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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의 문화톡톡] 남성서사 속 하위 주체 남성들
[이은지의 문화톡톡] 남성서사 속 하위 주체 남성들
  • 이은지(문화평론가)
  • 승인 2020.10.0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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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서사와 남성화자의 반목

2000년대 이래로 문단에서 각광받았던 남성서사는 크고 넓은 스케일, 빠르고 선형적인 전개, 근대적 미학과 대중적 오락성의 동시적인 성취 등과 같은 요소를 통해 범주화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적‧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결합으로 재현되며 ‘K-문학’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러한 서사는 국가, 민족, 가족 등 단일한 원천으로부터 발원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통합되는 ‘본질주의적 문화’에 대한 신화가 붕괴하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팽창이 자연의 섭리인 양 여겨지는 시대에, 국경을 경계로 형성되는 통일적인 공동체성에 대한 믿음은 희박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오늘날 종족성 내지 민족성에의 지향은 정치적 변별점을 형성하는 부족주의의 한 범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경향이 수십 년에 걸쳐 꾸준히 진전되어 온 와중에도 한국문학이 국가주의-남성서사에 경사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한국사회에서 국가 역사의 주인 담론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이 유독 첨예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화를 명분으로 국가와 시민 주체를 식민화해온 역사를 주인 기표로 내세우려는 세력과의 투쟁으로부터 문학 또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러한 시대적 특수성은 이른바 남성서사에 대한 정략적 지지와 미학적 애호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2000년대 이후 남성서사는 시장경제가 식민적으로 이식되는 과정에 다름 아닌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남성주체를 피지배남성으로 하위 주체화함으로써 지배질서를 폭로하고 해체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아왔다. 서사 전략으로서의 하위 주체적 남성성은 지배질서를 체현하는 지배남성에 비해 열등한 남성, 즉 지배남성을 흉내 내고 지배남성의 자리를 갈망하지만 결코 지배남성이 될 수 없는 남성이, 지배질서의 문법을 통해 구성된 서사 내에 배치되어 서사를 교란시키고, 지배남성의 정체성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즉 하위 주체 남성의 서사는 겉보기에는 지배남성을 통해 지탱되는 지배질서를 안전하게 채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지배남성과 동질화되고픈 피지배남성의 욕망이 개입하여 그것을 추구하고 또 실패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지배남성-지배질서의 이데올로기를 무력화시킨다.

 

지배남성 흉내내기를 흉내내기

박민규의 데뷔작인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은 미국이 냉전체제와 그 이후의 세계질서를 정치경제적으로 장악하고 공고화하기 위해 문화적으로 기획했던 히어로물의 세계를 알레고리적으로 다루고 있다. 슈퍼맨이 수장으로 이끄는 DC코믹스 히어로 사단은 지구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악의 축을 상정하고 이들을 소탕하는 선악의 구도 하에서 선과 정의와 힘을 상징하며, 이는 미국에 의한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재현 전략이기도 하다. 어린 주인공은 우연히 친구를 통해 성인잡지를 보다가 담임에게 걸리게 되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는 흥미롭게도 당시 아이들이 자주 저지르곤 하던 슈퍼맨 흉내내기를 ‘흉내’내어 자살을 시도한다.

 

출처 : 문학동네
출처 : 문학동네

 

이처럼 슈퍼맨을 흉내내어 자살하려는 주인공을 구원해주는 것은 ‘진짜’ 슈퍼맨이다. 지배질서가 고안한 환상 속 존재인 슈퍼맨이 실물로 등장하여 구원해줌으로써 주인공은 죽음은 모면하였지만, 대신에 현실을 반납하고 환상 내지 착란의 세계로 입장한다. 주인공의 무구한 피지배적 욕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실존적인 선택인 자살마저도 지배질서의 문화적 상징 이미지 ‘흉내내기를 흉내내기’하는 것으로 손쉽게 대체해버릴 뿐 아니라, 그러한 욕망을 상상적으로 작동시켜주는 가상의 세계와 현실을 맞바꿔버린다.

