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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의 문화톡톡] 어른 없는 시대, ‘어른’이라는 표상
[이정옥의 문화톡톡] 어른 없는 시대, ‘어른’이라는 표상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20.07.27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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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시성의 동시성, 더 깊어진 모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이는 육체적인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열정이 넘치는 마음가짐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노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요즘 이 말은 나이가 들었다고 모두 어른은 아니라는, 나이 값도 못하는 어른답지 못한 어른을 비판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다는 비판은 인생 선배로서 넉넉하게 품어주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실망감을 넘어 어른 노릇도 못하는 주제에 어른 놀이에 빠져 있다는 날선 비난을 내포한다. 이에 대해 근본도 없고 버릇도 없는 요즘 젊은 것들이라는 비수로 대응하니, 인류 역사상 늘상 있어왔다는 세대갈등은 꼬일 대로 꼬여버린 난제가 됐다.

지금-여기 같은 하늘 아래에 살고 있지만 머리와 가슴에 서로 다른 세계관과 감수성을 장착한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분노와 혐오를 뿜어내고 있어 소통불가능성의 극대화로 치닫고 있다. 심지어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들조차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나 다른 인종을 대하는 것처럼 낯설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 다시,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모순에 갇힌 것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非同時性 同時性)은 다른 시대에 속하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한 시대에 공존했던 1930년대 독일사회의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발명한 개념이다.

한 학자는 이 개념을 전근대적인 시계와 현대의 시계를 양 손에 차고 무섭게 질주하는 한국사회란 메타포로 전유하여 우리의 모순을 예리하게 짚어줬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그 내부에는 파벌과 학벌, 연줄과 서열 등과 같은 전근대적인 요인들이 선의의 사회적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희망과 기대에 도취되어 양손에 두 개의 시계를 차고 무섭게 질주해왔지만, 외적인 성장이 둔화된 지점에서 그간 묵과됐던 내부의 문제가 한꺼번에 폭발함으로써 한층 더 깊어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모순에 갇혀버린 것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은 다원주의적 공존과 균형이다. 비동시적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존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통한 균형을 확보하고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꼬일 대로 꼬여버린 세대갈등을 어른 세대와 젊은 세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사이의 단순갈등으로 단정할 수 없다.

 

어른 없는 시대, ‘어른이라는 표상

모두 입을 모아 어른 없는 시대라 말하고 있다. ‘어른 같은 어른은 찾아보기 어렵고 아이 같은 어른이 넘쳐나는 시대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지금은 어른과 청년이라는 표상이 난무하는 시대다.

표상은 낡은 말과 개념으로부터 존재하는 대상을 자기 앞에 다시 세우는 활동이다. 이 과정에서 비동일적인 다양한 차이는 무시되고 동일성에 불일치하는 것들은 배제된다. 그러니 표상 활동을 통해 타인들을 자신의 인식 지평으로 종속시키는 의도적 왜곡을 경계해야 한다. 어른의 부재에 대한 한탄을 멈추고, 어떤 경위를 통해 어른 부재 담론이 생산·증폭되는지, 어른과 청년을 표상화하는 주체는 누구인지 냉철하게 짚어봐야 할 때다.

어른의 부재는 1997IMF 외환위기에서 비롯됐다. IMF 권고로 시작된 노동유연화 정책은 평생직장의 실종과 더불어 한국사회를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고용이 불안정한 나라로 만들었다. 정리해고가 일상화되고 국민 대부분이 계약직과 단기 일자리에 머물며 하루하루 불안한 생활을 연명하는 무한경쟁의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2010년 전후 멘토 열풍이 불면서 어른 부재는 세대갈등으로 표면화됐다. 고강도의 자기계발과 높은 스펙을 요구하는 치열한 경쟁으로 한층 불안해진 청년들은 부모나 스승의 오래된 지혜보다 특정 분야에서 실력과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려주는 멘토의 실용적 전문성을 더 신뢰했던 것이다. 부모나 스승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 진로와 취업에 관련된 학습프로그램을 넘어 생활 전반에 멘토 열풍이 꽃피우니, 어른은 더 이상 유용하거나 긴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전락했다.

