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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임신 중단권과 행복추구권이 만나기 위해 – 연극 <마른 대지>
[양근애의 문화톡톡] 임신 중단권과 행복추구권이 만나기 위해 – 연극 <마른 대지>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0.12.14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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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1일 형법 ‘낙태의 죄’ 제 269조 1항이 헌법불합치로 결정되었다. “낙태죄는 위헌이다!”라고 쓴 플랭카드 앞에서 시민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난 올해 10월 입법예고된 정부안에는 임신주수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 퇴행적 사고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시작에 불과했고 소모적인 논쟁이 지난하게 이어지고 있다. 아직도 많은 기사들이 ‘임신중단’이라는 말 대신, ‘낙태’와 ‘죄’라는, 여성의 죄책감을 겨냥한 말을 고수하면서 쟁점을 호도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임신중단은 여성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몸을 걸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여성의 몸을 관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 말고 여성들이 흔하게 직면할 수 있는 임신중단의 문제를 좀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지난 여름, 청소년의 임신중단 문제를 다룬 연극 <마른 대지>가 재공연 되었다. 2014년 뉴욕에서 초연될 당시 ‘뉴욕 타임즈’는 “재미있으면서도 참혹하다”라며 극찬했다. 원작을 쓴 미국의 극작가 루비 래 슈피겔(Ruby Rae Spiegel)은 ELLE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몸은 온갖 어렵고 이상하며 때로는 폭력적인 일들을 겪는데, 그것은 실제로 보이지 않는다”며 무대 위에 신체적 문제를 드러내는 극을 올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극에는 8학년 때 수영팀에 있었던 경험과 친한 친구들과의 관계, 대학 1학년 때 느낀 임신 공포 등 작가가 여성으로서 겪은 일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윤혜숙 연출은 원작의 의도와 의지를 한국의 무대 위에 새롭게 그려냈다. 불편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기억할 만한 충격이었다. 이 충격을 기억해야만, 에이미와 같이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고 그것을 중단한 사람이 어떻게 회복하고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을지 함께 논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른 대지" 사진제공: 래빗홀씨어터, ⓒ이지수
"마른 대지" 사진제공: 래빗홀씨어터, ⓒ이지수

 

몸의 시간, 마음의 공간

“다시 쳐.” 연극의 첫 대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첫 장면부터 심상치가 않아 보였다. 에스터에게 자신의 배를 세게 칠 것을 주문하는 에이미는 예상대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상태였다. 무대는 수영장 안쪽의 락커룸이다. 무대 왼쪽에는 수영장이 있다.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투명하지만 그 너머에 수영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살을 가르는 소리, 큰 진동처럼 들리는 소리울림의 잔향, 왠지 소독약 냄새가 날 것만 같다. 깨진 타일과 물때가 지저분하게 들러붙은 락커룸에서 에이미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단시키고 싶다. 어른들에게 알릴 수 없기 때문에 배를 세게 치거나 세제를 먹거나 인터넷에서 불법 약물을 사야 한다. 에스터는 에이미를 돕는다. ‘그거’라고 부르는 건 싫지만 그것을 없애는 일이 에이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수영부인 에이미와 에스터에게 락커룸은 어떤 공간일까. 물속에 몸을 던지기 위해 수영복을 갈아입는 기능적인 공간, 수영장과 바깥 현실 사이 혹은 경계, 그저 지나갈 뿐 오래 머물지 않는 곳. 락커룸은 은밀하게 숨겨진 곳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천하에 공개되지도 않는 공간이다. 연극 무대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락커룸을 보기 전까지, 목욕탕이나 찜질방이나 수영장에서 사용했던 락커룸의 장소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극을 위해 조성된 인위적인 무대지만 그 공간 위에 있는 여성의 ‘있는 그대로의 몸’을 보는 일이 생경해진 까닭이다.

락커룸을 쓰는 사람들은 으레 벗은 몸을 드러낸다. 벗은 몸을 드러내고 있다는 자각도 잘 하지 않는다. 몸을 쓰는 일을 하는 운동선수에게 벗은 몸을 내보이는 일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살갗 아래’의 일은 다르다. 인간의 몸속에는 인간이 결코 스스로의 몸을 열어 들여다볼 수 없는 여러 장기들이 있다. 그 장기들이 제 기능을 잘 해줄 때 무리 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몸속 장기들이 고장 나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야말로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손가락을 다치면 온통 손가락에만 신경이 곤두선 채, 손가락이 온몸을 대신해 육체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에이미는 지금 살갗 아래, 자궁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온 인생이 이 일에 지배받게 될까봐 두렵고 막막하다. 에스터는 어떨까. 촉망받는 수영선수지만 수영 연습에 몰두하느라 오랫동안 생리를 하지 않은 에스터 말이다.

