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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의 문화톡톡] 운명적 사랑에 대한 주술적 환상
[이정옥의 문화톡톡] 운명적 사랑에 대한 주술적 환상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20.10.2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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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문화 톡톡 | 이정옥(문화평론가)

로맨스, 소설과 판타지 사이

인간의 역사는 위기의 연속이다. 인간은 전쟁과 같은 폭력을 비롯해 크고 작은 자연재해나 전염병 등의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돼왔다. ‘계산할 수 없는 위험’이 상존했던 전근대사회에서 ‘계산 가능한 위험’이 산재하는 현대사회로 전환됐을 뿐, 인간의 삶은 여전히 위험의 연속선상에 있다.

인간과 위험의 숙명적인 동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러니 평소 합리적인 사고를 신봉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재난이나 위험에 직면하면 간절한 기도와 주술적 기원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운을 빌며 신의 가호와 우주의 섭리에 호소하는 이중심리를 갖게 마련이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과학적 사고와 신화적 사고가 공존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이중심리는 로맨스의 이중성과 유사하다. 로맨스는 운명적 사랑에 대한 환상과 현실적 욕망 추구를 두 개의 바퀴 삼아 달리는 수레와 같다. 전자가 염원하고 동경하는 ‘있어야 할 세계’를 지향한다면, 후자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지금-여기의 세계’와 관련이 있다. 12세기에 발생한 로맨스가 오늘날까지 굳건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있어야 할 세계’와 ‘지금-여기의 세계’를 바퀴 삼아 인간 역사의 변화에 발맞춰 거듭 변주해온 강인한 생명력에 있다.

로맨스의 변화과정은 크게 18세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2세기에 발생한 로맨스는 16,7세기에 비로소 문학의 장르로 구성됐다. 이때 로맨스는 신화와 전설, 주술과 마법 등의 신화적 상상력과 운명적 사랑을 접목하여 ‘있어야 할 세계’를 그린 판타지에 근접했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발달한 18세기 이후, 로맨스는 현실 반영적인 소설의 영향을 받아 연애와 결혼을 낭만적 사랑과 접목시킨 소설로 전환됐다. 이후 자유연애와 낭만적 사랑을 결합한 19세기의 빅토리아 로맨스는 오늘날 로맨스 서사의 전범(典範)으로 정착됐다.

신화적 사고에서 출발한 로맨스의 태생적 속성은 과학적 사고가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 로맨스가 ‘지금-여기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현실 남녀의 우여곡절 많은 연애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더라도, 결혼의 약속으로 끝을 맺는 해피엔딩은 ‘있어야 할 동경의 세계’로 진입 가능하다는 기대와 희망을 안겨준다. 이런 점에서 로맨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냉철하게 그리는 사실주의 소설과 달리, 우리가 원하면 언제나 ‘있어야 할 세계’가 열릴 수 있다는 보상과 위안을 보장한다.

때문에 로맨스는 소설과 판타지 사이에 위치한 중간문학이자, 위안의 문학으로 평가돼왔다. 평생 오직 한 사람과의 운명적인 사랑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현대사회에서도 세상 어딘가에 운명과 같은 사람이 존재할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아니 집착은, 운명적 사랑에 대한 주술적 환상이 강한 로맨스의 태생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난의 시대에 운명적 사랑이 소환되는 이유

아이러니하게도 운명적 사랑에 대한 주술적 환상은 불가항력적인 재난이나 불확실성의 위기가 불어 닥친 환난의 시대에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수천 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위기에 맞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자신의 안전을 해치는 위험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낙관적 믿음을 내면화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낙관적 믿음은 오랫동안 위기에 대처해 온 인간 본능의 원형심리에 해당한다. 평소에는 인과관계의 법칙에 의거하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지만, 환난의 시대에는 현재의 재난이나 위기상황을 과거의 유사 위험과 연결시켜 새로운 사건이 주는 공포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안정감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또한 위험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안정감을 확보하려는 보호심리도 커지게 되어, 위험의 발생 원인을 집단 외부의 타자 탓으로 돌리며 모든 악의 근원인 것처럼 비난을 일삼는 방어심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신화학자들은 이미 이런 낙관적 믿음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설명해왔다. 신화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인식이 담겨진 신성한 이야기로, 삶의 경험담(조셉 캠벨), 집단 무의식(융), 무의식적 경험의 표상(레비-스토로스) 등과 같이 다양하게 정의돼왔다. 그럼에도 신화는 인간의 삶에 관한 오래된 기록이자, 인간의 공통적인 삶의 원리가 반영된 이념적 산물이라는 점을 공유하고 있다.

