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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문화 톡톡] 예수탄생의 불편한 진실
[안치용의 문화 톡톡] 예수탄생의 불편한 진실
  • 안치용(문화평론가)
  • 승인 2020.12.2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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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예수가 완성한다>의 논의를 중심으로

나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였다는 사실을 믿지만, 예수가 마리아라는 동정녀에게 태어났다는 주장에는 갸우뚱하게 된다. 한국 교회의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내 생각은 확고한데, 동정녀 탄생을 믿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듯 믿지 않는 사람 또한 기독교인이다.

내가 보기에 설화임이 너무 분명한, 그리고 사실 누구도 실제로는 진위를 따지지 않는 동정녀 탄생 설화를 굳이 꺼낸 이유는 믿음 없는 설화의 교조화가 진짜 예수를 만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실 신학에서 동정녀 탄생은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며, 2천 년 가까운 토론 또는 언쟁을 통해 할 얘기를 이미 다 했다.

십자가와 부활이 어떤 식으로든 4복음서에 다 거론되지만,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마태와 누가의 복음에서만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의 핵심적 사안이면 왜 4개 복음서 중에서 2개 복음서만 다뤘느냐며 성경이라는 정경(正經) 내의 비중을 근거로 간단히 회의론을 내민다. 그것이 논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사실 찬반을 논하는 논거는 더 많고 더 깊이 들어간다.

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담론적 장치로 이해하지만, 상징적이고 나아가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넘어서 불변의 물리적 사실로 철석같이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이 있다고 하여도 그 태도를 비판할 마음 또한 전혀 없다. 신앙의 완결성은 현실의 합리성과 무관하게 구성되기 마련이다. 요체는 신앙의 완결성이 현실의 삶에서 작동하는 합리성을 배척하느냐 아니냐이다. 후자라면 문제가 없지만 전자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설화를 사실 중심으로 파악하면 예수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쟁점은 과연 아버지가 누구냐이다. 동정녀 방정식은 마리아란 항수와 아버지란 변수로 구성되는데, 변수를 확정하는 방법론이 예수 사건의 전반적 관점을 결정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성골유대인 예수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의 관점에서 동정녀 탄생을 다룬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또는 정혼) 중에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마태복음118절에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되어 있어,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을 파악하였으며, 그 임신에 자신이 관여하지 않았을뿐더러 잉태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몰랐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 유대인 결혼 풍습에 따르면 약혼 또는 정혼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정식으로 결혼하여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갔다. 결혼(약혼) 중에 이혼(파혼)이 가능했으나 이혼(파혼)제도는 남성 중심으로 운영됐다. 아무튼 요셉은 불미스러운 일을 파악하고도 약혼녀 마리아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려고 이것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즉 파혼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태복음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칭하였다.

이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요셉은 다윗의 자손으로 불린다. 이어 꿈에서 예수 사건 전체를 요약해서 예지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121~23)

 

마태복음에서 다윗의 자손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알려준 것은 다음과 같다. 1)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은 성령에 의한 것이다. 2) 아들을 낳을 것이다. 3) 그 아들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4) 이 일은 선지자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구약성서)을 이루려 함이다.

1번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먼저 (혼전 임신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부정(不貞)을 저지르지 않았고, 마리아의 태중 아이의 아버지가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중에 성모(聖母)로 추앙되는 예수 어머니인 마리아의 품행이 방정함을 증명함으로써 마리아와 나아가 부정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의 무결함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모자 모두의 무결성을 주장한 배경에, 혹시 곧 살펴볼 유대인들의 예수 사생아설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모자 모두의 품격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예수 탄생의 무결성(無缺性)은 또 다른 중요한 지점으로 연결되는데, 예수 잉태의 원인이 성령이라는 언급이다. 사람이 잉태의 원인이 아니므로 마리아는 부정 혐의를 벗고, 예수 또한 인간의 씨에서 비롯하지 않았기에 인간의 죄성(罪性)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며, 나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기에 마리아란 인간 여성에게서 태어났어도 그는 신인(神人)이 된다. ‘참신이자 참인간(vere Deus vere Homo)’의 교리는 예수 출생 설화가 그 시작점이다. 양성론으로 알려진 이 교리는 출생 설화로 간단히 정리될 사안이 아니어서 기독교 형성기에 극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성서가 출생 자체에 양성(兩性)의 근거를 부여한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2번은 단순히 생물학적 성의 구분을 지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의미 있는 가정은 아니지만 만일 예수가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는 번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 주요 종교 중에 여성을 창시자로 한 종교는 없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천명되지 않은 하나님조차 남성으로 간주하는 판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런 게 생겼다 해도 가부장제 이념에 역행하기에 오래 살아남기 힘들었을 터이다. 요셉에게 전해진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주의 사자의 말씀은 그를 네 아들로 받아들여라는 뜻이다. 이로써 예수는 인간세계의 기준으로 요셉의 혈통이 되며, 따라서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듯 예수 또한 다윗의 자손이 된다.

