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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홍수신화의 현대적 변주 - <설국열차>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홍수신화의 현대적 변주 - <설국열차>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0.08.24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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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50일 이상 지속된 억수장마의 피해는 아직도 복구되지 못했다. 이재민들은 무너진 집과 논을 복구하느라 땡볕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정치인들은 하릴없이 4대강 보(洑) 때문이니 태양광 시설 때문이니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기후 변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기후 변화는 우리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온난화에서 비롯되는 기상 이변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이 자연을 지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연의 역습은 더욱 강력해진다. 까마득한 옛날, 원시사회에서는 날씨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 현대보다 더 직접적이었을 것이다.

인류에게 기후는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삶을 좌우하는 기본 조건이다. 영화도 당연히 기후 변화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후 변화와 관련된 영화가 드물다. 그러한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는 유심히 살펴볼 만한 작품이다. 특히 이 영화는 홍수신화와 연결 지어서 살펴볼 수 있다. 지구 온난화, 빙하기, 열차라는 현대의 방주(ark)가 실마리가 된다. 영화의 주제를 홍수라는 자연 현상을 통한 파괴와 재생(재창조)의 관점에서 조명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설국열차>는 지구가 빙하기로 접어든 지 17년째, 순환 궤도를 달리는 열차를 배경으로 한다. 빙하기의 원인은 지구 온난화이다. 인류는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CW-7을 대량 살포했고, 그 부작용으로 제2의 빙하기가 도래했다. 이제 지구에 남은 생존자는 열차 탑승객들뿐이다. 이러한 설정은 홍수신화의 모티브 및 서사와 일치한다. 신화 속의 홍수가 <설국열차>에서는 눈과 얼음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설국열차>는 모티브, 서사, 주제 등의 측면에서 홍수신화의 현대적 변용인 셈이다.

 

<설국열차>의 서사는 열차 탑승객들의 상황에 집중한다. 지구 온난화와 빙하기의 도래는 영화 초반에 자막으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괴물>에서 용산미군기지 영안실의 독극물 방류 장면을 프롤로그에 배치한 것과 같은 플롯이다. 열차에 탑승하기 위한 아비규환의 장면은 생략한다(이 장면은 윤태호의 웹툰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대론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노아>(2014)와 다른 점이다. <노아>는 홍수의 원인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인간의 타락을 태초의 순간부터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방주(ark)에 타려고 하는 악한 무리와 노아의 치열한 전투 장면도 자세하게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노아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노아는 분명 창조주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선한 인물인 것만은 아니다. 노아와 장남 셈 부부의 갈등, 둘째아들 함의 긴장 관계는 노아의 복합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가장 널리 알려진 홍수 신화는 창세기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다. 하지만 홍수는 거의 모든 나라, 거의 모든 민족의 신화에 등장한다. 신화 속 홍수의 규모는 무지막지하다. 사람의 마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산꼭대기마저 물에 잠기고, 세계는 망망대해가 된다. 중국 홍수신화에서는 불어난 물이 하늘까지 가 닿는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이 혹독한 자연재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다. 광막한 흙탕물의 바다를 배 한 척이 혹은 조롱박이 나뭇잎처럼 떠다닌다. 이 일엽편주를 우습게보면 안 된다. 그것들은 인류 재탄생과 세계 재창조의 씨앗이다.

신화에서 홍수가 발생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인간의 도덕적 타락과 신의 징벌이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조금 황당하면서 억울한 사례도 있다. 수메르 홍수신화에서는 인간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편히 쉴 수 없다는 이유로 신들이 홍수를 일으킨다. 인간을 멸절시키기 위해서다. 홍수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신화도 꽤 많다. 우리나라 남매혼 설화가 그러하다. 장자못 설화에서도 신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신 혹은 신적인 존재가 인물의 대사를 통해 암시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홍수 이야기는 신화보다 설화로 분류된다.

