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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그들은 왜 세상 끝에다 자신을 비끄러매었나?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그들은 왜 세상 끝에다 자신을 비끄러매었나?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0.11.09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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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평) '봉쇄수도원 카르투시오(The Carthusian Cloistered Monastery)'

 

봉쇄(封鎖). 무서운 말이다. 영어로는 ‘blockade’, ‘embargo’ 같은 단어를 쓰는데, 항구나 해상의 봉쇄를 의미하는 국제정치의 용어이다. 이라크나 북한에 대한 조처를 상상하게 된다. 일간신문의 국제부 기자를 지낸 시절과 관련하여서는 봉쇄와 이라크가 한 단어처럼 느껴진다.

사전 지식 없이 봉쇄라는 말을 요즘 들었다면 우선 코로나19, 이어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와 소설의 무대 알제리의 오랑을 연상하였지 싶다. 봉쇄는 금지와 억압, 고통을 상징한다. 한국어 봉쇄의 ()’가 자물쇠나 쇠사슬을 뜻하니, 과도한 반응은 아니다. 미국의 북한 봉쇄로, 굶주려 아사 직전에 이른 북한 어린이들의 사진을 떠올려 보라.

202011월에 개봉한 김동일 감독의 종교 다큐멘터리 <봉쇄수도원 카르투시오(The Carthusian Cloistered Monastery)>에도 봉쇄라는 한국말이 들어 있지만, 다른 영어단어(Cloistered)를 쓴다. 클로이스터(cloister)는 건축이나 미술의 용어로 수도원의 안뜰을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지붕이 있는 회랑에 둘러싸인 공간이다. 수도원을 구성하는 영역으로, 그 자체로 외부와 차단된 수녀ㆍ수사만의 정진(精進)공간이란 의미를 갖기도 한다.

 

어떤 공간

 

여기서 우리는 봉쇄라는 한국어에 대응하는 두 개의 큰 범주를 볼 수 있다. ‘blockade’‘embargo’는 동적인 성격이 강하며 외부에서 가해지는 차단이다. ‘cloister’는 정적인 성격이 상대적으로 더 강하며 내부에서 외부를 막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목적의 차이가 뚜렷하다. 전자는 외부에서 내부를 죽이려고 든다면 후자는 외부의 위해 요소를 막아내어 내부를 살리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도식적인 것으로 근본적인 차이는 자유와 관련한다. 전자가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봉쇄라면 후자는 자유를 찾기 위한 봉쇄이다. 봉쇄함으로써 더 광활해지고 금지함으로써 더 자유하는 세계는 오직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가 다룬 내용을 자유를 향한 구도자의 멈춤 없는 정진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주 안에서의 참 자유는 기독교를 떠나 진리 안에서의 참 자유” “노동계급 안에서의 참 자유라고 하여도 확실히 상통하지만 주 안에서의 참 자유만이 주는 독특한 자유가 있음을 이 영화가 천명한다. 그것은 은혜와 은총의 경지로, 근본적으로 자유할 수 없는 에게 자유함이란 선물을 허락하는 신비한 체험이다. 한두 평 좁은 방 안에서 갇힌 짐승처럼 맴돌아야 도달하는 각성이다.

어떻게 각성에 이르는지를 카르투시오회헌장 4-1에서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주된 노력과 목표는 독방의 침묵과 고독에 투신하는 것이다

독방은 거룩한 땅이며, 주님과 그분의 종이 함께 이야기하는 곳이다

 

청빈과 고독, 침묵을 특징으로 하는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은 영화 <위대한 침묵>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화가 개봉된 2005년 교황 바오로 2세의 뜻에 따라 대한민국 경북 상주에 아시아 유일의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이 설립됐다. 그 후 15년이 흘렀고, 현재 한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다양한 국적의 카르투시오 수도자 11명이 카르투시오 헌장을 준수하며 세상을 등지고 상주 수도원에서 하느님과 중단없는 대화를 이어간다. 하루 한 번의 식사, 기도와 노동으로 구성된 일과, 평생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 침묵과 고독 곤궁한 삶에 스스로를 봉쇄한 채 죽어서도 수도원에 묻히는 그들의 순결한 삶을 영화 <봉쇄수도원 카르투시오>는 담았다. <위대한 침묵>의 속편 성격을 띠지만 가톨릭교회의 보편성과 한국 수도원의 특수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는 별개의 작품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영화 <봉쇄수도원 카르투시오>TV 방송국에 소속된 다큐멘터리 PD로 오랜 시간 다양한 사람과 삶의 풍경을 기록한 김동일 감독의 작가정신이 반영된 작품이다. 소년교도소와 정신병원의 풍경을 담아내 <세상 끝의 집> 시리즈를 진행한 김 감독이 세번째 세상 끝의 집으로 기록한 곳이 상주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이었다. 섭외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초대 안동 교구장인 두봉 주교의 도움으로 촬영을 허락받았다.

