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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단호한 집행자가 되어야만 했던 여자, <어미>
[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단호한 집행자가 되어야만 했던 여자, <어미>
  • 성진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0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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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에 여자 배우를 위한 시나리오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몇 년 전이다. 이 문제 제기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남성 위주의 이야기가 한국영화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과 (여성이 주요 등장인물인 경우에도) 한정된 캐릭터만 여성에게 주어진다는 점이다.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1975)에서 영화가 언제나 거의 남성 시선의 지배를 받는 매체라고 주장했고, 몰리 헤스캘이 『숭배에서 강간까지: 영화에 나타난 여성상』 (1974)에서 할리우드 영화가 여성 캐릭터를 성녀 이미지와 창녀 이미지라는 극단적 이분법으로만 소비한다고 비판했던 것이 50여 년 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러한 현상이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문제라고만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1980년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면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소개하고 있는 이 연재를 위해 의미 있는 12편의 영화를 고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은 그 방증이 될 것이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 흥행 이후 소위 ‘호스티스 영화’가 유행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는 한국영화에서 말 그대로 성녀와 창녀 이미지라는 극단적으로 이분화된 여성 이미지 소비가 가장 표면적으로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상업적 유행 사이클로서 ‘호스티스 영화’ 유행이 형성된 것은 1970년대이지만, 1980년대 영화에서도 집창촌의 여성은 한국영화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여성 캐릭터 중 하나였다. 가난, 빈곤, 도시 빈민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집중되었던 1980년대 한국영화의 어떤 흐름 속에서 창녀는 ‘가난한 여성’을 대표하는 이미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중 의미 있는 영화들은 종종 사회 착취구조의 제일 밑바닥에 있는 그들을 희생자이자 감추어진 사회의 어두운 모습으로 조명한다. 이러한 많은 영화는 이 가난한 여성들은 나쁜 남자를 만났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너무 순진해서 사기를 당했거나, 혹은 예기치 못한 불운한 상황 때문에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내어놓는 삶을 살게 되었을 뿐이지, 사실은 희생자이자 순수한 성녀들이라는 태도를 갖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집창촌 여성의 존재와 삶을 '가난한 여성'이라는 계급의 필터를 경유해 이해하다보면 희석되는 사실이 있는데, 성매매가 기본적으로 남성에 의해 자행되는 여성을 향한 성적 착취와 폭력이며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이나 상품으로 보는 남성 사회의 암묵적인 합의를 토대로 유지되어 왔다는 점이다. 영화 <어미>(박철수, 1985)는 바로 이 지점에 있어서 여타 영화와 차이를 보이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인 홍영애(윤여정)는 넓은 이층집과 자가용을 소유하고 파출부를 부리는 부르주아 계급 여성이며,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이고 라디오 DJ를 하기도 하는 유명인사이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오랫동안 만나 온 연인이 있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다. 경제적 부유함과 사회적 명성,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유로운 연애를 하며 스스로가 원하는 삶을 거침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던 홍영애의 삶을 일순간에 바꾸어놓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은 고등학생인 딸의 실종이다. 홍영애가 애인과 함께 머무느라 딸 나미와의 약속 장소에 뒤늦게 도착해보니 딸의 도시락 통만 떨어져 있고 아이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고 딸을 찾기 위해 애쓰던 그녀는 한 남자의 제보 전화로 나미가 한 지역의 집창촌에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다. 늦은 밤 수업을 마치고 엄마를 기다리던 나미는 사내들에게 납치되어 강간당하고 집장촌에 팔아넘겨졌던 것이다. 경찰이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도 나미를 찾지 못하자 스스로 나미를 찾기로 한 홍영애는 우연히 포장마차에서 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영자(송옥숙)을 만나 정보를 얻고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나미를 구하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나미를 납치했던 일당 중 한 명을 죽이게 된다. 홍영애는 나미가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결국 나미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홍영애는 나미를 해한 남자들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대략적인 줄거리에서 볼 수 있듯이 <어미>는 호스티스 영화가 아니다. 딸을 잃은 엄마가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영화다. 영화의 전반부는 납치된 나미의 상황을, 영화의 후반부는 홍영애의 복수를 재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납치, 강간, 집창촌에서의 폭력이 잔혹하리만치 밀도 높게 재현되는 전반부와 비교해 볼 때, 홍영애의 복수를 그리는 후반부의 리얼리즘은 다소 느슨해 보인다. 안락한 삶을 살던 작은 체구의 여성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여러 명의 사내를 차례로 죽이는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대한 보다 치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가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그 후반부에서 인물과 서사를 지배하는 정서가 가지는 힘은 그 자체로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홍영애의 행동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딸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죄의식,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들에게 대한 분노, 그리고 딸을 지키는 것이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라는 의무감이 깃들어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견고하고 오래된 신화적인 모성과 만나 초인적인 한 여성의 복수를 그럴듯하게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의 제목이 <어미>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영화는 홍영애의 복수가 엄마의 복수 그 너머로 향하기를 의도하는데,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Woman Requiem>라는 것은 그 중요한 단서이다. 한글 제목인 ‘어미’를 직역하여 영어 제목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여성 진혼곡’이라는 영어 제목을 선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홍영애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좋은 엄마인가?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첫 장면부터 담배를 피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계란 프라이와 토스트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남자와 연애는 해도 결혼에는 무관심한 여성이다. 게다가 그녀는 애인과 함께 있느라 딸과의 약속 시간을 맞추지 못함으로써 딸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표면적인 인과성을 고려하면 딸 나미의 불행은 홍영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그 모든 책임을 홍영애에게만 지우지 않는다. 홍영애 또한 죄의식을 갖고 있긴 하지만 자신이 온전히 그 죄의식을 떠맡으려 하지 않는다. 홍영애는 딸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자들에게 죄를 묻기로 하고 스스로가 집행자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치밀함이 부족해 보였던 후반부의 재현 또한 다른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게 된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피하고 최소한의 인과 장치만을 이용해서 홍영애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이는 과정을 재현하는 방식은, 홍영애의 캐릭터를 ‘엄마’에서 ‘단호한 집행자’로 전환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홍영애의 행위를 엄마의 복수에서 집행자의 처벌로 확장해가면서 동시에 나미에게 일어난 사건에서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성별의 위치를 정의해나간다.

