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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보이콧의 기억 - <007 어나더데이>
[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보이콧의 기억 - <007 어나더데이>
  • 송영애(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19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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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콧’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공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치는 일”로서 “특정한 제품을 사지 않기로 결의하여 그 생산자에게 압박을 가하는 조직적 운동”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참고)

보이콧은 사주나 관계자의 행동이나 발언, 국가 간 입장 차이 등 다양한 계기로 인해 발생한다. 보이콧 대상도 특정 상품부터 특정 국가와 관련된 전반적인 것까지 다양하다. 보이콧의 효과는 보통 판매량, 매출액 등 양적 수치로 가늠되는데, 양적 수치 감소를 보이콧의 효과로만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비교 작업이 필요하다.

영화도 보이콧의 대상이 되곤 한다. 최근에는 <뮬란>(니키 카로, 2020)이 주연 배우 유역비의 SNS 발언과 로케이션 관련 논란이 일며, 여러 국가에서 보이콧 움직임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동참하는 움직임이 감지됐다.

<뮬란>을 대상으로 한 보이콧의 효과 분석은 관련 자료들이 확보된 이후로 기약하고, 대신 <뮬란>의 보이콧 소식을 접하며 떠오른 기억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바로 영화 <007 어나더데이>(리 타마호리, 2002)에 대한 보이콧의 기억이다.

 

'007어나더데이'(2002) 포스터
'007어나더데이'(2002) 포스터

<007 어나더데이>가 개봉된 이후 세계적으로 역대 007 영화 중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우는 동안, 국내에서는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국내에서 체감했던 보이콧 움직임은 꽤 강력했다.

당시에는 전국 영화관 전산망이 통합되기 이전이라 서울개봉관 관객 수가 공식 통계로 공개되었는데, 해당 연도별 『한국영화연감』의 서울 관객 수를 참고하면, <007 어나더데이>는 약 19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는 연간 국내 흥행 순위에서 50위권을 벗어나는 수준이었다.

이 영화 이전 이후 007시리즈 영화들의 서울 관객 수를 비교해봐도 <007 어나더데이>의 흥행은 눈에 띄게 저조했다. 1998년에 개봉된 <007 네버다이>(로저 스포티스우드)는 약 4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1999년 개봉된 <007 언리미티드>(마이클 앱티드)는 약 5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2006년에 개봉된 <007 카지노 로얄>(마틴 캠벨)도 약 33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2002년에 개봉된 <007 어나더데이>의 19만 명이라는 관객 수는 분명 튀는 수치였다.

당시 필자가 담당했던 교양 강의 수강생 200여 명 중에도 이 영화를 봤다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개봉한 지 몇 주 지나,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있는지 물었는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정말로 그 영화를 본 학생이 없었거나, 혹 봤더라도 차마 손을 들 수는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무엇이 한국 관객들이 그렇게나 <007 어나더데이>를 거부하게 했을까? 많이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가 담아내고 있던 북한과 남한의 모습이 문제였다. 크게는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을 비롯해 작게는 풍경, 세트와 소품, 대사까지 한국 관객들에겐 총체적 불편함을 주었다.

허구의 스토리를 담는 극영화에 완벽한 사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모르면 지나쳤겠으나 잘 아는 것들이다 보니 도저히 지나쳐지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한국 관객이 이 영화에 감정이입 하기 위해선 많은 것들을 ‘영화니까’라며 넘길 수 있어야 했다.

작은 것들 위주로 예를 들어보자면, 영화 초반 제임스 본드 일행은 거대한 파도를 타며 북으로 진입한다. 친절하게 자막으로 해안 이름을 알려주지만 북한에 저리 거대한 파도타기 지점이 있는지 의심이 된다.

뒤이어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되는 ‘지뢰출몰’이라 쓰여 있는 경고판이나 ‘늙은 사람’이라 쓰여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은 잠시 한글의 반가움을 느끼게 하지만, 웃음을 준다. 한글 해독 가능한 사람에겐 영화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된다. 절 어딘가 드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범종도 한국 관객만이 발견할 수 있는 비현실성이다.

영화 종반에는 예비군복을 입고 북한으로 잠입하는 영국과 미국 정보요원(제임스 본드와 징크스)도 보게 되고, 비무장지대 부근으로 추정되는 지역 논에서 (물)소도 보게 된다. 북한군 문 대령이 자신의 공간에 고이 전시해 둔 책 ‘손자병법’도 보게 되는데, 영 이상하다.