2010년 중반의 열정 페이 논란은 어른 혐오로 확대됐다. 열정 페이는 한 줄의 경력이라도 더 추가하려는 궁박한 처지를 악용하여 인턴과 수습, 교육생 등의 이름으로 청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제도다. 인생 선배라 믿었던 멘토마저 자신들의 보호막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한 청년들은 저임금의 노동력 착취구조를 헤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의 공포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증폭된 불안과 공포는 자기계발서로 당시 최고 인기를 누렸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에 대한 격렬한 저항으로 옮겨 붙었다. 멈출 수도 떠날 수도 없는 무한경쟁의 정글에서 하루하루 유리멘탈로 버티는 청년들에게 아파도 참고 견디면 언젠가 정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식의 위로는 오히려 잔인한 무한착취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최근 들어 어른과 청년의 세대갈등은 꼰대애송이의 대립양상으로 번지는 추세다. 어른은 직장이나 권력집단에서 밀려난 뜰딱’(틀니를 딱딱거리며 잔소리하는 노인을 일컫는 말)과 권력을 누리는 꼰대’(권력과 서열로 잔소리와 무시를 일삼는 사람)로 세분화되고, 권력을 기준으로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의 치열한 대결로 치닫고 있다.

 

금수저 젊은이와 '로또 분양'을 경쟁하다 지친 꼰대 가장(家長)들이 이제는 생애 첫 투표를 하는 애송이와 세대 전쟁을 벌인다. 단돈 천원 한 장 세금 내본 적 없는 너희 눈엔 해마다 수백만~수천만 원씩 소득세 내는 '꼰대 유리지갑'이 만만해 보이는가 중략- 잔소리 많은 나이 든 남자를 헐뜯는 말로 '꼰대'란 단어가 생겼다고? 천만에 ... 젊은이들은 꼰대의 잔소리 덕분에 큰 줄 알아야 한다. 꼰대 아빠는 잔소리만 한 게 아니다. 너희가 어디 가 있든 하루에도 여러 번 "밥은 먹었냐?"고 물었고, 너희가 늦게 귀가하는 새벽 한두 시까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컴컴한 안방에 뜬눈으로 누워 있었다.

있지도 않은 '애송이'라는 적을 상정해 놓고 늙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으로 새로운 정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쯤 되면 세대갈등을 누가 만들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중략- 젊은이들은 꼰대의 잔소리 덕분에 큰 줄 알아야 한다? 천만에. 우리는 어떠한 기회도, 자리도 주지 않고 '청년'이라는 이름만 사용하려는 '꼰대'들과 맞서 싸우면서 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꼰대'들의 잔소리가 아니라 더 많은 기회와 그 기회를 실현해볼 수 있는 토양이다. 아참, '버릇없는 젊은이들이 세대 갈등을 부추긴다' 같은 '꼰대어'는 사양한다.

 

서로에 대한 예의나 배려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사이의 살벌한 대화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봐서 안다는 주장에 대해 너처럼 늙지 않겠다고 맞받아치는 전형적인 미러링 화법이다. “젊은이들은 꼰대 아빠의 잔소리 덕분에 큰 줄 알아야 한다는 보은론과 어떤 기회도 자리도 주지 않으면서 청년이란 이름만 이용하려는 꼰대들과 싸우면서 컸다는 착취론(착취론+자생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 살벌한 대화의 핵심이 ‘18세 투표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보수 기성세대가 생산한 세대론이라는 데 있다. ‘해마다 수백만~수천만 원씩 소득세를 내는 꼰대의 입장에서 단돈 천 원 한 장 세금 내본 적 없으면서 해마다 유리지갑이 만만해 보이는 너희에게 일정 나이가 되었다고 모두에게 1인당 1표씩 투표권을 주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수백만~수천만의 소득세를 낼 정도로 가진 자이지만 금수저 젊은이와 로또 분양을 경쟁하다 지친약자라는 분할과 합성의 오류를 동원하면서까지 오직 ‘18세 투표권이 보수 진영에 미칠 정치적 영향력 방어에 몰두한 비논리적인 견제에 불과하다.

이처럼 자신들의 입맛대로 동질적인 것도 다르게 비동질적인 것도 같게 만드는 오류와 비논리를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세대론을 생산·유포하는 저간에는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기성세대의 이기적인 진영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진영 내부의 갈등과 부패를 봉합하고 외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청년들을 끌어들이거나 내치는 행태는 보수진영이나 진보진영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이 반복적이다.

전 세계적으로 21세기 사회변동에서 부상하고 있는 과제는 세대와 젠더의 균열지점이다. 어른 부재에 대한 한탄은, 21세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양 손에 두 개의 시계를 차고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무섭게 질주하며 청년에 대한 일말의 자비와 배려도 없이 오직 청년이라는 이름만 이용하려는 꼰대들에 대한 환멸에 찬 항변인 것이다. 청년을 이용하려는 꼰대 정치인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나마 청년을 위해 배려정치를 펼친 어른이라 여겼던 한 정치인의 모순적인 죽음 앞에서, 청년들이 또 다시 좌절하고 분노하는 이유다.