 

홍영애의 집행이 나미의 납치, 강간 사건에 연루된 남자들에게만 향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영화에는 집창촌에서 나미를 관리하고 감시하는 두 명의 여성이 나온다. 그 둘 어느 누구도 나미를 보호하거나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한 명은 나미가 도망가는 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자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한 명인 영자는 홍영애가 준 돈 덕분에 집창촌을 벗어난다. (영화에서 영자가 집창촌을 벗어나는 것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렇게 유추할 수 있다.) 집창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버렸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미와 그 두 여성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집창촌의 신입인 나미가 겪는 가혹한 일들이 탈출 의지와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꺾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은 나미를 교육시키고 감시하는 일을 하는 영자도 4년 전에 나미와 같은 일을 당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 영화가 보여주는 여성과 남성 간의 명백한 이분법적 구도와 나미가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점은, 성매매가 가난한 여성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는 남성이 또 다른 성인 여성에게 자행하는 폭력의 구조 속에서 유지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홍영애의 복수는 모든 여성을 위한 진혼곡이 되는 셈이다.

김수현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박철수 감독이 연출한 <어미>는 박철수 감독의 또 다른 연출작 <안개기둥>보다 1년 앞서 만들어진 영화다. 이 두 영화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여성 운동과 그것이 지향하는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가정헌장’으로 시작하는 <안개기둥>에서는 성평등에 기반을 둔 고용법 제정 기사가 크게 노출되고 여성 인물들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 나눈다. <어미>에서는 홍영애가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세미나의 타이틀은 ‘여성의 사회활동 개선을 위한 세미나’다. 그리고 이 세미나는 홍영애가 경찰의 눈을 피해 남자들을 단죄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제공해준다.

여성의 삶을 주의 깊게 조명하는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수의 영화들이 나름의 방식대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1970년대와 80년대 호스티스를 등장시킨 한국영화들 중에 그들의 부당한 처지를 훌륭한 시선으로 다루는 영화들이 있다. 어쩌면 <어미>는 그와 같은 영화의 흐름 속에 위치한 새로운 시도 중 하나일 뿐일 수 있다. 나미가 겪는 끔찍한 경험에 대한 노골적인 재현이나 극단적인 이분법에 기댄 목적지향적인 이야기는 이 영화가 가진 치명적인 한계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10년 사이에 이런 영화는 없었다’는 예고편 영상의 카피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여성의 현실을 유교적 이데올로기 문제나 휴머니즘이라는 정서에 기대기보다는 여성과 남성 간 권력의 불균형과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과 착취라는 틀 안에서 재현하는데 집중하고, 더 나아가 동시대의 페미니즘 운동과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영화는 흔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글·성진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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