마태복음1장은 예수의 계보로 시작한다. 제일 먼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임을 명시하고 실명들로 구체적인 족보를 적었다. 마태복음기자는 유대인 기독교도를 대상으로 저술되었으며 주류 유대교에 맞서 소수 종파인 기독교를 지켜내려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명시하는 것은 유대교와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마태복음, 이방 선교에 주력한 바울 노선과 달리 유대 민족 또는 유대교 내 기독교의 헤게모니 투쟁 노선을 견지하였기에 다윗이라는 정통성의 상징이 중요했다.

마태복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명시하는 데서 약간의 난점이 생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브라함에서 요셉에 이르는 계보는 인간의 혈통에 근거하였는데, 엄격하게 말해 피로는 예수가 이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의식하였는지, 마태복음기자는 116절에서 특별히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라고 적시하였다.

마태복음에서 시대 구분이란 거시적 상징과 함께 마리아의 남편이란 미시적 상징은 필수불가결했다. 신인(神人) 예수가 인간 혈통을 기준으로 마리아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인간세계의 기준으로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 되려면 마리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 사정이어서 마태복음은 궁여지책으로 마리아의 남편을 등장시킨 듯하다.

이러한 난점을 의식한 듯 신약성서 외의 어떤 기독교 문서들에서는 마리아를 애초에 다윗의 자손으로 기록하여 세속의 혈통 논란을 종식했다. 외경인 마리아 탄생 복음11절은 축복을 받고 영원히 영광스러운 동정녀 마리아는 다윗왕가의 후손으로서 나사렛에서 태어나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교육을 받았다이다. 장 칼뱅도 그의 주저 기독교 강요에서 마리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경인 4복음서 중에서는 마리아가 다윗의 후손이란 기록이 포함되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 혈통 기준으론 다윗 가문에 입적된 셈이어서 논란의 소지를 남긴다.

3번과 4번은 구약성서와 연결된다. 3그 아들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란 문구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열망을 반영한 표현이다. ‘자기 백성이란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화로운 시기를 상징하는 다윗왕과 연결되어 태어날 아이가 민족의 지도자가 될 것임을 함축한다. 특히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나라를 잃고 이방인의 지배 아래 살게 된 이스라엘 민족이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기원전 587년 이후 예수 시기까지 이어진 거대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구약성서에 기반한 이스라엘의 희망의 신학을 표명한다.

4번은 구약성서 선지자의 예언이 실현됨을 말하는데, 이사야서714절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를 근거로 동정녀 탄생을 연결 짓는다. 이 대목은 성서의 대표적인 오역 사건이기에, 마태복음기자가 의도적으로 오역하였는지 아니면 당시에 존재하던 구약성서 헬라어 번역본(70인역)의 오역을 답습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히브리어 구약성서에는 처녀대신 젊은 여자’(성경험이 없는 여자가 아니라 출산경험이 없는 젊은 여자)란 단어가 표기돼 있다. 동정녀 탄생을 이사야서에서 예언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오역 건은 널리 알려진 일이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한국어 성경에서 신약의 오역에 맞춰 구약의 본문까지 바꿔버렸다는 점은 유감스럽다. 영어 성서 판본들에서는 이사야서714절을 ‘the virgin’‘a young woman’으로 혼재하여 쓰고 있다. 독일어성서 판본들에서도 ‘eine Jungfrau’‘ein junges Weib’가 섞여서 사용된다.

요약하면, 마태복음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바탕에 깔고 아브라함·모세·다윗과 예수를 연결지으면서 동시에 예수를 신인이라고 기술한다. 다윗의 자손 요셉의 입장에서 즉 예수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또 구약과 신약의 긴밀한 연결의 관점에서 예수 탄생을 설명한다.

 

누가복음은 예수 탄생 설화를 여성의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를 다룬 누가복음은 같은 사건을 다루지만 구성이 판이하다. 성서 본문을 보자.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누가복음126~35)

 

본문은 마리아와 요셉, 예수의 고향으로 갈릴리의 나사렛을 적시한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대로 나사렛 예수의 출생지는 갈릴리가 아닌 베들레헴으로 기록돼 있다. 마리아와 요셉의 출생지는 공식 복음서 상으로 확인되지 않고 그저 갈릴리 사람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예수탄생교회란 이름의 오래된 교회가 베들레헴 외곽에 위치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동정녀 탄생 설화를 기록한 마태·누가 복음은 공통으로 예수의 출생지가 베들레헴이라고 밝힌다. 사전 설명 없이 예수가 그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는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잉태는 갈릴리, 출생은 베들레헴으로 구분된다.