 

어른되기 어려움의 모순은 희망?

벨 에포크(Belle Époque)19세기말부터 1차 대전 이전까지 경제와 정치,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에 대한 유럽인들의 향수어린 고유명사다. 이제는 돌아가고 싶은 아늑하고 풍요로운 이상향의 시공간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됐다.

드라마 응답하라시리즈는 88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부터 IMF 외환위기가 몰아친 1997년 이전의 시공간이 현재 한국인들이 돌아가고 싶은 벨 에포크라는 점을 각인시켜줬다. 88올림픽은 빠르게 이룩한 경제성장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수고한 국민들이 서로 자축했던 전시와 보상의 시공간이었다. 적어도 구조조정이나 노동유연화란 개념이 없었던 IMF 외환위기 직전까지 날로 늘어나는 세간살이와 해외여행의 자유화를 만끽하며 풍요로움을 즐겼던 것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 2015.11.8.~2016.1.16.)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 2015.11.8.~2016.1.16.)

시리즈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린 <응답하라, 1988>(tvN, 2015.11.8.~2016.1.16.)은 이 아늑하고 풍요로운 시공간에 대한 집단 향수에 의존하고 있다. 촌스럽고 투박한 레트로 감성에 호소한 향수의 핵심은 어른과 젊은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넉넉하게 품었던 공동체를 향한 회고적인 환상충족이다.

서울에서도 개발속도가 느린 변두리 쌍문동의 골목동네를 배경으로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지만 서로서로 베풀고 나누며 인정하고 존중하는 훈훈한 유사가족공동체를 그려냈다. 다섯 가족이 한 가족처럼 어우러질 수 있는 구심력은 덕선아버지와 치타여사가 주축이 된 어른들의 연대와 돌봄에 있다.

덕선아버지는 지하에 셋방살이 하는 세 남매의 가난한 가장이지만, 마을공동체의 크고 작은 가정사에 앞장서서 참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부장적인 어른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부자이면서 오지랖 넓은 치타여사는 언제나 다섯 가족의 먹거리를 챙기고 어려운 사정을 먼저 헤아리고 돌봐주는 가모장적 어른이다. 이처럼 어른들의 연대와 돌봄을 먹고 자라니,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배고프고 결핍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게 마련인 애들 역시 그늘진 구석이 없이 무난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드라마의 감동을 내려놓고 최초의 대량해고 세대였던 덕선아버지가 드라마 방영 당시 시점, 그러니까 2015년에 살았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보자. 아마도 시그니처와 같은 염병, 지랄하고 자빠졌네를 연발하며 온갖 참견을 마다않는 뜰딱이 됐을 것이다. 또한 통 크고 오지랖 넓은 치타여사 역시 여전히 거침없는 큰소리로 간섭하고 챙기는 꼰대로 살았을 것이다. 무난하게 성장한 애들도 각자의 직장에서 라떼는 말이야를 남발하는 젊은 꼰대로 살고 있을게 분명하다.

실재하지 않은 따뜻한 가족공동체적 이상향을 현실화한 이 가족드라마는 어른을 향한 회고적인 향수에 기대어 무한경쟁의 정글이라는 사회적 비극을 외면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극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정확하게 간파한 상업적 전략인 것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tvN, 2018.3.21.~5.17.)
드라마, 《나의 아저씨》(tvN, 2018.3.21.~5.17.)

이와 달리 <나의 아저씨>(tvN, 2018.3.21.~5.17.)는 무한경쟁의 정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중년 남자의 우울한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실력을 과대포장하고 학연과 지연을 무기삼아 빠르게 출세하여 권력을 휘두르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꼰대가 넘치는 세상에서, 힘들지만 소신껏 살아가는 자의 헛헛한 내면풍경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동훈이 몸소 보여준 사회적 비극을 견디는 방법은 성실한 무기징역수로 버티는 모순이다. ‘모순은 희망이라는 브레히트 말대로, 모순은 무엇이 지금의 상태로 만들었는지 알려준다. 무한경쟁의 정글이 비극이 된 원인은 무한경쟁 자체가 아니라 어른을 권력화된 직함처럼 임의대로 남발하여 선한 경쟁을 왜곡시키거나 무력화시키는 꼰대들의 규칙 위반이라는 모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훈의 직업이 건축구조기술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부실공사가 일상화되어 있는 토건공화국을 재건하는 방법이 건축물의 외면에 치중하는 시선을 돌려 부실한 내면을 튼실하게 고쳐나가야 하듯, 규칙 위반이 일상화되어 있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승패의 결과에 치중하는 시선을 돌려 승자독식의 불합리한 게임판을 고쳐나가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 비극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동훈의 시선이 힘겹게 사투를 벌이는 자기연민에 갇혀 있다는 데 있다. “외력과 내력의 싸움인 인생에서 내력이 세면 버틸 수 있다는 독백이 사회적 울림으로 퍼져나가지 못하는 이유다. 부실공사와 규칙 위반을 일삼는 꼰대가 판치는 세상에서 사회적 모순이 비롯됐다고 진단하지만, 꼰대라는 자리에 드라마의 제목대로 아저씨를 환치하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모순으로 또 다시 되돌아간다.

