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설정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하위문화의 유희-<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의 어정쩡함에 대해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설정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하위문화의 유희-<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의 어정쩡함에 대해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19 09: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굳이 의도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있다. 거대한 세계가 만들어 놓은 질서와 무수한 규범들, 그리고 그 안에 내재한 무의식은 우리가 특별히 동의한 적이 없음에도 당연하게 체화된다. 가령 사람을 함부로 해하면 안 되며 그러한 의도를 지니는 것조차(설사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그 행동이 누군가를 충분히 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까지를) 죄악시해야 한다. 이 규범을 쉽게 무시하는 이들에게 질타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나아가 생명체라는 경외의 존재를 둘러싼 가장 근본적인 질서와 규범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그러해야 한다는 굳은 믿음을 주는 당위성을 지닌다.

바로 이러한 당위성이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무너져내렸을 때, 그리고 그것이 의도치 못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유희의 담론을 형성할 때 그것은 일종의 하위문화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하위문화라는 용어에서부터 이는 무엇인가 다음 혹은 그 아래라는 의미를 분명히 지시하지만, 전복성이 하위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점에서 ‘하위’는 수준의 문제가 아닌 반항이나 그로 인한 흥미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위는 이미 만들어진 질서가 가진 엄숙함과 고귀함(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뒤집고 헤집으며 그것이 가진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를 둘러싼 질서를 전제로 하는 하위문화는 우리의 규범이 그랬던 것처럼 특별한 부연이 필요치 않다. 무엇이 뒤집히는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함께 조롱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질서 안에 들어온 이들에게는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

 

그렇기에 아무런 질서도 정리도 없이 나열되는 것만으로 하위문화가 될 수 없다. ‘무엇을’ 뒤집고 있는가의 문제는 하위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너무 각 잡고 겨냥해도 또 너무 낭창하게 풀어져 있어도 그 작품은 하위문화로서의 지위를 얻기 힘들다. 적어도 작품을 보는 관객들이 무엇을 전복시키며 조롱하고 있는가에 동의하거나 이후의 유희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때 하위문화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어쩌면 하위문화의 지위를 부여받는 것은 걸작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다. 하위문화에는 분명 관객의 창의적 유희까지가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이 ‘B급 정서’를 앞에 달고 작품을 위치 지으려 한 것은 아마도 ‘죽지 않는 인간’, 즉 영화 속 외계인이라는 설정의 독특함을 작품의 중요한 유희 영역으로 이해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우리 안에 아무렇지 않게 함께 살고 있지만 분명한 외부인,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에너지를 얻기 위해 다른 이성을 만나고 휘발유를 마시며, 제거했다고 생각했지만 할 수 없는 그들은 분명 인간계의 영역에서 소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모르는 인간들, 즉 이들의 존재를 믿거나 그것을 믿는 이의 말을 믿음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들 역시 쉽게 일반의 영역에서 설명하기 힘들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예상 밖의 모습들은 사실 매우 다양한 각도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기에 소재적으로 충분한 활용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 설정을 나열할 뿐 영화 내부에서 특별한 활용으로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는 것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들, 혹은 죽지 않기에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영화는 고민하지 않는다. 특히 이 작품이 사건의 시발점으로 삼는 것이 결혼한 상대에 대한 불신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믿음과 사랑 등에 대한 비틀기가 가능했겠지만, 영화는 바로 외계인이자 배우자인 이를 죽이기로 돌입하고 살인 방법을 공모하는 것에 집중하며 특별한 흥미로 일으키지 못한다. 영화는 특별한 설정에 대해 영화는 많은 관심을 가지는 듯 보이지만(가령 세라(서영희)는 과거 자신의 남자친구를 매우 잔인하게 죽였다는 소문에 둘러싸여 있으며, 양선(이미도)은 친구들 앞에서 매우 잘난 척 하지만 사실은 무명의 배우이다.) 이것이 영화적 상상력 속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뚜렷한 답도 가지고 놀 거리로서의 고리도 내놓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이야기 구조와 캐릭터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시실리 2km>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관객의 향상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 작품에서 닥터장(양동근)이 겪는 돌발적 상황과 사고들은 <시실리 2km>에서 석태(권오중)이 겪었던 것과 여러 면에서 매우 흡사하다. 다수의 인물들이 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나, 살해의 목표가 된 인물 주변에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주변 인물들이 배치된 구조 역시 과거의 작품과 매우 유사하게 맞물린다. <시실리 2km>가 인간의 탐욕과 위계에 대한 은유나 조롱을 독특하게 풀어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이 2000년대 초반의 정서 속에서 운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은 2020년 문화적 궤적 속에서 어떠한 위치도 잡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작품적 시도=스케일 혹은 캐스팅’으로 왜곡되어 버린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장르와 감성에 대한 기대는 늘 목 마르다. 잠재적 관객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환호하는 하위문화의 논리는 이제 난장 속 유희와 더불어 ‘그럴 듯함과 고퀄’까지를 요구한다. 쓸데없는 고퀄이 주는 희열과 무의미가 하위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진전이 된 것이다. 상상력이 도달해야 할 곳은 늘 소재를 넘어선 곳에 있다.

 

(1) 2000년대 초중반부터 매우 유행했던 하위문화로서의 B급 문화는 여러 영역에서 활용되었고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정점을 찍은 후 꾸준히 이어진다. LG생활건강의 FiJi 광고나 충주시 홍보 포스터 등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대기업, 그리고 공무행정이라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전복시켰기 때문이다. 이것 자체로 의미를 가지며 즐거움을 선사하는 하위문화적 유희들은 최근 ‘Feel the Rhythm of Korea’라는 제목의 한국관광홍보영상물을 통해 다시 한 번 의미가 발하고 있다. 밴드 이날치의 음성과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흥겨움이 만난 이 홍보영상은 기존 국가주도의 홍보영상이 보여주었던 정적인 이미지를 완벽하게 전복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2020)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