부부 간에 수식(修飾)하는 방향의 차이 또한 목격된다. 마태복음에서 마리아의 남편 요셉누가복음에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로 바뀐다. 이미 앞서 밝혔듯, 수태고지 또한 ()의 사자 대 요셉에서 천사 가브리엘 대 마리아로 변화한다.

누가복음의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는 성모 마리아 설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요셉에서 마리아로, 예수를 탄생케 한 주체의 변화는 단순한 관점 변화 이상의 심대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여자는 사회적 주체가 아니었고, 따라서 사건의 합당한 증언자로 간주되지 않았다. 남자와 비교해 절대 열위의 위상을 갖는 여성인 마리아를 주체로 내세워 동정녀 탄생 설화를 써 내려간 방식에서 모종의 전복이 엿보인다. 이 부분의 서술방식에 한정한다면 일종의 페미니즘 글쓰기라고 불러도 좋겠다.

두 복음서 사이에 동정녀 탄생의 증거 방식이 다르다. 마태복음은 제3자에 의한 또는 전지적 시점에 의한 사건 기술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애초에 무지한 요셉이 주의 사자의 도움으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방식을 취한다. 반면 누가복음은 사건의 시초부터 출산의 주체인 마리아의 관점에서 기록한다. 마리아가 분명히 묻고 천사가 대답하며 마리아의 결단과 순종이 묘사된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수태 계획은 마리아에게 고지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계획을 수용한다. 마리아의 동의가 있었음을, 또는 하나님과 마리아 사이에 합의(혹은 사전 소통)가 존재하였음을 누가복음은 표시한다. 반면 마태복음에서 마리아는 그저 동정녀 탄생의 매개체일 뿐이다. 사건은 이미 일어났고, 마리아의 법적 대리인인 요셉을 통하여 사후적인 결정이 이루어진다. ‘남자를 알지 못함과 잉태 사이의 연관을 물은 것은 생물학적 의혹을 제기하였다기보다는 처녀의 잉태가 불러올 인간사의 파장을 마리아가 충분히 의식하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사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섭리에 몸을 맡기는 마리아는 성모(聖母)로서 기독교의 시작점이자 기독교 신앙의 모범이 된다. 조금 더 확장하여 말하면, 물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지만 기독교는 마리아란 갈릴리 처녀를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었다.

처녀막 재생 수술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성육신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두고 성서는 네 태중의 아이가 복 있다고 말한다. ‘태중이 마리아의 자궁을 의미함은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또한 마리아가 자신의 자궁에서 태아인 예수를 키우다가 날이 차서 자기 몸 안의 산도(産道)를 통해 분만하였음 또한 성서에 기반한다. 출산과 관련하여 기능적으로 산도라고 불리는 여성의 이 인체 기관은 생식과 관련하여서는 질()이라고 불린다. 질에 관한 해부학적 설명은 교미기관과 분만 시 산도를 겸한다이며 신약성서 기술을 그대로 믿으면 성모 마리아의 인체 기관인 질을 이용한 출산은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성관계의 용도로는 활용되지 않았다이다.

마태복음누가복음의 기자가 그렇게 쓴 데는 그렇게 써야 할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그리고 신앙적인 맥락과 배경이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과거 기독교 형성기에 (마태복음누가복음을 신약성서에 넣은 정경화正經化자체를 포함하여) 동정녀 탄생 교리를 확립한 데도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 있었을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수 동정녀 탄생 교리를 고집하고 믿음의 증거로 이것을 믿도록 강요한다면 그러한 행태는 명백히 시대착오적이다. 동정녀 교리를 고수하는 기독교 목사나 가톨릭 신부 가운데 진짜로 이 교리를 믿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사도신경을 통해 매 주일 동정녀에게 나시고를 외는 기독교인 가운데 몇 명이나 진짜로 이 내용을 믿을까.

