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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현대인의 속박과 자유 -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2014)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현대인의 속박과 자유 -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2014)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19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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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일본인 모리는 사랑하는 한국여자 권에게 편지를 남겼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다. 하지만 모리는 그녀를 결코 만나지 못한다. 그녀에 집에 갔지만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카페 여주인 영선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게 기본 줄거리이다. 그는 권을 만나려 하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는 일차 서술이다. 이차 서술이라면 대신 모리는 영선을 사랑한다. 혹은 영선을 만난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것을 하나의 서술로 다시 정리하면, 모리는 권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오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대신 영선을 만나 사귄다, 정도가 된다.

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이 영화는 전통적인 영화가 권하는 강렬한 드라마, 과장되고 현실에서 이탈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와 같은 사건에서 벗어나 도저히 문제거리라고 생각되지 않는 잔잔한 일상의 파문과 같은 사건을 그리고 있다. 원하는 여자를 못 만나고 대신 다른 여자와 엮이게 되었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을 다룬다. 이런 일은 누구나 겪는 일이어서 보통 사람들은 영화적 재미의 대상으로 무대위에 올리는 일이 없다. 하지만 홍상수의 식탁은 항상 이런 식의 에피소드를 갖고 인생을 말한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홍상수는 항상 그래왔고 이번에도 다시 반복이다.

 

분열적인 서사운반방식

영화속 주인공은 모리지만 영화의 서사를 운반하는 대리인물이 존재한다. 그것은 권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운반하는 것은 권이 읽는 편지의 내용이고 그 순서다. 그렇게 보자면 스토리를 운반하는 화자는 권이다. 하지만 영화서사를 운반하는 표면적인 화자는 모리다. 모리는 주관적인 내레이션을 통해 서사를 운반해나간다. 중간에 등장하는 권은 객관적인 화법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홍상수 다른 영화들도 의식의 분열을 다룬다. <오 수정>에서는 두 가지의 가정을 영화로 보여준다. <극장전>도 마찬가지. <북촌방향>도 의식의 혼란이 있다. 장자의 호접몽’, [삼국유사]조신의 꿈과 김만중의 [구운몽],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찿아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다른 일에 연루된 현대인

이 영화에서 모리가 영선과 한국에 남아있는 에피소드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라깡이 에드가 알란 포우의 소설 [잃어버린 편지]를 소재로 쓴 욕망의 이론이 바로 이 대목을 상세히 설명해 준다. 포우의 소설 [잃어버린 편지]는 왕의 잃어버린 편지를 수색하던 형사가 결국 그 편지는 왕의 거실에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 일화다. 욕망의 목적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라깡은 그 편지가 바로 인간의 욕망이고 그 욕망은 발신되었지만 자신의 주체 안에 숨겨져 있었다는 걸 상징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자유의 언덕>의 모리의 심리적 욕망도 그와 비슷한 결과를 낳지 않는가? 영화에서 모리의 주체는 분열되어 있다. 현실은 모리에 의해 분열되어 있다. 관객은 구성적으로 봐야 한다. 이 영화속의 모리의 존재는 매달린 존재다. 유예되어 있다. 그것은 실존주의의 테마다. 시간의 제한속에 유폐된 인간의 불안. 지향성을 갖지만 달성되지 못하는 인간.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분명히 불안을 상징한다. 인간의 실존적 상황, 존재의 불안의식이다현대인의 불안이다. 모리가 대변하는 한국에서의 경험은 불안정한 것이고 자신의 정체성이 혼돈스럽고 불안하다. 모리가 기대선 언덕은 자유가 아니었다

자유의 반대는 부자유, 현실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원인은 바로 시간의 속박이다. 이 영화는 시간의 속박으로 인해 부자유로운 인간을 다룬다. 시간은 목적 지향적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은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목적이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목적을 향해 그저 정지되고 정체되어 있을 뿐이다. 모리는 권을 만나야 하는데 만나지 못함으로, 그 목적과 방향 때문에 계속 그 길에서 멈춰서 있다. 그 사이 그의 시간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고 부패되어 간다. 그는 부도덕해지고 확신도 엷어진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인가

영화에서 현실이 꿈이라면 그 꿈은 프로이트에 의하면 비연속적이다. 꿈 서사의 대표적 기법은 응축과 치환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모리가 잠에서 깨어나고 그 옆에 영순이 자고 있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 전에 권과 일본에 가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잘 산다는 현실이 꿈이었음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관객은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이런 구성덕분에 결론적으로 영화 전체를 의심할 수 도 있는 위치에 직면한다. 꿈에서 깨기 바로 직전만 꿈이고 나머지는 현실이기를 바라지만 전체가 꿈과 현실이 뒤범벅된 이야기라고 관객이 오판한다 해도 그걸 감독이 반박할 수 없다. 홍상수는 한국의 현실을 왜 꿈으로 봤을까.

이 모든 해독은 관객의 몫이고, 감독은 해석의 모든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해석만을 제시할 뿐, 나머지 해석은 관객 스스로 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권과의 결혼만이 꿈이라는 해석은 감독의 해석이지만, 모든 관객이 그걸 따를 이유는 없는 것이고, 그 앞에도 어느 부분은 꿈이고 그것이 애매모호하게 현실과 얽혀있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만일 감독의 해석이 아니라 관객의 자의적인 해석으로 이 영화를 읽는다면 그 목적은 영화가 꿈과 현실의 뒤엉킴 이야기로 해석되어야 한다. 영화는 시간의 뒤섞임을 말하고, 그 시간은 주체를 형성한다. 영화속 모리의 주체는 혼란스러운 주체고 분열되어 있다. 그의 욕망은 의식속에서 권을 지향하지만, 무의식속에서 그 욕망은 영선이나 다른 여자에게 가 있다. 이것은 극중 인물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일반적인 의식을 다룬 것이다.

감독은 인간의 의식이 그리 명증하지 않고 오히려 배반적이라고 강변하는듯 하다. 이 영화속 사랑의 염원처럼 강렬한 듯 드러나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의지는 약해지고 혼란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므로 인간의 장애요 실존의 조건이다.

자유의 언덕은 불교용어인 피안(彼岸)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저 언덕이다. 그건 해탈이고 인간이 시간의 속박속에서 결국 죽게 되는 것과 정 반대의 의미로 시간을 벗어남을 의미한다. 곧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일 것이고 해석의 주체는 익명의 관객 자신일 것이다.

 

 

글·정재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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