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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를 보며 여자를 생각하다 I <남과 여>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를 보며 여자를 생각하다 I <남과 여>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4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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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사랑이 남자와 달라
'남과 여' 포스터
'남과 여' 포스터

핀란드의 하얀 설원 속 둘만의 동행, 불꽃같은 끌림

헬싱키. 아이들의 국제학교에서 만난 남자(공유)와 여자(전도연)는 먼 북쪽의 캠프장을 향해 동행하게 된다. 폭설로 도로가 끊기고, 인적이 끊긴 온통 하얀 눈 속, 현실이 아닌 꿈과 같은 공간에서 서로가 누군지도 모른 채 두 사람은 그 순간의 감정에 빠져든다. 여자는 불안정한 아들을 돌봐야 하는 매일의 일상이 버거웠다. 그녀가 늘 품고 살던 아들을 떨어뜨려 놓고 나서야 아들 곁에 자신이 곁에 없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하다는 걸 처음 느끼게 된다. 

익숙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현실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과의 낯선 만남. 둘의 만남은 일상의 공간이 아닌 여행 처럼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한다. 여자는 계속 시계를 보다 “차라리 안보는 게 더 낫다”라고 말한다. 시계를 보면 현실을 생각하게 되니까. 현실에서 누군가의 아내와 남편으로, 정작 자신의 외로움은 잊고 살았던 둘은 서로를 향해 다시 ‘남자’와 ‘여자’로 돌아간다. 하지만 둘은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헤어지게 된다. 그녀는 단 한 번 마음 가는 대로 저질렀던 우연한 충동이라고 믿고 싶었다.

 

처음엔 낯선 땅에서 만난 한국인이라 지나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고요했고 또 공허하고 쓸쓸해 보였던 그녀, 작은 어깨에 내려앉은 깊은 슬픔이 마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우린 그렇게 닮아있었다.

 

- 여자의 사랑이 시작되기 전 : 여자는 “위험한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남자는 “괜찮아요. 와 보세요.”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만 돌아가요, 우리”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돌아선다.
- 여자의 사랑이 시작되기 전 : 여자는 “위험한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남자는 “괜찮아요. 와 보세요.”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만 돌아가요, 우리”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돌아선다.

너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8개월 후, 반복되는 일상에 핀란드의 일은 잊혀가던 어느 날 우연을 가장하고 남자가 찾아온다. 그날 이후 남자는 여자를 불쑥 찾아와 그녀의 마음을 두드린다. 멈춰야 하는 마음이기에 애써 참으려 하지만 남자는 자꾸 여자 주위를 맴돈다. 그녀 역시 그를 와락 밀어내지 못한다. 그가 그녀 속으로 삼켜왔던 외로움을 눈치 채고 곁에 와 달래주기 때문이다.

남자는 많은 걸 가슴 안에 품고만 사는 그녀 옆에 운명처럼 나타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그녀의 가슴에 파고들어 조금씩 그녀를 흔들어 놓았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관심 가져달라는 아이처럼 망설임 없이 쏟아내는 애정표현들, 그녀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어느 날 남자는 전화를 해서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냥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남자를 여자는 깊이 사랑하게 된다.

 

그녀에겐 잊힌 하루일지 모르지만 나의 매일은 그날의 기억으로 시작됐고, 하루의 마지막도 그녀의 생각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향했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위태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 여자의 사랑이 시작되다 : “돌아가지 말까요? 농담 아닌데.” 농담 같은 남자의 말에 여자는 송두리째 흔들린다. “우리 정말 큰일이다.”
- 여자의 사랑이 시작되다 : “돌아가지 말까요? 농담 아닌데.” 농담 같은 남자의 말에 여자는 송두리째 흔들린다. “우리 정말 큰일이다.”

‘남과 여’의 다른 선택

하지만 소년 같은 그에게도 말 못 할 상처가 있다. 감정 기복이 커 언제나 위태로운 아내와 그 때문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린 딸.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불안함과 무거운 책임감이 남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런데도 버릴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가족이라는 굴레, 그녀는 그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제 여자에게 남자의 존재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 모든 걸 버려서라도 함께 하고 싶었다. 사랑은 세상에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중 하나다.1) 이 진심은 숨겨지지도 숨길 수도 없다. 그건 나에 대한 예의도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여자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일상은 감정 뒤편으로 물러난다. 여자는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고민하고 의심하지만, 남자는 고민 없이 사랑에 빠져 돌진하다가 나중에야 고민하기 시작한다. 결국 남자는 호기심이 강할 때 무모해지지만 여자는 사랑 때문에 무모해진다.

 

- 여자의 사랑이 정점을 찍다 : “나 그 사람 없으면 안 되거든. 나 용서하지 않아도 돼,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거든.”
- 여자의 사랑이 정점을 찍다 : “나 그 사람 없으면 안 되거든. 나 용서하지 않아도 돼,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거든.”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하는 영화

<남과 여>는 정직한 제목처럼 정통 멜로다. 오직 둘만 있던 시간, 불꽃같은 끌림, 사고처럼 맞닥뜨린 사랑,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몰입의 순간과 위기, 그로 인한 슬픔까지. 사랑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파고와 그 안에 내재한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 깊숙이 들어앉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꿈틀댄다. 두 배우 모두 불륜이 아닌 사랑을, 캐릭터보다는 남자와 여자가 느끼는 감정과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정서가 오롯이 전달될 만큼 열연을 펼치고 있다. 차가운 계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따뜻한 색감, 카메라가 세상을 잡는 각도와 속도는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될 만큼 아름답고 그 끝은 시리도록 처연하다.

<남과 여>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있는 두 남녀의 요동치는 감정과 혼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여자가 사랑에 솔직해지는 과정이 섬세하게 담겨있다.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고 책임을 느껴야 하는 엄마, 아빠인 남과 여, 그들에게도 기댈 곳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외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영화 역시 그보다는 현실과 판타지, 어른들이 갖게 되는 용기와 책임에 대한 물음을 거꾸로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영화는 책임을 지는 남자의 선택도, 그것을 결국 받아들인 여자의 마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아프게 느끼게 한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1) “자기변호나 위장술에 탁월한 수완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재채기 그리고 가난이다.” 대하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이 자전적 에세이에서 던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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