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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테넷>:사회적 이론의 승리, 영화적 이론의 실패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테넷>:사회적 이론의 승리, 영화적 이론의 실패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1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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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명성은 영화와 현실 간 맞춰지는 정확성에서 비롯된다. 이 때 ‘정확성’이란 영화로 현실을 매우 똑같이 모방했다는 뜻이 아니라, 영화의 한계를 직시함으로써 그 한계에 현실을 정교하게 짜 맞췄다는 의미이다. 이를 테면 영화 <덩케르크>의 정확성은 일주일간의 사실적인 시간을 위해 영화 한편을 일주일동안 상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은유할 수 있는 시간의 이론 혹은 법칙을 정확하게 짜 맞춤으로써 2시간 남짓의 시간을 현실 못지않게 정확히 직조했다는 사실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써 그는 현실 속 ‘이론’과 ‘법칙’에 민감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영화에 정확히 요약할 수 있는 정교한 이론과 법칙,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에서부터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를 영화에 정확히 인용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한국 관객들은 바로 놀란 감독의 이런 점에 환호했다. 그런 그의 노력이 때로는 자녀의 학업 성취도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부합하기도 했고, 난해 한 영화를 정교하게 분석해 낼 때 느낄 수 있는 지적 쾌감 혹은 지적 우월감과 연결되기도 했다. 그는 영화이외의 이야기로 영화를 이야기하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테넷> 역시 바로 이러한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여지없이 ‘엔트로피’ 이론과 열역학 제2 법칙 그리고 양자역학과의 상관관계를 들고 나온다. 소위 “엔트로피가 감소하면 시간은 역행한다‘는 가설이 또 다시 <테넷>에 정교하게 인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이러한 성향은 여지없이 우리의 호기심에 불을 댕긴다. 

하지만, 나는 <테넷>을 보면서 이제 그의 이런 노력이 일정 부분 한계에 봉착한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놀란이 추구하는 엄밀한 이론과 법칙이 영화에 정확히 인용되면 될 수록 어떤 조악한 단순성에 점점 더 함몰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다. 그 단순성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 뒤로 감기’이다. 나는 정확히 이 지점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향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자 한다.

 

‘카메라 뒤로 감기’를 ‘인버젼’ 된 상태, 즉 시간 역행의 상황(열역학 제2 법칙이 역행하는 것)으로 대체한 해석은 그가 항상 추구하고자 했던 이론과 법칙의 정확한 인용에 대한 지나친 집착의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영화 카메라의 기계적 속성에 종속당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나 역시도 프랑스 미디어 학자 빌렘 플로슈의 이론에 따른 분석의 결과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기계적 속성에 종속당했다는 것은 프로그래밍된 장치가 지닌 제의(祭儀)적 속성, 즉 카메라 장치의 '자동화'에 종속당했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그는 일찍이 인간의 성찰적 힘이 스스로 확립되지 못하고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이것을 꼽았다. 다시 말해 자동화된 기계장치는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마비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누구보다도 강한 사유의 힘인 이론과 법칙을 영화에 인용하고자 노력했던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과 법칙에 정확하고자 했던 놀란 감독의 욕망은 결국 또 다른 이론, 즉 자동화 장치의 제의적 속성에 빠지면 사유의 힘이 마비되고 만다는 이론에 고스란히 걸려들게 된 것이다. ‘뒤로 감기’라는 카메라 기능으로써 시간의 역행을 치환하려는 시도는 그에 대한 정확한 증거다.

특히 이것이 지닌 위험성은 해독할 수 없는 이미지의 무차별적 생산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데, 영화 <테넷>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이유 역시 이에 대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해독 불가능한 이미지가 남발하게 되면 위험한 이유는 이로 인해 해석의 좌절을 매번 경험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사유 활동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바로 이 모든 과정을 고스란히 뒤따르고 있다. 어쩌면 영화에 녹여내고자 한 '이론'에 대한 정확한 적용때문에 영화 그 자체는 또 다른 이론에 휘말리게 되버린 셈이다. 이는 사회적 이론의 승리이자 영화적 이론의 실패이기도 하다. 영화로써 현실과 가상의 정확한 접점을 통찰해내었던 놀란 감독의 노력이 <테넷>에 이르러 카메라 기능에 종속된 것으로 읽히는 것은 그래서 안타깝다.

 

그렇게 <테넷>을 향한 여러 비판과 한계 지적은 카메라 장치의 제의적 자동화 이론을 거치면 더 뚜렷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늘 기대로 충만했던 놀란 감독의 정확해지고 싶은 이론을 향한 욕망이 제의적 프로그래밍 이론에 결국 함몰되어 간 것을 지켜보는 것은 지극히 괴롭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라는 국내용 포스터 문구 역시 해독할 수 없는 이미지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같아 보인다는 점에서 기름을 붓는 겪이라 더 안타깝다.

그러나 되짚어 생각해 보면, <테넷>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추구했던 장점이 곧 그의 한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기를 향한 경고음일 수 있다. <테넷>은 '사회적 이론'의 정확함(제의적 프로그래밍)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영화적 이론'(열역학 제2 법칙 등)의 재현적 한계를 함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 경고음이 유효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그의 차기 작에 대한 관전 포인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이런 식으로 또 다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차기작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고 만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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