동정녀 교리는 국가·사회의 가부장제 권력과 남성중심의 위계적인 종교권력 사이의 화학작용에서 배태된 일종의 관음증이자 ()집착증이다. 또는 여성혐오의 기독교 교리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육화한 신()인 예수는, 지상에서 신()이자 인간이고 인간이자 신()인 신인(神人)이 분명하지만, 성육신하는 바로 그 순간에까지 신인 협력의 방식을 취할 이유는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방식을 상상해낼 수 있는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하는 인류문명에서, 또 신을 남성으로 상정하는 역사에서, 살아남고 승리한 남성우월주의 기독교에서 가능할 것이다.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가, 만연한 처녀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으로 관철한 것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동정녀 교리를 자연주의에 기댄 저급한 신앙 확증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 탄생을 자연주의의 예외로 설정함으로써 신성을 부여하는 논증은, 그 논증 자체가 자연주의에 입각한 것이어서 더 자연주의적이 된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자연주의가 결국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할 때 동정녀 탄생에 따른 예수의 신성이 인간적 논증을 통해 인정받게 된다는 상황은 신성의 모순을 야기한다. 어린아이에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거나 황새가 가져다주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급한 자연주의 논증 자체도 기본적으로는 가부장제 및 여성혐오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이 사실이다.

내가 틀렸을지 모르지만, 내가 신이라면 처녀막 재생 수술을 연상시키는 기괴하고 우스운 성육신의 방식이 아니라, 평범하고 인간적이며, 따뜻한 배려와 서로를 열망하는 긍정적 성애의 사랑에 근거한 성육신을 택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은 신이 기꺼이 인간인 우리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으며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수난을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데서 찾아진다. 신은 나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신이 내가 되었으며 반대로 나 또한 신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특별한 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예수는 무엇보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성육신하면서 굳이 천사를 보내고 신비스런 잉태 과정을 연출하는 유난을 떨 이유를 나로서는 도무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의 친부이자 친모이면 안 될 이유가 없으며, 그럼에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며 우리의 그리스도일 수 있다.

 

예수 사생아 설’, 외계인설 등

그리하여 예수 동정녀 탄생의 숨은 의미를 파헤치려는 음모론에 가까운 이설 또한 성행한다. 현재의 과학기술을 적용하면, 동정녀 탄생이 꼭 해석되지 못할 바가 아니다. 마리아의 체세포 복제를 통해 예수가 출생했다면 요셉의 생물학적 기여는 불필요하다. 과학기술이 성령이 되는 셈이다. 그 시기에 체세포 복제가 가능할 리가 없기에 따라서 성령에 의한 잉태란 또 다른 이설로 연결되는데, 외계인의 도움으로 마리아가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상상과 외계인이 바로 성령이어서 예수는 외계인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또 다른 상상이 그것이다.

동정녀 출생 교리가 외계인과 마리아의 혼외정사를 등장시키는 희화화를 초래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자체를 외계인으로 보려는 극단적 시각 또한 창안케 하고 있다. 인간에게 신이 외계(外界)의 존재임이 분명하기에 신과 외계인을 등치하는 논법은 인간이 외계인의 가능성을 인식하게 된 이후로 언제나 가장 간편한 신 이해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 이해방식은 좀 우습긴 해도, 간단하게 신을 인간 세상 밖으로 쫓아낸 다음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예컨대 이신론 같은 신앙의 허위의식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인 고민의 결과물로 평가받아야 한다.

아무튼 과거엔 착상할 수 없던 현대적 잉태 방법을 성령과 연결 지으면서 이처럼 해괴한 상상이 난무하는가 하면, 예수 시대엔 예수 사생아 설이 유포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령에 의한 잉태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면, 요셉이 친부가 아님과 마리아가 생모임에 근거하여 요셉이 아닌 다른 남자를 친부로 상정하는 것 말고는 그 시대에 납득할 만한 다른 방법이 찾아지지 않는다.

이러한 예수 사생아 설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지고 오래된 친부후보는 판테라라는 로마 병사다. 정혼남 요셉이 있었고, 실제로 그와 결혼하여 남편까지 두게 되는 마리아와 판테라는 무슨 관계일까. 예수 시대의 유대인 지역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음을 우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배자의 일원이자 점령군으로 식민지에 주둔한 로마 병사들이 지금의 유엔평화유지군과는 많이 달랐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아마 달라도 매우 다르지 않았을까. 로마 병사에 의한 유대인 약탈과 유대 여인 강간은 드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마리아와 판테라의 관계가 설정되고 그 사이에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주장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주장 자체만으로 초기 기독교가 유대인 사회에서 생존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었을 터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초기 기독교의 생존과 확대를 싫어하는 이들이 이런 주장을 조직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만들어내고 확대 재생산하였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이에 따라 판테라 예수 친부설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이런저런 증거가 제시되었는가 하면 기독교에 의한 즉각적이고 결사적인 반박 또한 이루어졌다. 이 주장은 기독교를 싫어하는 유대교도 사이에서 힘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유대교 내에서 소수 종파인 기독교가 살아남아서 힘을 키우고자 하였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악의적인’ ‘판테라 예수 친부설이 실제로 돌았다면, 이 낭설에 맞서 싸우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데서 그치지 않고, A.D 70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 로마군에 맞서 싸운 유대 반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한 마사다 항전의 기억이 당시 유대인 사회에 완연한 가운데 만일 유대교 소수 종파의 비조가 로마 병사의 핏줄이라면 그 종파는 존립 자체를 위협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의 예수 동정녀 탄생 설화가 판테라 예수 친부설에 대한 필사적인 반박의 의도 아래 작성되었다면 상당히 그럴듯한 이유는 된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지금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우리에겐 성경, 외경, 위경, 전승자료, 역사적 문헌과 예수 동정녀 탄생이라는 공식 교리가 남아 있을 뿐이다.