주인공은 미국의 지배질서를 합리화하기 위해 고안된 가상의 세계를 실제 현실로 믿고, 이에 근거하여 사고 및 행동하는 착란의 상태에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슈퍼맨을 따라 들어간 정의의 본부에서 히어로들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청소년기를 보낸 주인공은 ‘바나나맨’이라는 새로운 히어로 캐릭터를 부여받는다.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즉 동양인이지만 영혼만은 백인인 바나나맨은 지배질서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기보다는 그러한 착각을 할 수 있는 승인을 간신히 받았을 뿐이다. 즉 바나나맨은 슈퍼맨과 같이 지배질서를 일으켜 세우고 작동시키는 지배남성의 표상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슈퍼맨으로 대표되는 지배남성 기표가 지탱하는 상징질서를 마치 바나나처럼 구부러뜨리는 환유의 역할은 수행한다. 이는 사실상 피지배남성이 지배남성을 흉내내며 지배질서 내에서 수행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구부러뜨리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지배질서 구부러뜨리기의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정작 바나나맨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배질서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지배질서 안에서 제법 중요한 부품으로 거듭나고 작동한다는, 지배질서의 주인기표인 지배남성으로부터 부여받은 환상에 심취해 있을 뿐이다. 자신이 지배남성의 표상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는 이러한 착각은 역설적으로 지배질서의 불완전함, 지배질서의 실패를 드러낸다. 즉 그가 재현하고 있다고 믿는 것과 그가 실제로 재현하는 것 간에는 차이가 발생한다. 고작 바나나맨에 불과한 그가 그럴듯한 히어로 역할을 수행한다고 진정으로 믿으면 믿을수록, 그러한 믿음을 작동시키는 질서의 진정성은 위협받는다.

 

지배남성을 받아쓰는 피지배남성 베껴쓰기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는 지배남성-지배질서를 받아쓰도록 강요당하는 피지배남성의 기구한 운명을 조명한다. 박정희의 뒤를 이어 전두환이 독재정권을 잡고 국민을 상대로 온갖 전횡을 휘두르던 시절, 고아원 출신에 까막눈인 주인공 나복만은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어떻게 하면 동거녀 김순희와 동침할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일상인 소시민이다.

 

출처 : 민음사
출처 : 민음사

 

독재자로 하여금 국가폭력을 국가질서로 둔갑시켜 통치하게끔 하는 원동력은 강대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순종함으로써 이러한 힘의 질서의 연장에서 국가폭력 또한 정당화시키는,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차남화(次男化)’에 있다. 소설은 전두환을 시종일관 ‘누아르’의 주인공으로 묘사하는데, 누아르는 형님을 모시고 형님의 자리를 승계하는 것을 주된 축의 하나로 삼는 장르라는 데서 그 의도를 찾을 수 있다.

전방위적인 국가폭력에 나복만은 우연히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까막눈이어서 대리시험으로 운전면허를 취득한 나복만은 혹시나 법망에 걸릴까 아주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안전운전을 추구해왔다. 가벼운 접촉사고가 발생하자 그는 같은 논리에서 제 발로 원주 경찰서로 걸어 들어가지만 그만 교통과가 아닌 정보과에 들어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종국에는 부미방화사건의 중요한 연결고리 중 하나로 기획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나복만은 안기부 원주지부에 붙잡혀 들어가 여러 날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안기부가 기획한 연출을 제 손으로 시인하는 진술서를 쓸 것을 강요당하지만 이를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진술서를 쓰지 않는 것이 글을 쓸 줄 모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더욱 가혹한 고문의 연속에 시달린다.

나복만이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까막눈이라는 사실을 숨긴 까닭은 기획된 진술서를 그대로 옮겨 쓰는 것, 즉 지배질서 흉내내기의 불능 상태, 다시 말해 ‘지배남성을 흉내내는 피지배남성’을 흉내낼 수조차 없는 상태에 자신이 놓여 있음을 자백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오로지 지배남성-지배질서와 동일시하고 그것을 모방하는 것을 통해서만 남성성을 승인받고 표출할 수 있는 기이하고 폭력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이 차남은커녕 차남의 차남도 될 수 없는 상태임을 자백하는 것은 나복만이 자신의 남성성을 스스로 거세하는 꼴과도 같기 때문이다.

기획수사를 워낙 많이 한 끝에 매뉴얼화된 고문을 착실히 진행하고도 나복만이 최종 진술서를 베껴쓰지 않자 고문관들은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심지어는 베껴쓰지 않는 나복만의 태도를 통해 사실은 나복만이야말로 진짜 대단한 뭔가가 있는 놈이 아닌가 하는 심증까지 갖게 된다. 미국-한국-원주에 걸쳐 지배남성-지배질서 흉내내기가 수직적으로 위계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나복만의 불가해한 버티기는 이 위계의 고리를 분쇄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결국 나복만은 사실을 자백하고 안기부 직원의 지휘 아래 진술서를 수차례 그리다시피 하며 그럴듯하게 베껴쓴다. 이 베껴쓰기는 지배남성-지배질서를 철저히 비자발적‧무의지적으로 흉내내는 것으로서, 바나나맨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나복만에게서는 베껴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멍청하리만큼 완고하게 베껴쓰지 않고 버틴 그 과정이 이미 지배질서를 교란시킨다.

