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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소리도 없이>, 연민도 없이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소리도 없이>, 연민도 없이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0.11.23 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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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의정의 <소리도 없이>에서, 창복(유재명)과 태인(유아인)은 오전에는 트럭에 계란을 싣고 다니며 판매를 하고, 오후에는 조폭들이 잡아다 고문하고 죽인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이제 한국영화의 조폭들은 시체처리까지 하청을 주고 있다). 창복과 태인에게 계란을 파는 것과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창복은 태인이 어릴 때부터 데려다 돌봐줬다고 하는데,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먹고사는 방법은 가르쳐주었으나 교육받을 기회는 부여하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말도 하지 못하는 태인은 일하고 먹고 자는 것만 반복하는, 짐승 같은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차만 타면 정신없이 잠들고, 우리 같은 집에서 생활한다.

 

창복과 태인에게 달걀 파는 일과 시체처리하는 일은 돈벌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창복과 태인에게 달걀 파는 일과 시체처리하는 일은 돈벌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조폭 실장 용석은 창복과 태인에게 자신의 하수인들이 유괴한 초희(문승아)를 데려오는 일을 맡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초희의 부모가 몸값을 지불할 때까지, 태인이 자신의 집에 초희를 데려가 있게 된다. 짐승 같은 청년 태인과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그 문화와 교육을 받은 11살 소녀가 동거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앞부분은 이러한 설정에 이르기 위한 장치로서, 흥미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조폭을 동원한다.

도시 소녀가 시골 소년을 만나는 이야기를 보면, 언제나 도시 소녀가 우월감 속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초희는 태인에게 잡혀있는 신세지만, 태인은 토끼 가면을 쓴 초희와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 뭔가 주눅이 든다. 때문에 초희의 운명을 둘러싼 서스펜스는 별로 조성되지 않는다. 초희가 11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존을 위해 영악하고 영리하게 처신하는 걸 보면, 귀엽기는커녕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었던 토끼 가면에서 「토끼전/별주부전」을 떠올리게 된다.

 

태인은 그로테스크한 토끼 가면을 쓴 초희에게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 주눅이 든다
태인은 그로테스크한 토끼 가면을 쓴 초희에게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 주눅이 든다

서부영화에서는 흔히 동부 출신의 여성이 야만적인 서부에 와서 문화와 교육을 전파하고, 무법자처럼 살아가던 남성을 교화한다. 그 여성처럼, 도시 소녀 초희는 태인의 여동생 문주(이가은)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문화를 전파한다(태인은 문주에게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해왔다. 초희는 문주에게 상에서 식사하는 예절을 가르치고, 쓰레기처럼 방치된 옷더미를 같이 빨고, 함께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태인에게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사용법을 알려준다). 초희의 문화와 교육을 통해 짐승 우리 같던 공간이 점점 사람 사는 공간처럼 변해가듯이, 태인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

이제 그 결과 태인이 변화했는지를 확인하려면, 그를 시험에 들게 해야 한다. 태인이 초희의 운명을 놓고 선택을 하도록 몰고 가려면, 먼저 창복이라는 인물이 사라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초희의 몸값을 받으려던 창복은 계단에서 넘어져 사망한다. 창복이 시체를 묻을 때마다 성경을 손에 들고 “가시는 길 편안히 가시라”며 기도하고 “우리가 다 죄인이지”라고 했기에 그 응보를 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소 설득력이 부족한 설정이다.

태인은 창복이 몸값을 받으러 가기 전에 지시한 대로 초희를 장기밀매업자에게 넘기지만, 결국 구하는 쪽으로 선택을 한다. 시험에 든 그가 짐승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선택을 할 때, 조폭 실장 용석의 검은 수트를 입는다. 태인이 알고 있는 세계 안에서, 용석의 수트 또는 용석이 피는 담배 따위는 인간적인 삶(문화)을 상징하는 것이다.

 

태인의 짐승우리같은 공간은 초희가 기거하게되면서 인간적인 공간으로 변해간다
태인의 짐승우리같은 공간은 초희가 기거하게되면서 인간적인 공간으로 변해간다

초희를 구해낸 태인은 그 수트를 입고 초희의 집이 아니라 학교로 데려다 준다. 짐승같은 태인에게 가장 먼 교육의 공간에 도착하자, 「토끼전」에서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토끼가 자라에게서 도망쳤듯이, 초희는 태인의 손을 매섭게 뿌리치고 선생님에게 달려간다. 토끼가 자신의 기지를 최대한 발휘해 자라를 속이고 목숨을 구했던 것처럼, 초희는 태인이 하는 일에 최대한 협조하며 신뢰를 쌓고 문화를 통해 그에게 인간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건진 것이다. 따라서 초희에게는 태인에 대한 연민 같은 감정이 있을 리 없다. 부모가 3대 독자인 남동생과 차별했기 때문에, 초희는 일찍이 그러한 생존 비법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제 스스로 자신을 구한 초희는 그 과정에서 세상 물정을 더 많이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부모를 발견하고 그럴듯하게 표정 관리를 하는 초희는 몸은 아직 어린아이지만 내면은 어른이 된 것 같다.

반면에 태인은 유괴범이 아니라 오빠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초희의 손을 놓지 못한다. 아마도 그는 초희가 짐승 같은 범죄자가 아니라 인간적인 보호자로서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바랐겠지만, 초희는 망설이지 않고 선생님에게 태인이 유괴범이라고 고발한다. 따라서 태인은 학교/문화‧교육의 공간 밖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다. 미친 듯이 달려가던 그가 문득 수트를 벗어버릴 때, 그곳에 괴어있는 물은 다시 「별주부전」의 자라를 떠올리게 한다. 여전히 말을 하지 못하는 그는 짐승처럼 거친 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집(우리)으로 향한다. 아마도 그는 경찰에 체포되거나, 다시 예전처럼 짐승같이 살아갈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결말은 신파가 전혀 가미되지 않았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초희뿐만 아니라 감독 또한 인간이 되려고 위험을 무릅쓴 가련한 태인에게 어떤 일말의 연민이나 이해가 없는 것 같다. 태인/시골의 하층민이 영화의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감독에게 실질적인 주인공은 초희/도시의 부르주아였기 때문일까(그럼에도 이 영화를 끝까지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유아인의 연기에서 기인한다)? 초희에게는 정확하게 생존투쟁에서 얻게 된 표정을 부여했는데, 태인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영화는 헐떡이는 태인의 클로즈업에서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따라서 다음의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석양이 물든 하늘 아래, 창복, 태인, 초희, 문주가 태인의 집 마당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름다운 장면이 등장하고 네 사람이 마치 가족처럼 보이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이어진다. 시종일관 냉혹한 사건이 펼쳐지던 영화를 따뜻한 느낌으로 끝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맥락상 맞지도 않고 불필요한, 아쉬운 엔딩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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