로맨스는 신화적 상상력을 토대로 유사 구세주나 위대한 영웅 등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제공하는 위안의 문학으로 출발했다. 신화학자 지암바티스타 비코의 역사 주기를 살펴보면, 로맨스의 태생적 속성을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비코는 역사를 크게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로 구분했다. 신의 시대는 자연의 파괴력을 신의 분노로 여겼던 시기로, 이 때 신적인 신화가 탄생했다. 영웅의 시대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며 제도가 마련된 시기다. 이런 제도는 인격화된 신들로 표현됐고, 영웅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로 전환됐다. 반면, 인간의 시대는 이성이 본능적 상상력을 대치하며 철학이 탄생한 계몽주의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아서왕 로맨스는 영웅의 시대에 탄생한 로맨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누렸던 대표작이다. 고대 성직자들의 역사 기록물과 당시에 구전됐던 신화와 민담, 전설 등을 결합하여, 인간들이 모두 염원하고 동경하는 ‘있어야 할 세계’를 이야기로 꾸민 문학(fiction)이다. 다시 말해, 백성을 평화와 번영 속에서 살게 해준 위대한 통치력과 모든 기사들을 단결시킨 뛰어난 영도력, 평생 한 여인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운명적 사랑을 결합한 위대한 영웅서사였던 것이다.

이후 인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로맨스에서 전설적인 영웅서사는 대폭 축소되고 운명적인 사랑에 헌신하는 사랑의 서사로 전환됐다. 그럼에도 로맨스의 발생론적 속성인 ‘있어야 할 세계’에 대한 동경과 염원은 여전히 존속되고 있다.

과학과 이성의 발달로 ‘계산하기 어려운 위험’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현대사회는 ‘계산 가능하지만 그러나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위험사회다.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재난과 위기가 밀려오는 불확실성의 환난 국면으로 접어들면, 위대한 영웅의 강력한 힘이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며 위태로운 세상에서 운명적 사랑으로 감싸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보상해주는 로맨스가 소환된다.

신화적 상상력과 운명적 사랑을 결합한 로맨스는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은 심리적 보상을 제공하는 위안의 문학인 것이다.


운명적 사랑에 대한 주술적 환상

인간의 역사가 위기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여기를 가장 위태로운 시대로 체감한다. 하지만 지구멸망의 공포가 휩쓸었던 20세기 말이야말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극한적인 절망의 시대였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1999년 7월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전 세계인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세계적인 점성가들은 저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지금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졌다’며 지구멸망이 실현될 것처럼 불안을 가중시켰다. 여기에 사이비 종교인들까지 가세하여 ‘999년의 세기말적 공포가 1999년에 다시 한 번 불어 닥칠 것’이라며 지구종말론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러나 1999년 7월이 지나 지구멸망의 예언이 어긋나자, 2000년 1월 1일 0시를 기점으로 ‘인터넷 상의 모든 정보가 사라진다’는 밀레니엄버그설이 또 다른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한국 사회는 전 세계적인 지구종말론과 더불어 1997년 ‘단군 이래 최대 위기’라는 국가 부도를 맞이하여 전 국민이 패닉상태에 빠졌던 시대였다. 성수대교(1994)와 삼풍백화점(1995)의 붕괴사건으로 수많은 국민이 참사를 당했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 다시 IMF 외환위기까지 겹쳤던 것이다. 그러니 당시 한국 사회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이란 글자 그대로, 몸도 마음도 모두 소진된 환난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990년대 중반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 ‘사고 현장을 떠도는 귀신을 보았다’는 증언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부박한 현실에 대한 지독한 환멸과 짙은 허무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비명횡사로 보내야 했던 자들이나 아무런 잘못 없이 하루아침에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망자들 모두가 깊은 슬픔에 젖어 유령처럼 떠돌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전생이나 환생을 다룬 영화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은행나무 침대>는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사랑을 통해 살아남은 자의 처절한 슬픔과 죽은 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진혼곡과 같은 영화다. 스토리나 영화 미학적인 완성도가 빈약함에도 당시 엄청난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원천은, 천년이 흘러도 잊지 않고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는 염원이 담긴 ‘있어야 할 세계’를 꿈꾸는 신화적 상상력에 있다.