지안을 향한 동훈의 시선이 로리타 콤플렉스가 아니라 자기연민의 동일시라 해도, 정희네 주막에서 벌어지는 아저씨들만의 공동체는 쌍문동의 마을공동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레트로 감성의 향수와 따뜻한 공동체를 향한 회고적인 환상충족이 결합된 아저씨들만의 공동체는 자기연민에 머물러 있는 남자들만의 배타적인 공간이라는 또 다른 모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드라마, 《꼰대인턴》(MBC, 2020.5.20.~7.1)
드라마, 《꼰대인턴》(MBC, 2020.5.20.~7.1)

<꼰대인턴>(MBC, 2020.5.20.~7.1)은 불합리한 게임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기업 내 조직문화를 다룬 문제적인 드라마다. ‘꼰대인턴이란 새로운 개념을 통해 꼰대가 나이에 상관없이 권력과 서열로 잔소리와 무시를 일삼는 사람을 의미할 정도로 사회 전반에 확산됐고, 자성 없는 꼰대들이 마구 휘두르는 갑질문화가 일상화된 사회적 모순을 포착하고 있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직장 내 갑질문화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권유린의 수준이다. 다방면에서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라도 인턴이라는 이유 하나로 꼰대로부터 아이디어를 도용당하고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당한다. 심지어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존재부정은 인간말살의 지경이다.

그러나 대부부의 코믹드라마가 그렇듯, 정작 꼰대의 폭력성은 드라마의 분위기를 띄우는 배경에 머물러 있고 전체적으로 웃음과 유머스러운 상황을 전경화한다. 5년 후에 다시 만난 꼰대와 인턴은 서로 자리를 바꾸어 역지사지의 원리에 따라 약간의 복수와 비굴한 아첨으로 대립하지만, 꼰대는 꼰대 역할을 할 수밖에 없고 인턴은 인턴답게 버텨내야 한다는 직장의 서열 시스템을 손쉽게 인정하고 만다. 그리하여 꼰대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겠다는 애초의 기대와 취지에 어긋나게 날카로운 풍자는 약화되고 화해와 공감이라는 손쉬운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사회적 모순이 토건공화국과 같은 구조적 부실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진수그룹은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무능한 회장과 경영자 자격조차 없는 그의 아들이 이끌어가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업이다. 여기에 자기 살길만 찾는 가신들까지 가세하여 원칙도 없이 무리한 실적을 요구하는 불합리한 시스템에서 굴욕적인 꼰대의 횡포와 갑질문화가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또 다시 도달한 곳은 더 깊어진 비동성성의 동시성이라는 모순이다. 이제 모순은 희망이라는 브레히트의 말도 더 이상 위안이 되지 못한다. 무엇이 지금의 상태로 만들었는지 문제의 원인을 안다 해도 모순은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은 지금-여기에서 각자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나가는 현실 개선형 유토피아, 즉 판토피아(pantopia)라는 바우만의 조언도 더 이상 울림을 주지 못한다. 모순에 관여된 모두가 해결에 동참하지 않거나 모순의 원인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또 다른 모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웃나라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꼬의 겸허한 참회와 진솔한 충언은 의미심장함을 넘어 숙연함을 안겨준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를 탓하며 살았으나, 나이 들어 보니 청년세대의 항변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제 일본은 지속가능한 삶이 아니라 생존만이 최우선 과제인 사회가 됐다. 이처럼 문제적인 사회를 물려줘서 진심으로 미안하다. 일본이 가라앉을 배라면, 똑똑한 작은 동물이 먼저 도망치듯, 어디라도 좋으니 도망쳐서 살아남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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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참고문헌>

  • 김선기, 청년팔이사회, 오월의 봄, 2019.
  • 우에노 치즈꼬, 박미옥 옮김,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챕터하우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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