나복만은 진술서를 베껴쓰지 않는 동안에도, 또 베껴쓰는 동안에도 모두 지배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저항에 도달한 셈이다. 베껴쓰지 않는 동안에는 그 불가해한 고집을 통해 고문이라는 폭력 장치를 무화시키고, 지배남성-지배질서에 복종하며 기획된 서사를 안기부 직원들 스스로 의문시하게 함으로써, 베껴쓰는 동안에는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서사의 내용을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한 채 써내려가는 무의지적인 순종을 통해서. 표면적으로 나복만의 진술서는 안기부의 기획에 완벽하게 들어맞지만 까막눈이 그려 쓴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이면에 진술의 불가해함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즉 나복만의 진술서는 나복만 뿐 아니라 안기부 직원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지배질서를 교란시킨다.

 

지배질서에 용해된 피지배남성의 자기식민화

성석제의 『투명인간』(창비, 2014)은 한국사회의 근현대사를 일가족의 흥망사에 대입하여 전개한다는 점에서 역사서사의 한 전형으로 읽힌다. 할아버지-아버지-아들 3대에 걸쳐 가장으로서의 남성이 가계를 부양하는 지난한 과정이 근현대사의 장구한 여정의 한 지류로서 반복 및 변주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이 서사의 중심인물인 만수는 숱한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만 재현되고 증언될 뿐, 본인 고유의 목소리가 없이 일종의 ‘서발턴’과 같이 처리되고 있어 흥미롭다. 만수를 제외한 수십 명의 일인칭 화자들이 대신 말하는 화법은 만수의 평면성을 부각하고 그 내면을 철저히 부재하게 만든다.

 

출처 : 창비
출처 : 창비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남성적 전형성을 만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학문에 열중하는 고집 센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에 반발심을 갖고 있으며 마초적이고 생활력 강한 아버지, 총명하지만 병약한 문학청년이자 월남전에서 사망한 장남 백수 등과 달리 만수는 특징이 없을 뿐 아니라 어디에나 잘 섞여들고 잘 휘말려든다. 이처럼 가장 남성성과 거리가 먼 만수에게 일가를 책임져야 하는 역할이 부여된다.

이처럼 사실상 대리 장남의 역할을 떠맡아 가족을 부양하게 된 만수가 가장 반주체적이고 가장 주변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여성을 사적 영역인 가정과 동일시하고, 남성을 공적 영역에 위치시키는 <별개 영역 separate spheres>의 이데올로기”[1]의 가장 큰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자들이 피식민국에 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전파하기 위해 이상적인 정체성을 연출하면서 나중에는 그것을 선천적이고 본래적인 것으로 믿게 되었듯이, 만수는 자신에게 뒤늦게 부과된 부양자 남성으로서의 의무를 문제시하지 않으며 완전히 내면화한다. 즉 만수는 순전히 강제로 부양의 의무를 떠맡았음에도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 것처럼 행동하고 사고한다.

이러한 만수의 주변성 혹은 투명성은 한국사회의 경제개발서사가 남성 가장의 자기식민화를 통해 전개되어왔음을 인물의 특성으로 내면화하여 보여주는 것과 같다. 지배질서의 남성성은 그 구성원의 남성성을 희생시키거나 희석시킴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 만수는 지배질서 내 피지배남성으로서 지배질서의 의지를 자기 고유의 의지인 것처럼 완전히 착각하고, 그렇게 지배질서의 동력으로 동원된다.

지배질서에 동원되고 착취당하는 피지배남성에게 자기 의지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시피 하다. 여기서 지배질서에 동원되기 때문에 무의지적으로 된 것인지, 무의지적이기 때문에 지배질서에 동원되는 것인지 그 선후관계는 확인할 수 없다. 소설은 만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투명인간으로 변한다는 설정을 취하고 있지만, 그러한 물리적인 변화를 겪기 전부터 만수는 투명인간이나 마찬가지다. 만수는 자신에게 부과된 과업을 한 점 거스르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일 뿐 아니라 너무나 기꺼운 마음으로 수행한다. 이러한 만수의 투명함이야말로 투명인간이 된다는 설정보다 더 만수를 비현실적이고 비인격적인 존재로 여겨지게 한다.