 

<은행나무 침대>(1996)

 

<은행나무 침대>에서 현생은 갑작스럽게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는 혼란스러운 세계다. 판화작가이자 대학 강사인 수현은 어느 날 불쑥 괴한에게 살해위협을 당하고, 수현의 연인이자 의사인 선영은 치료하던 환자가 원인불명으로 갑작스럽게 죽는 미스테리한 사건에 휘말린다. 모두 천 년 전 수현을 사랑한 미단과 미단을 사랑했으나 거절당한 황장군의 복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러브스토리는 로맨스의 전형적인 삼각관계로 펼쳐진다. 천 년 전 미단공주는 궁중악사 종문을 사랑하고, 미단공주를 사랑한 이웃나라 황장군은 그녀를 납치하여 청혼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 미단과 종문이 도피를 하자 황장군이 뒤를 쫓아 종문을 죽이고, 미단이 종문을 따라 자결하니 황장군도 미단을 따라 죽었다는 것이다. 종문과 미단은 서로 마주보는 은행나무로 환생하여 천년동안 사랑을 이어갔으나, 구천을 떠돌던 황장군이 매로 환생하여 수나무(종문)를 고사시켜 버렸다. 은행나무에 얽힌 안타까운 전설을 전해들은 목공이 죽은 은행나무로 종문과 미단의 형상이 담긴 침대로 만들었다는 스토리다.

은행나무 침대는 전생과 현생을 잇는 매개체다. 은행나무 침대를 사들인 수현(종문)을 찾아낸 황장군이 복수를 감행하자, 혼령의 몸인 미단이 선영의 환자와 선영의 몸을 빌려 사랑을 지켜낸 것이다. 환생과 전설에 의거하여 천 년 동안 사랑과 복수를 이어가는 신화적 상상력과 이성적인 사고에 입각해 인체의 질병을 관리하는 의사인 선영의 과학적 상상력을 결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동경하고 염원하는 ‘있어야 할 세계’가 완성된다. 천 년 동안 이어온 불멸의 운명적인 사랑은 마침내 완결되어 아름다운 이별을 고한다. 그러나 운명적인 사랑을 방해한 악의 화신 황장군은 죽음으로 마감한다. 선량한 사람들의 사랑과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사악한 자는 천년의 시간이 흘러서도 결국 벌을 받을 것이라는 인과응보적인 보상심리가 투영되어 있다.

 

<시월애>(2000)

 

이에 비해, <시월애>는 제목 그대로 엇갈리는 시공간을 살아가는 두 남녀의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몽환적으로 그린 영화다. 20세기 말의 성현과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은주는 우체통을 매개로 편지를 교환하며, 서로 존재의 이유를 위로하며 아련한 사랑을 잔잔하게 교류한다.

황량한 바닷가에 지어진 ‘일마레(바다라는 뜻)’라는 성현의 집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답지만 금방이라도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갈 것처럼 위태롭다. 7살 때 떠난 건축가 아버지가 성현에게 선물한 집이지만,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아버지로서의 애틋한 사랑조차 세기말적 우울을 닮은 듯 한없이 허약하다.

황량하고 위태로운 집에서 쓸쓸하게 살아가는 성현의 일상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적 예언에 짓눌린 듯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다. 성현은 보고 싶은 사람이 늘 멀리 있지만 찾아 나서지 않고, 특별히 증오하는 사람도 없으면서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거부하며 고독하게 종말을 향해 걸어가는 세기말적 인류다.

이런 성현에게 유일한 온기는 21세기의 은주로부터 온 편지 뿐이다. 우체통을 매개로 오가는 편지는 배신한 전 남친의 편지를 전해달라는 은주의 부탁에서 시작됐지만, 점차 사랑의 쓸쓸함과 21세기에도 인류의 삶이 지속된다는 희망에 관한 잔잔한 속내를 주고받으며 성현은 조심스럽게 은주를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간다. 그러나 지독한 염세주의자 성현은 두 사람에 가로 놓인 시공간의 장벽을 의식하며 은주에 대한 사랑을 단념하고, 마지막으로 은주의 부탁을 들어주려 집을 나섰지만 은주가 보는 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어간다.