 

홍수신화는 시간적으로 4천년 이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문서로 남아 있는 신화 중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홍수신화가 가장 오래 됐다. 이 지역에서 홍수 이야기는 여러 버전이 전승됐다. 지우수드라가 주인공인 수메르어 홍수 이야기, 아트라하시스가 주인공인 아카디안어 홍수 이야기, 우트나피쉬팀이 주인공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 이야기다. 이 가운데 길가메시 서사시는 고대 수메르의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인 우룩의 왕 길가메시의 모험담이다. 길가메시는 기원 전 2700년에서 2500년 사이에 존재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이 서사시는 기원전 2500년 경 유통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1000년 경에 내용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우트나피슈팀이 길가메시에게 자신이 경험한 홍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이다. 이 홍수는 기원전 2900년 무렵에 실제로 발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홍수 이야기와 창세기 노아의 방주 이야기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전체적인 줄거리가 비슷하다. 구체적인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신들이 인간들을 벌주기 위해 홍수를 일으킨다. 또 특정 인물에게 미리 홍수 관련 정보를 알려주는 신이 등장한다. 선택받은 인간이자 유일한 생존자인 우트나피쉬팀과 노아는 선인이다. 물이 줄어든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새를 날려 보내는 내용도 똑같다(새를 날려 보내는 행위는 고대문학에서 드물지 않은 장면이므로 특별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지우수드라, 아트라하시스, 우트나피쉬팀이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 홍수신화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근동의 홍수신화가 성경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시기적으로 앞서 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의 빙하기는 신화 속의 대홍수를 연상시킨다. 특히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와는 원인, 과정, 결과가 거의 동일하다. 사건, 플롯,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설국열차>는 프롤로그에서 생존자들이 탄 열차를 방주라고 표현한다(The previous few who boarded the rattling ark are humanity’s last survivors). 대홍수와 빙하기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과 죄악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는 화석연료의 무분별한 사용에 따라 온실가스가 과다배출 되면서 발생한 이상 기후다. 화석연료의 사용량은 산업혁명 이후 급증했다. 인간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산업화, 공업화가 환경 파괴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살포한 CW-7이라는 화학물질의 부작용으로 빙하기가 도래한다. 홍수신화와 <설국열차>는 재난의 진행 과정도 유사하다. 열차와 방주에 올라탄 인간과 생명체만 살아남는다.

<설국열차>의 결말은 함축적이다. 한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철로에서 이탈한 열차가 뒤집힌 채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어린 요나와 티미가 모피코트를 걸치고 설원에 서 있다. 멀리 눈 덮인 산등성이에서는 북극곰이 요나와 티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파괴된 열차, 소년과 소녀, 북극곰이 공존하는 이 장면에는 인류의 과거와 미래가 함께 들어 있다. 열차는 과거, 소년과 소녀 및 북극곰은 미래를 상징한다.

<설국열차>는 이분법적인 대립과 갈등 구도를 기반으로 한다. 우선 인물들은 지배자/피지배자, 상류층/하층민, 자본가/노동자 등으로 나뉜다. 또 열차 안에서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믿거나 그러한 믿음을 강요하는 사람과 열차 밖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으로도 구분 가능하다. 인물뿐만 아니라 공간 구도도 이분법적이다. 앞 칸/꼬리 칸, 열차 안/열차 밖의 대립이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인물의 대립 구도와 맞물려 있다. 결말에서는 큰 변화가 발생한다. 열차는 파괴되고, 황인종 소녀와 흑인 소년만 살아남고, 북극곰이 처음 등장한다. 열차 내부는 수직적인 계급사회, 타락한 자본주의, 독재국가와 같은 부정적인 언어로 설명된다. 열차 외부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점철된 내부와 대비되는 새로운 세계다.