소설 후반부에서 투명인간이 된 이들을 취조하는 익명의 인물은 만수의 반주체적이고 체제순응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단 한 번 주체적이 되어볼 겨를도 없이, 혹은 체제에 꼭 맞는 주체로 순순히 기능해온 나머지 철저하게 반주체적이 되어버린 만수를 향해 비난이 퍼부어진다. 그는 만수와 같이 지배질서의 충실한 ‘효과’에 불과한 이들을 향해 지배질서의 거악을 문제 삼고 추궁함으로써 투명인간을 또 다시 투명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저 분석하고 비판하는 권위적인 목소리는 만수의 투명함에 그대로 되비춰보이는 지배질서의 표면만을 읽어낼 뿐, 그 이면의 내막은 결코 들여다보지 못한다.

 

목소리 없는 남성들, 그리고

남성서사와 남성인물 사이에는 지배-피지배의 종속적 위계관계가 작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 구도 속에서 피지배자의 위치에 놓인 남성인물은 일견 지배질서에 순순히 동일시하여 서사를 진행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배남성-지배질서의 표상을 부분적으로 재현하는데 그치는 흉내내기를 수행함으로써 지배질서에 타격을 가하고 있다. 그들이 가하는 타격은 지배질서에 완전히 밀착한 채로 수행하는 해체 내지 전복의 전략으로서, 지배질서에 포섭되고서야 가능한 전략, 따라서 지배질서를 무화시키거나 극복할 수도 없으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기 자신까지 소멸시키는 자기 파괴적인 전략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를 지배질서의 충실한 주체로 착각하는 기만적인 자의식, 즉 자신이 지배남성이거나 지배남성일 수 있다는 자의식을 통해 ‘의도치 않게’ 지배질서를 타격하는 피지배남성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자기 파괴적 결말에는 애초에 도달할 수조차 없다.

이들은 지배남성-지배질서의 수직적 위계구조 속에서 구조적으로 차남화하는 동시에, 여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주도하기보다 주도당하는 위치에 일관되게 놓여 있다. 이들에게는 주도하거나 주도당하는 양자택일만이 가능한 구조 속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자리를 바꾸는 것 외에는 허용된 것이 없는 셈이다. 여성인물들과의 관계 구도는 소설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으나, 남성인물들이 구조를 흔들거나 뒤집을 수는 있되 구조를 바꾸지는 못하는 피지배자의 위치에 놓여 있는 상황을 어느 정도 부연해준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이들을 지배하는 구조 자체만이 유일한 승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일관되게 드러나는 이러한 상황은 지배남성-지배질서 내에서 남성이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가로막혀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라캉에 따르면 여성 주체는 “상징계가 아니라 기표의 결여 자체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남근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존재의 향유를 누리는 위치”에 놓여 있어 “새로운 정치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혁명적 주체화”에 부합하는 반면, 남성 주체는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면서 거세를 수용하는 위치”에 놓여 있어 “철저하게 아버지의 기표가 보장하는 상징적 보편성 논리에 머물면서 불가능한 기만적 향유”만을 누리는 데 그친다.[2] 현실을 도피함으로써 현실을 극복하는 바나나맨을 비롯하여 소설 속 남성인물들은 상징질서 내에서 남성 주체가 처한 한계를 잘 보여준다.

그렇기에 지배질서에 유효한 타격을 가하는 하위 주체 남성 서사의 미덕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하위 주체 남성 내지 피지배남성의 저항은 지배질서의 절대적 강고함을 위협할 수는 있으나 바로 그만큼 개별 남성 주체 또한 소진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저항의 타격감을 무효화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차라리 지배질서에 대해 파괴적 저항력을 발휘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도 않는 남성성에 대한 모색인지도 모른다. 즉 지배남성 흉내내기와 같이 당장 유효한 전략이 아니더라도 개별 남성 주체가 보다 생산적으로 지배질서에 저항하고 그 변화 가능성을 장기적으로 모색하는 문학적 기획이 필요한 것이다.

 

[1] 박형지‧설혜심, 『제국주의와 남성성』, 아카넷 2004, 16쪽.

[2] 김석, 「권력의 자리를 바라보는 두 입장」, 『헬조선에는 정신분석』, 김서영 외 편저, 현실문화, 2016, 149쪽.

 

* 이 글은 요즘비평포럼 <남류소설가 : 남성서사 되묻기>에서 발표한 원고를 축약, 수정한 것입니다.

 

글 : 이은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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