<마른 대지>는 여자 고등학생이 직면한 위태로운 문제를 정서나 심리의 사태로 치환하지 않는다. 물론 에이미나 에스터에게도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과, 되고 싶은 사람에 관한 꿈과 희망이 있다. 또 여느 십 대들처럼 그들의 관계 맺음은 아슬아슬하고 무구하고 애처롭다. 그러나 이 연극은 여자 고등학생이 여성으로서의 몸을 지닌, 그러나 아직 사회적으로 어른이라는 승인을 받지 못한 미결정의 지대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성적 호기심이 많지만 성숙하지 못하기에 충동적인 행위를 일삼고, 성적 행위에 대한 욕망과 혐오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어른의 품을 떠나야 하지만 어른의 세계에 자신을 온통 내맡길 수도 없는 불안한 상태가 마음을 넘어 몸의 문제를 통해 드러난다. 마치 그들이 쓰는 과장된 비속어처럼, 쿨한 척하며 내뱉는 말 뒤에 남는 미묘한 떨림처럼.

청소년기의 원치 않는 임신과 임신 중단권에 대한 예민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임신 중단을 결행하는 에이미의 태도와 그런 에이미를 보여주는 방식은 예상 밖이다. 연극은 에이미가 직면한 문제를 ‘불행’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에이미의 행동을 비난하고 싶어하지도, 에이미의 처지를 안쓰럽게 바라보지도 않는다. 에이미가 느끼는 감정은 슬픔이나 좌절이 아니라 혼란에 가깝다. 에이미는 어서 이 혼란을 넘어 고급 치즈와 레이먼드 카버의 책과 그 책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이 있는 스물일곱 살의 세계로 가고 싶다. <마른 대지>는 잊으려고 애써도 결코 잊히지 않을 삶의 어떤 국면을 고여 있게 두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사진처럼 고이 박제하고 그 의미를 훑는 대신, 흘러가는 시간 속에 둥둥 떠가도록 배치한다. 이 참담한 일이 지나고 나면 에이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더 이상 스스로를 걸레라고 부르는 위악을 떨지 않으면서 잘 살아갈 것이다. 에이미의 고통 속에서, 에이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손잡는 에스터의 용기와 성장 속에서 당연하게도 시간이 흐를 것이다.

십대 후반의 아직 어린 학생이지만, 에이미도 에스터도 그리고 에이미의 유쾌한 친구인 리바도 ‘이상한 느낌’이 뭔지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이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감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얼핏 섹슈얼리티에 무관심해 보이고 어린애 같은 구석이 많은 에스터지만 그는 호기심에 옆집 남자애랑 트램폴린 위에서 섹스를 해봤다고 기억하고, 키스하고 싶다는 빅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반응한다. 전에 다니던 학교의 수영 코치의 터치가 ‘그런 느낌’인 적도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리바의 냄새에 대한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반응이나 에이미의 성적 경험에 대한 거짓말과 과장된 이야기들이 경쾌한 수다로 쏟아져 나올 때,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위태롭고 외로운 마음의 자리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보였다. 락커룸 의자에 앉고 구석에 기대고 바닥에 눕고 손을 내밀고 그렇게 몸의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마음의 공간이 물처럼 일렁인다.

 

"마른 대지" 사진제공: 래빗홀씨어터, ⓒ이지수
"마른 대지" 사진제공: 래빗홀씨어터, ⓒ이지수

 