 

'007 어나더데이' 스틸
'007 어나더데이'(2002) 스틸

영화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와 징크스가 함께하는 공간도 남한 어딘가 절로 설정된 것 같긴 한데, 아무리 봐도 정체 불명이다. 스코틀랜드 해안 지역에 세트를 짓고 촬영을 했다고 하는데, 절의 실내외 모습이 아시아 어딘가의 절인 듯은 하나 한국 절은 결코 아니다.

이 모든 ‘알아봐야 불편하고, 무시당한 것 같아 불쾌한 감정’은 영화 곳곳에 우리와 직접 연관된 공간과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의 배경은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왔다. 그러다 보니 고증이나 현실성 문제는 늘 발생했고, 대부분 체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2002년 영화의 주요 악한 인물이 북한인으로 설정되고, 상당 부분이 남북한 어딘가로 설정되면서, 한국 관객들이 ‘이상한데?’를 연발하게 된 것이다.

당시 허구의 영화에 대한 지나친 요구와 비판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분명 이전 할리우드 영화들과 다른 면도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북한인으로 설정된 인물들이 자신들끼리는 한국어로 소통하고, 이를 자막으로 처리하는 것은 1990년대 이후 발견되는 변화였다.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는 배경을 담아내는 할리우드 영화가 사실성과 상관없이 영어 대사를 고수해온 것은 오랜 관습이다. 현지인 중 영어로 통역하는 이가 등장하거나, 현지인이 현지어를 하는 경우 자막 처리를 하지 않고, 배경 사운드 정도로 처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에 비하면 <007 어나더데이>에서 북한군 배역에 한국계 배우를 캐스팅하고, 어눌하지만 한국어 대사와 영어 자막을 활용한 것은 분명 변화였다. 그러나 어눌한 대사가 추가 논란이 될 것을 우려해, 국내 영화관 개봉 판에서는 전문 성우가 한국어 더빙을 했다. 영화 초반 영화관에서 관객들의 웃음이 터졌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한국 관객의 경우 더빙보다는 자막을 선호하기에 애니메이션 영화가 아니고서는 영화관에서 성우의 목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은데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더 기억나는 점은 주요 인물들의 대사는 표준어였고, 배경에서 들려오는 대사는 한국 관객들이 익숙한 (정체불명의) 북한 사투리였다는 점이다. 사실성을 향해 나아간 노력이긴 했지만, 한국 관객 입장에서 성우의 목소리 때문이든, 사투리 때문이든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후 국내에 출시된 DVD는 원래 버전이 담겨 윌 윤 리와 릭 윤 등 배우들의 한국어 대사를 들을 수 있다.)

 

'007 어나더데이' 스틸 - 왼쪽부터 윌 윤 리, 릭 윤, 피어슨 브로스넌
'007 어나더데이'(2002) 스틸 - 왼쪽부터 윌 윤 리, 릭 윤, 피어슨 브로스넌

영화의 완성도가 높았다면,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런저런 불편함을 잊게 했을지 모르지만, 스토리 설정부터 워낙 SF적이라 도움이 안 됐다. 당시 북한이 저런 최첨단 무기를 가진 나라로 그려졌다는 게 흥미롭다는 반응도 있었다.

기존 007시리즈에서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람들이나 아랍권 사람들이 악역으로 등장했을 땐, 몰라서 지나쳤을지 모를 이상함과 불편함이, 이 정도도 확인하지 않고 만드나 하는 불쾌감으로, 더 나아가 보이콧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2002년이면 남북한 관계도 좋았던 때이기도 했다.

애초에 완벽하게 사실적인 영화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동안 몰라서 지나쳤지, 알았다면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 매우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입장 바꿔 생각하기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수많은 외국이나 외국인에 대해 누군가는 불편할 수 있다. 영화를 만들며 다른 문화권을 표현할 때에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

마냥 착하고, 선하게 표현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다양한 모습이 표현되길 기대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 강력하게 항의할 필요도 있고, 반복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보이콧은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나 영화를 보는 이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알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007 어나더데이> 이후 할리우드 영화나 드라마 속 한국의 모습이 좀 더 일상적이 되고, 다양해진 건 분명하다. 그 이야기도 <뮬란> 이야기와 함께 다음 기회를 기약해본다.

 

'뮬란'(2020) 포스터
'뮬란'(2020) 포스터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네이버 영화

 

글·송영애

영화평론가. 서일대학교 영화방송공연예술학과 교수.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관련 연구를 지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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