누가복음마태복음은 예수 탄생을 각각 독특한 풍경으로 전하며 축하한다. 탄생 축하는 역사와 크게 관련되지 않은 성서의 독자적인 이야기이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누가복음28~17)

 

예수 탄생은 사건이자 그 자체로 복음인데, 탄생 직후 인간세상에서 이 사건을 가장 먼저 목격하고 체험한 이들은 당연히 마리아·요셉 부부이지만, 출산의 당사자가 아닌 이들 가운데서 복음을 가장 먼저 전달받은 이들이 누가복음에서 목자로 그려진다. 목자는 당시 사회의 대표적인 생산계급에 속했지만 유대교 체계에서 천대받은 하층계급이었다. 이런 하층계급에게 복음이 가장 먼저 전해졌으며 더구나 그 복음은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의 사자가 선포하였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신약성서에 말하는 그 복음이다. 영어로 ‘Gospel’로 표기되는 좋은 소식’, 곧 복음은 앵글로색슨어의 ‘godspell’에서 유래한 말이며, 신약성서 상의 헬라어 에우안겔리온(euangelion)’과 같은 의미이다. 부연하면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이다.

태어나자마자 예수에게 주어진 요람이 구유라는 점 또한 매우 상징적이다. 구유와 구유가 있는 장소에 대해 종교화나 성탄절 예배당에서 묘사한 것과 실제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다. 구유가 아니라 그냥 객실에서 낳았다는 견해, 출산장소가 베들레헴 외곽의 동굴이라는 견해, 성전 제사에 쓸 양떼를 돌보는 베들레헴 인근의 에델 망대(望臺)라는 견해 등 구유를 설명하는 다양한 연구가 있다. 어느 곳이든 탄생장소의 의미를 바꿀 정도는 아니다. 온 세상을 구하러 온 구세주가 동물과 함께하는 낮은 자리에 뉘어졌으며, 탄생소식이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는 전언에서 우리는 누가복음의 분명한 메시지를 파악하게 된다. 이미 살펴본 대로 예수 탄생 사건이 여성인 마리아를 중심으로 구현되었다는 것과 결부되어 누가복음은 예수 탄생의 정수를 가장 매혹적인 방식으로 전한다.

반면 마태복음에서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방식은 매우 정치적이다. 별의 인도를 받은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오고 이 사실은 당시 유대 지배계급 내에서 소동을 일으킨다. 목자들로부터 탄생 축하를 받은 누가복음과 대조적으로 마태복음에서 갓 태어난 예수는 동방박사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탄생축하 예물로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받는다. 이후 모세의 삶과 꼭 닮은 방식으로 전개된 어린 예수의 삶까지, 마태복음의 탄생 설화는 종교와 정치에서 왕 또는 교주로 나신 이를 묘사하는 전형적인 구조를 연상시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11)임을 천명하고 시작한 마태복음이 탄생 설화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란 표현을 쓴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성서의 첫 문장이기도 하다.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의 본격 경전인 신약성서의 시작을 유대인 족보와 함께 시작하도록 한 초기 기독교의 종교지도자들에겐 개인적으로 매우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 또한 유대인이었고, 그들은 그들의 믿음이 기독교란 세계종교로 발전할 줄을 몰랐을 것이기에 불가피했다고 수긍할 수 있다.

우리는 마태복음」 「누가복음등 복음서가 전한 예수의 탄생을 지금은 없는 복음서 기자들과 함께 기뻐한다. 우리는 또한 예수의 선포를 그들과 함께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과 선포가 동시에 복음서 너머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수는 태어났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태어나고 있으며 말하고 있다.

 

글·안치용(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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