종말론이 온 세상을 뒤덮어 가까운 미래조차 예견할 수 없었던 세기말적 인류가 염원하는 것은 오직, ‘삶이 지속된다’는 희망과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몽환적으로 그린 영화답게, 영화의 엔딩은 은주의 편지를 읽은 성현이 교통사고를 모면하고 사랑의 완성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를 해피엔딩으로 보기에는 영화 전편 가득 세기말적 멜랑콜리가 압도한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2016)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앞의 두 영화와 달리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자의 고통과 죄책감을 사랑의 힘으로 회복하려는 로맨스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이후,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자책감과 무력감에 분노하면서도, 무책임과 회피로 일관하는 도덕 불감증에 대한 수치심의 정동에 휩싸였던 환멸의 시대적 트라우마를 환유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중년의 수현은 30년 전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봤던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다 시한부의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30년 전 죽은 연인을 다시 한 번 만나는 것. 캄보디아에 의료봉사를 하러 갔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신령스러운 노인으로부터 받은 10알의 신비한 묘약을 매개삼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어긋난 사랑을 바로 잡기에 돌입한다. 의사로서의 과학적 상상력과 신비한 묘약의 주술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못다 이룬 사랑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타임슬립은 살아오는 동안 가장 후회되는 잘못이나 억울하게 당한 사고를 바로 잡아 현재의 안녕을 도모하는 서사적 상상력이다. 2015년의 현재를 살아가는 중년의 수현은 묘약을 이용해 30년 전 1985년의 수현을 만나 사랑하는 연아의 죽음을 예방하고, 연아가 낳은 아이 수아를 지키는 방안 마련에 고군분투한다.

이 영화의 압권은 현재의 수현과 과거의 수현 사이의 첨예한 대립에 있다. 중년의 수현이 사고로 물에 빠져 죽었던 연아를 되살리려 하는 진의에는 30년 동안 애지중지 키워왔던 수아가 자신이 죽은 이후 혼자 남게 될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속 깊은 애정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던 젊은 수현은 이런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채, 연아와의 결혼도 아이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는다. 옥신각신 고군부투의 과정을 거쳐 결국 연아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고 수아도 살리는 기적을 이루지만, 과거의 수현은 연아와 이별을 고하며 고통스러워할 뿐이다. 중년의 수현과 젊은 수현은 동일체임에도 나이와 연륜에 따라 인생관이 달라지는 지점이 부각된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서 두 수현과 연아와의 어긋난 사랑은 그들만의 추억이 담긴 공원에서 안타깝게 포옹하며 비로소 못다 이룬 사랑을 완결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어긋난 사랑을 바로 잡는 과정은 주술적 환상에 의존한 운명적 사랑의 완성과정인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지 못한 자책감과 고통을 씻어내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의연한 의식(儀式)이다. 동시에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사람을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몸과 마음이 소진된 채 유령처럼 살아가는 환멸의 시대를 견뎌내는 자의 삶에 대한 성찰이자, 산 자와 죽은 자의 평안을 기원하는 씻김굿과 같은 제의에 해당한다. 수현이 죽은 이후 연아와 수아 등 살아남은 자들이 “모두가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 애쓴 고마운 사람”이라 추모하는 이유다.

<쓸쓸하고 찬란한 신, 도깨비> (tvN, 2016.12.2.~2017.1.21.)

 

<쓸쓸하고 찬란한 신, 도깨비>는 당대의 사회적 체험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용해한 드라마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앞서 본 영화들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무력하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자책에 침잠해 있던 이분법적인 생사관을 반영했다. 반면 이 드라마는,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즉자적인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인간의 의지로 죽음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선택할 수 있다는 발상적 전환을 신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냈다.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의 시공을 뛰어넘는 불멸의 사랑에 대한 주술적 환상은 삶과 죽음이 결코 별개로 분화된 이질적인 세계가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의 세계라는 영원불멸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실에 있는 ‘지금-여기의 세계’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있어야 할 세계’를 지향한 낭만주의적 세계관과 상통한다. 낭만주의적 세계관은 예술과 문학을 통해 현실적인 합리성에 억압당한 자유로운 인간의 상상력을 중시한다.