참연(慘然)하고도 담담(淡潭)한 연출

에이미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덩어리와 쏟아진 피의 흔적들을 청소하는 관리인의 모습을 보는 일은 충격적이었다. 작가 노트에 있는 “낙태 장면은 있는 그대로 보여져야 한다.”와 “관리인은 시간을 충분히 들여 무대를 청소해야 한다.”가 반영된 장면이다. 윤혜숙 연출은 “낙태가 보여져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경계한 작가의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배우의 재현 행위가 대상화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그 장면을 구성했다. 참혹하고 슬픈(慘然) 장면이었지만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에이미와 에스터의 모습을 선명하게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이 끝나고 피가 흥건한 락커룸 바닥의 모습이 환한 조명 아래 드러난다. 곧이어 관리인이 등장해서 오랜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흔적을 치운다. 역시 꼼짝없이 객석에 앉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오롯이 그 장면만을 위해 등장한 관리인은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담담(淡淡)하다 못해 담담(潭潭)한, 이 재현의 태도가 오랫동안 뇌리에 각인될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재현의 윤리에 대해 말할 때, ‘고발’이나 ‘분노’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거나 관음증적 욕망을 해소하는 것을 문제시하기 마련이다. 이 말을 고통에 직면한 모습 그 자체를 형상(形像)으로 재현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마른 대지>의 두 장면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가 눈 감지 말아야 할, 오히려 눈을 제대로 뜨고 그 실체를 직시해야 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임신 중단권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문제이지만 실제로 임신 중단 행위란 권리와 당위에 앞서는 육체적 고통이다. 그 고통은 개인이 감당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선택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무시무시한 고통을 겪은/겪을 몸의 주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흔적을 깨끗이 청소하는 관리인의 행동은 불법적인 임신 중단 행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특별한 돌인 줄 알고 깨뜨렸지만 그냥 돌이 다일 뿐’이라는 에이미의 이야기와 ‘깨진 수박의 잔해로 물이 온통 지저분해졌지만 깨진 수박 조각의 맛은 달콤했다’는 에스터의 이야기는 원작에서처럼 상징적인 메타포로 작동한다. 연극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로, 심상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바라보게 만든다. 에이미를 향한 에스터의 동경과 애틋한 감정, 그리고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꿈에 대해 발설한 에스터에 대한 에이미의 냉소적인 태도가 갈등을 이끄는 축이 되기는 했지만 십 대 소녀들의 위태로운 우정에 대한 우려는 들지 않았다. 지나온 십 대 시절이 그랬듯 그 시절에만 허여된 치기와 갈망이 몸의 성장 속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은후, 김정, 강혜련 배우는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손색이 없었다.

 

"마른 대지" 사진제공: 래빗홀씨어터, ⓒ이지수
"마른 대지" 사진제공: 래빗홀씨어터, ⓒ이지수

연극 <마른 대지>의 포스터는 수영장 속 파란 물로 가득 차 있다. 일렁이는 물결 사이, 마치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공간에 ‘마른 대지’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다른 맥락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을 떠올리게 되었다. 누가 봐도 파이프가 분명한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씀으로써, 재현된 이미지를 보지 않고 그 너머를 응시하는 관습에 대해 반기를 든 그 그림말이다. 온통 축축하고 물의 흔적이 가득한 이 연극의 저 반어적인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생각해 보면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딛고 서 있는 모든 것, 공항, 주차장, 약국들이 한때는 에버글레이즈 습지일 뿐이었습니다.”로 끝나는 에스터의 숙제에 그 실마리가 있다.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땅 저 아래 물이 흐르고 있다. 흔들리고 일렁이고 푹 젖어버리고 침잠했지만, 이제는 마른 대지 위에 있다. 마른 대지를 딛고 있지만 한 때 이 자리가 습지였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유동한다.

<마른 대지> 속 에이미의 사례는 연극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불법으로 암시장에서 유산유도 약물을 구하기 위해 다른 불법에 가담하게 되는 악순환을 연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임신 중단권은 행복추구권과 싸우는 권리가 아니다. 누구나 자기 삶의 행복을 바라고 그 행복이 무엇도 해치지 않고 얻어지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임신중단에 관한 정책은 ‘처벌’을 위한 주수 제한에 골몰할 것이 아니라 건강과 안전을 위한 기준을 두고 검토되어야 한다. 여성이 평생 해야할 선택들 중에 임신은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헌재 결정 직후에 나온 산부인과 전문의인 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의 인터뷰 기사를 곱씹어보게 된다. 그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어느 여성도 임신중지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고 및 인용 글 :

이재덕 기자, 「어느 여성도 임신중지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경향신문, 2019. 4. 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4290707001

※ 이 글은 「습지 위에 세워진 땅을 딛고-<마른 대지>」(공연과이론 79호, 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2020. 9.)를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글·양근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극 창작에 참여. 2016년 방송평론상 수상. 기억과 역사의 길항 및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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