장뽈 수도원장은 김 감독이 (당시)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서 보다 객관적일 수 있고 수도자를 특별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삶의 이웃으로 보고 그 모습을 담겠다는 김 감독의 취지에 동감했다고 전해진다.

김 감독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겠다는 수도원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촬영 내내 조명이나 동시녹음 장비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카메라 감독과 함께 두 명이 수도자가 지내는 것과 같은 방에서 20193월부터 11월까지 8개월을 지냈다. 촬영 때문에 수도자의 고독과 침묵이 훼손되지 않도록 수도원의 규칙을 지켰고 매일 진행되는 아침 미사와 밤 1230분부터 두 시간 이상 걸리는 밤 기도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이러한 열성이 수도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김 감독은 내부자처럼 기록을 진행할 수 있었다.

 

모두로부터 떨어져 있는 우리는 모두와 일치되어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감동적인 영화이다. 이러한 종류의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제격이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더 나은 극화가 불가능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카르투시오회헌장 4-1,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감동을 짐작할 수 있는 논거가 된다.

 

지상은 천상과 결합되고, 신성은 인성에 결합된다.

그 여정은 길고, 약속의 땅에 있는 샘에 도달하는 길은 건조하고 메마르다.

 

그러나 약간 삐딱하게 보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며 한동안 불편한 감정을 살짝 느꼈을 법한데, 그것은 감동적이네. 그래서?”라는 질문으로 요약되지 싶다. 상주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삶이 부럽다는 두봉 주교의 말이 어쩌면 불편함의 근거와 연결된다. 세상의 기준으로 힘든 삶을 살지만, 그들은 그들의 기준으론 부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혼자 신과 대화하며 은총을 받으면 수도자는 행복하겠지만, 과연 혼자만 행복해지는 것을 은총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사이의 차이에서 쉽게 떠올릴 법한 착안이다.

이러한 종류의 불편함은, 최근 평생 헌신을 서원한 봉쇄수도원의 한국인 수사와 그의 누나 수녀 남매의 모습을 보며 어느 정도 가셨다. 누나 수녀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병원에서 근무한다. 남매는 각자 자신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통해 보완될 수 있음을 기뻐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신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웃사랑에 몰입하면 당연히 칭찬받을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사회사업과 다른 점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는 모양이며, 신성을 향한 갈망 없이 당연히 십자가가 성립하지 않는다. 봉쇄수도원에서 그들이 하는 일은 그들만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봉쇄 밖의 신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아마 수직과 수평의 진실과 경외 앞에서 행복해 할 것이다.

 

모두로부터 떨어져 있는 우리는 모두와 일치되어 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 앞에 모두의 이름으로 서 있는 것이다.

(카르투시오회 헌장 34-2)

 

모두의 이름으로 서 있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봉쇄수도원 수도자의 신심의 깊이를 이해하게 된 대목은 다른 한국인 수사가 남을 돕고 싶다며 울먹인 장면이었다. 절대 고독 속에서 신과 대화하는 숙명을 받아들인 행위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일 수 있겠다는 원래의 생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봉쇄 밖에서, 세상 안에서 모두와 일치하는 것보다 모두로부터 떨어져 모두와 일치하는 삶이 훨씬 지난한 길이라는 깨달음. 내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는 싫든 좋든 밤새워, 그것도 매일 밤 신을 붙들고 씨름해야 할 숙명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홀로 행하는 침묵과 고독, 기도가 결국 남을 돕는 행위가 되는 것은 그것이 올바로 신을 경외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족 같지만, 다른 많은 신자가 실제로 남을 돕고 있다는 전제가 작동해야 한다. 종교 전체로서 이웃사랑 없는 고립된 기도는 밀교로 흐를 수밖에 없다. 우문에 현답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카르투시오회 헌장 33-4)

 

에필로그처럼 주어진 외국인 수사 두 사람의 대화는 이 영화를 요약해 준다. 한 수도자가 말하고 다른 수도자가 듣고 있다. 그처럼 우리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고통과 영적 결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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