그간 신화와 설화, 전설과 민담 등에서 도깨비와 저승사자, 이들을 관장하는 초월적인 신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거대한 위력을 지닌 존재로 군림해왔다. 때문에 무기력한 인간은 위기와 재난에 직면할 때마다 초월적 힘을 지닌 위대한 존재를 향해 가호를 빌며 자신의 안전을 기복하고 안녕을 기원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드라마에서 이들은 모두 은탁의 의지와 선택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우주의 중심에 은탁이라는 인간이 있고 도깨비와 저승사자, 삼신할미, 김신과 함께 환생한 모든 인물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우주의 중심에 서 있는 은탁은 신이 부여한 도깨비 신부로 살기 위해 환생을 거듭하며 불멸의 도깨비와 영원불멸의 사랑을 이어간다. 이런 점에서 은탁은 사랑과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우주의 중심에 서고 싶어 했던 낭만주의 시대의 영웅과 흡사하다.

고려시대의 장군이었으나 왕의 배신으로 참수를 당해 도깨비가 된 김신과 도깨비 신부로 태어난 은탁의 영원불멸의 사랑은 숱한 시련을 딛고 넘어서는 험난한 여정의 끝에 비로소 완결된다. 1차 시련은, 가슴에 꽂힌 검을 뽑으면 자신이 사멸하고 뽑지 않으면 은탁이 죽어야 하는 진퇴양난의 선택이다. 도깨비는 삼신할미의 도움으로 간신을 이용해 검을 빼는 데 성공하지만, 이미 은탁을 사랑하게 된 도깨비는 죽음을 희구했던 과거의 소망을 버리고 모든 기억이 지워진 채 무(無)로 살아가는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다. 죽음 대신 무, 즉 망각을 선택한 도깨비가 다시 이생에 현현(顯現)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은탁의 간절한 기도와 기억뿐이다.

두 번째 시련은, 은탁의 간절한 기도에 바람과 첫눈으로 응답한 도깨비가 은탁과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신혼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찾아온다. 은탁이 유치원 아이들의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달콤한 신혼생활은 너무나 짧고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 은탁은 다시 환생하여 도깨비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이생의 기억을 지우는 망각의 차를 거절하며, 되도록 빨리 돌아와 도깨비와 재회할 것을 약속하며 구슬프게 죽어간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인간으로 환생한 은탁이 불멸의 도깨비를 다시 찾아와 영원한 사랑을 이어간다는 스토리다.

도깨비와 은탁 뿐만 아니라, 김신을 죽인 왕이었으나 사후에 기억을 잃어버려 저승사자가 된 왕여와 김신의 누이이자 왕비였던 김선(써니) 역시 환생을 거듭하며 영원한 사랑을 이어간다. 이처럼 도깨비와 저승사자, 삼신할미, 환생한 인간과 현생의 인간이 모여 사는 이 환상의 세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스스로 삶을 선택하는 자유의지와 영원불멸의 운명적 사랑에 대한 가치와 성찰이다.

그러나 눈을 돌리면 고달픈 헬조선의 병리적인 현실 세계가 펼쳐진다. 지금-여기의  현실에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불안과 공포에 영혼이 잠식된 채 힘겹게 살아가면서, 고통스럽게 하루하루 버텨야 하는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나는 누구인지, 제대로 살고나 있는 것인지 등등 끝을 알 수 없는 회의와 무력감에 침잠하게 된다. 홀로 외롭게 존재하는 각박한 현실에서 연애도 사랑도 무의미해지고, 삶의 의미조차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만큼이나 무상하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삶의 가치와 미래를 선택하는 자유의지와 운명적 사랑에 대한 주술적 환상의 세계는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휴식을 제공한다. 적어도 드라마에 심취해 있는 동안만이라도. 아울러 평소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 그토록 염원하는 ‘있어야 할 세계’로 시야를 조금만 돌리면, 부박한 현실에 가려진 삶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해준다. 그리하여 어딘가에 운명적 사랑이 존재할 것이며, 인생도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희망을 갖게 만든다. 바로 이런 점에서 로맨스는 위로와 보상의 문학이다. 동시에 이 드라마가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확보했던 이유다.


※ 사진 출처 : 구글, 네이버

 

참고문헌

· 정재서·전수용·송기정, 신화적 상상력과 문화,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8.

· 헬렌 조페, 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 박종연·박해광 옮김, 한울아카데미, 2002.

· Sullivan, Karen, The Danger of Romance: Truth, Fantasy and Arthurian Fiction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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