 

홍수신화는 파괴와 재생(재창조)의 이야기다. 홍수라는 재난으로 인해 이 세계가 파괴되고, 그 폐허 속에서 새로운 생명과 세계가 만들어진다. 창세기에서는 대홍수가 끝난 뒤 노아의 세 아들에 의해 인류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영화 <노아>에서는 노아의 장남 셈 부부가 쌍둥이를 낳는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방주를 타고 9일 밤낮을 떠돈 데우칼리온과 퓌라가 돌멩이를 뒤로 던지자 인류가 새로 탄생한다. 중국신화에서도 동일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여와가 진흙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나중에는 끈에 진흙을 묻혀 털어내면서 대량으로 인간을 만들어낸다.

우리나라의 남매혼 설화에는 근친상간 금기가 등장한다. 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매는 산꼭대기에서 맷돌을 굴려 하늘의 뜻을 묻는다. 남매는 산 정상에서 맷돌을 반대쪽으로 굴린다. 그런데 산 밑에서 발견된 암수 맷돌은 신기하게도 아래위로 겹쳐져 있다. 남매는 이를 부부가 돼도 좋다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이때부터 새로운 인간의 삶이 시작된다(맷돌 대신 산봉우리에서 불을 피웠는데, 연기가 하늘에서 하나로 합쳐졌다는 판본도 있다). <설국열차>의 요나와 티미는 셈 부부, 데우칼리온과 퓌라, 남매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타락한 옛 세계가 파괴된 후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이다.

<설국열차>에 나타난 파괴와 창조의 메시지는 원작만화와 비교하면 더 뚜렷해진다. 만화 『설국열차』는 1부 ‘탈주자’, 2부 ‘선발대’, 3부 ‘횡단’으로 구성돼 있다. 『설국열차』전체를 아우르는 배경은 기후 무기 개발과 대폭발로 지구에 혹한이 들이닥치고, 1001량의 열차가 생존자들을 싣고 운행한다는 것이다. 2부는 지구상에 제2의 설국열차가 존재한다는 설정이고, 3권은 쇄빙열차 생존자들이 음악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나서지만 결국 사람이 아니라 기계만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봉준호 감독은 원작만화 가운데 1부를 각색했다. ‘탈주자’는 홀로 꼬리 칸을 탈출한 프롤로프가 체포되면서 시작된다. 프롤로프는 열차의 지도부가 있는 황금 칸으로 호송되는데, 이 과정에서 원조기구에 소속된 아들린이 연루된다. 프롤로프와 아들린은 열차의 지도부가 꼬리 칸과 원조기구 사람들을 몰살시키려 한다는 음모를 알고 이에 맞서 싸운다. 하지만 아들린은 얼어 죽고 프롤로프는 엔진 칸에 고립된다. 마침내 프롤로프는 고립된 공간에서 열차의 엔진을 혼자서 보살피는 임무를 떠맡는다.

봉준호는 ‘탈주자’의 서사와 비관적인 결말을 새롭게 각색했다.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인 홍수신화 모티브에 현대사회의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계급 문제를 접목했다. 만화에서는 프롤로프의 탈출 동기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앞 칸(황금 칸)으로 이동하는 과정도 ‘호송’일 뿐이다. <설국열차>에서는 혁명이라는 목표가 분명하다. 남궁민수가 열차를 탈출하려는 의도 역시 명백하다. 그래서 만화의 그림 작가인 장 마르크 로셰트는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이 비관적인 시나리오를 영화답게 각색해 내용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긍정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박성진, 「영화가 만화 원작 뛰어넘었다」, 『연합뉴스』, 2013. 8. 13)고 평가했다.

<설국열차>의 결말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차별 혹은 차이가 없는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오래된 미래’일 수 있다. 원시신화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말을 하고, 정답게 왕래하고, 결혼까지 했다. 이 세계에서는 당연히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긴다. <설국열차>의 ‘오래된 미래’는 과연 올까? 온다면 언제쯤 올 것이며, 우리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새로운 세계는 혹시라도 인류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홍수신화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설국열차>는 많은 생각거리를 남긴다. 다만 현재로서는 억수장마의 피해를 속히 정리하고, 코로나19라는 재난을 하루빨리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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