링겔을 맞는 안느. 딸 에바가 찿아옵니다. 말 더듬는 안느. 딸은 흥분하고, 오열합니다. 남편 지오프도 걱정합니다. 저렇게 놔두면 안 된다고. 조르쥬는 침착하게 응대합니다. 대안이 없읍니다. “나를 비난하지 마라. 난 할 만큼 했다

 

간병인이 옵니다. 조르쥬는 안느에게 죽을 먹입니다. 안느는 거의 먹지 못합니다. 이젠 하는 말조차 어린애 말을 웅얼거립니다. 어린애가 돼 가고 있읍니다. 간호사를 한 명 더 쓰기로 결정합니다. 간호사는 안느의 머리를 빗기면서 거칠게 대합니다. 조르쥬는 간호사를 내보냅니다. 조르쥬는 안느에게 물을 줍니다. 물을 거부하는 안느. 조르쥬는 안느의 뺨을 때립니다. 놀라 물을 마시는 안느. 고정된 다섯 개의 그림이 이어지는 장면이 있읍니다. 물을 마시지 않는 안느를 때린 이후, 죠르쥬는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이어 그림이 연속으로 이어집니다. 이 그림들이 영화의 스토리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 그림들은 관객들이 어떤 심리적 상태에서 그림을 바라보는 가를 실험합니다. 그림들은 그저 평범한 풍경화지만, 이 격렬한 심리적 상태에서 평범한 자연은 더 이상 평범해 보이지 않습니다. 죽으려 하는 여자와 그걸 때려서라도 막고 싶어하는 남자의 심리는 정상적이거나 평범한 것을 초월합니다.

 

그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평범해 보이는 자연의 모습은 결코 평온해 보이지 않습니다. 혹은 그 평온의 내면에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격정적인 투쟁의 몸부림이 숨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의 공간 연결은 그러한 관객의 심리를 실험하고 있읍니다. 인간의 삶은 격정적인데, 왜 화가들은 자연을 이렇게 평온하게 그렸을까? 이런 생각과 싸우면서, 관객은 자연이 왜 그렇게 인간의 삶에 방관적이며 의연한지에 대해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을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자연의 삶은 영원합니다. 인간이 자연의 그러한 유장함을 배우지 않는다면, 한시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딸 에바가 찿아옵니다. 조르쥬는 안느의 방을 잠가 버립니다. 에바가 따지자, 조르쥬는 문을 열어줍니다. 어린애가 된 안느. 에바는 흐느끼며, 이럴게 둘 순 없다고 외칩니다. 조르쥬는 대안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 니가 엄마를 돌볼래?” 할 말이 없는 에바.

 

아프다고 하는 안느. 조르쥬는 안느에게 옛날 얘기를 해줍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얘기입니다. 조용히 자는 안느. 이때 갑자기 조르쥬는 베개로 안느의 숨을 막아버립니다. 죽은 안느.

 

조르쥬는 꽃을 사갖고 들어옵니다. 모든 문을 다 테이핑해 막습니다. 비둘기가 두 번째 들어옵니다. 그는 비둘기를 잡습니다. 그는 편지를 씁니다. 누워서 생각에 잠긴 조르쥬. 뭔가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안느가 평소처럼 설거지를 합니다. 어서 옷입고 나가자고 합니다. 조르쥬는 옷을 입고, 안느와 외출합니다. 이 장면은 죠르쥬의 죽음을 상징하며, 그의 죽음 직전 환상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도, 죠르쥬가 안느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느끼게 합니다. 그는 끝까지 안느를 따라 간 것입니다. 그는 가스를 틀어놓고, 자기 방에서 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에바가 들어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시체 두 구를 다 치우고 난 다음입니다. 에바는 혼자 거실에 앉아 있읍니다. 텅 빈 거실에 부모의 자취만이 남아 있읍니다.

 

II.

이 영화가 나온 다음 해인 2013년 프랑스에서 작은 사건이 발생했읍니다. 마치 이 영화에서와 똑 같다고 느껴지는 부부의 동반자살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 주인공들은 86세 동갑 베르나르와 조르제트 카제 부부입니다. 1126일 파리 시내 한 호텔방에서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숨진 채 발견됐읍니다. 유서에는 법이 약을 먹고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막고 있다고 정부의 안락사금지법을 비판했읍니다. 세계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는 2000년 이후 네덜란드가 유일하고 미국의 오레곤주에서 일부 허용합니다. 한때 올랑드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안락사 법제화를 들고 나왔으나, 카톨릭의 반대로 실천하지 못했읍니다. 2015년 안락사 대신에 깊은 수면을 유도하는 깊은 잠이 법안을 통과했습니다. 이런 프랑스와 유럽의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이 영화는 제작되었다고 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제목도 프랑스 말로 사랑(Amour)’입니다. 사랑이라는 이 평범한 말을 이 영화는 다시 말하고 있읍니다. 사랑은 이 영화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읍니다. 그런데 감히 그런 무시무시하게 큰 주제를 영화의 제목으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사랑도 아니고, 그저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작은 사랑이 아니라, 큰 사랑, 모든 자질구레한 일상의 사랑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인간이 나고, 죽고, 사라지는 그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사랑입니다.

 

거창한 주제의 해석을 떠나 이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노인, 부부의 삶을 소재로 하여 인간과 사회의 문제로 들어간 영화임을 알 수 있읍니다. 노인은 인간의 후반기 모습입니다. 노인을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를 반성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노인은 모든 능력을 거세당해 사회적 활동이 차단되어 있는 잔여적 존재입니다. 여생이란 그런 점에서 좋은 것 같으면서도 불쌍하고, 무의미한 상태를 말합니다.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하고, 그저 최소한의 생존만을 해나가는 상태. 그 상태는 보기에 따라, 그 자체 지옥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마지막 순간에 병이라는 악마를 풀어놓아, 인간 무능력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능력이 거세된 무능력한 인간에게 불치의 병이 찿아오면, 인간에게 살아갈 의미는 무엇인가. 영화는 그걸 질문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대답이 안락사의 허용입니다. 안락사는 인간이 최소한의 권위와 존엄을 갖고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나온 방식입니다. 혹은 자살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자살을 두고, 혹자들은 그가 운명에 휘둘리지 않고, 맘대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의지적 행동으로 해석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 부부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걸 사랑이라 볼 수 있다는 해석을 하고 있읍니다. 자살을 금지하는 사회적 통념, 남편이 어떻게 아내를 목졸라 죽일 수 있는가,라는 보편 윤리에 이 영화는 도전합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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