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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간여행과 변신의 환상성-<어바웃 타임>과 <수상한 그녀>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간여행과 변신의 환상성-<어바웃 타임>과 <수상한 그녀>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8 0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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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타임' 스틸컷.
'어바웃 타임' 스틸컷.
'수상한 그녀'의 스틸컷.
'수상한 그녀'의 스틸컷.

2020년의 끝자락이다. 다시, 매듭이 완성되는 시간이다. 이 매듭은 인위적이다. 시간에는 본디 매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구분해 매듭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연말이 되면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며 아쉬워한다. 우리는 시간을 흔히 강물의 흐름에 비유한다. 그런데 가끔 희귀한 흐름이 있다. 어떤 강물은 가끔 거슬러 흐른다.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착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강물의 작은 매듭이며, 강물은 이 매듭을 풀어내고 바다로 흘러간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매듭을 풀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이때 시간여행이 좋은 방법이 된다. 연말이면 더 필요해진다. 영화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혹은 ‘다른 세월을 살 수 있다면?’이라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준다.

시간여행을 떠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어바웃 타임>(감독 리차드 커티스)은 인물이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는 방식을 선보인다. 인물이 과거로 시간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서사의 흐름이 바뀐다. 방법도 간단하다. 주인공 팀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어두운 곳에 가서 주먹만 꽉 쥐면, 자기가 원하는 시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팀은 심지어 과거의 사건을 완전히 바꾸거나 이미 발생한 사건을 없애버린다. 팀이 첫눈에 반한 메리의 남자친구를 따돌린 사건이 대표적이다. 팀은 메리가 일주일 전 남자친구와 처음 만난 파티의 시간과 장소를 알아내고, 그곳에 먼저 가서 메리가 남자친구가 아예 만나지 못하도록 선수를 치고, 마침내 메리와 데이트를 한다.

 

'어바웃 타임'의 스틸컷.
'어바웃 타임'의 스틸컷.

팀의 행적은 시간여행의 일반적인 구도를 따른다. ‘현실-과거-현실’의 순서다. 현실에서 과거의 특정 순간, 특정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어떤 사건을 없애거나 그 사건의 성격을 바꾼다. 이때 앞의 현실은 상실, 부재, 결핍, 불행 등으로 설명되는 우울한 현실이다. 샬럿의 등에 오일을 발라주다가 실수를 하고, 메리에게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식이다. 반면에 뒤의 현실은 상실, 부재, 결핍을 해소한 행복과 충만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팀은 샬럿에게 능숙하게 오일을 발라주고, 극장에서 재회한 샬럿과 대화하면서 실수한 내용을 만회하고, 아빠 친구의 망쳐버린 연극 공연을 되살려 놓는다.

<어바웃 타임>에서는 팀의 시간여행이 자주 발생한다. 이때 시간여행의 목적지는 비교적 가까운 과거이다. 2, 3분 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공간은 현실세계 그대로이다. 2, 3분 전에 정원에서 벌어진 일을 삭제하고, 새롭게 사건을 만드는 식이다. 이러한 일상성은 <어바웃 타임>의 시간 여행의 특징이다. 그래서 팀의 시간여행은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만큼 현재와 과거가 유사하다. 물론 일상적인 사건이라고 해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메리와의 만남은 결혼으로 이어지는 중대 사건이다.

 

'수상한 그녀'의 스틸컷.
'수상한 그녀'의 스틸컷.

<수상한 그녀>(감독 황동혁)에는 시간여행과 변신 모티브가 결합되어 나타난다. 요양원에 들어갈 처지에 놓인 70대 할머니 오말순이 갑자기 20대 오두리로 변신했다가 오말순으로 다시 돌아온다. 오말순은 5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오말순의 행적 역시 ‘현실-과거(비현실)-현실’의 서사구조로 전개된다. <수상한 그녀>에서 오말순(오두리)을 제외한 시간, 공간, 인물은 동일하게 유지된다. 즉, 영화의 시공간과 주변 인물은 동일한 상태에서 오말순만 오두리로 변신한다. 이를 통해 오말순은 평생 가슴 속 외딴 골짜기에 묻어두고 살았던 가수의 꿈을 이룬다.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는 <수상한 그녀>의 주요 특징이다.

<어바웃 타임>에서는 주인공 팀이 직접 시간여행을 한다. <수상한 그녀>에서는 시공간 배경은 그대로인 상태에서 주인공이 변신을 통해 시간여행을 한다. 두 영화에서 인물의 행적이 ‘현실-과거(비현실)-현실’의 구도로 이뤄진다는 점은 유사하다. 그리고 이러한 서사 전개는 ‘환몽구조’의 변주로 읽을 수 있다. 환몽구조는 현실과 과거(비현실)의 대비를 통해 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적 욕망을 전달한다. 우리나라 서사물의 환몽구조는 『삼국유사』에 수록돼 있는 「조신전」에서 원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조신전」은 승려인 조신이 꿈속에서 평소에 사모하던 귀족의 딸과 결혼하고, 가난으로 인해 고통 받다가 헤어지고, 꿈에서 깨어난 후 불도에 정진한다는 내용이다. ‘현실-꿈-현실’의 환몽구조로 된 소설은 조선시대에 가장 활발하게 창작됐다. 『원생몽유록』, 『구운몽』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어바웃 타임'의 스틸컷.
'어바웃 타임'의 스틸컷.

<어바웃 타임>과 <수상한 그녀>에서는 인물이 꿈 대신에 과거(비현실)로 돌아간다. 이때 시간여행은 전이공간을 필요로 한다. 팀은 옷장이나 방과 같이 어두운 공간에서 시간여행을 한다. 오말순→오두리의 변신은 청춘사진관에서 일어나고, 오두리→오말순의 변신은 병원에서 발생한다. <수상한 그녀>는 ‘현실→비현실’과 ‘비현실→현실’의 이동 과정이 대칭을 이룬다. 두 영화에서 시간여행은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팀과 오말순은 이 초자연적인 사건(능력) 앞에서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다가 곧바로 수용한다. “이대로 늙어 죽기에는 너무 원통하고 불쌍해 보이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을 주신 것”이라는 오두리의 대사가 이러한 특징을 잘 설명해준다. 망설임은 환상성의 중요한 특징이다.

두 영화에서 초자연적인 사건은 현실세계에서 발생한다. 인물이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들거나, 현실과 꿈(비현실)의 세계가 공존한다. 그러한 점에서 일반적인 판타지영화의 환상성과 차별화된다. 판타지영화는 보통 현실세계와 무관한 2차 세계를 배경으로 하거나(<반지의 제왕>), 현실과 비현실 세계가 분리된 서사공간을 토대로 한다(<해리포터> 시리즈). 판타지영화의 주요 서사공간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세계이다. 현실세계의 인물은 시간여행 혹은 공간 이동을 통해 가상의 환상세계를 경험한 후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이때 환상세계에서는 현실세계의 자연 법칙을 벗어나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인물들도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수상한 그녀'의 포스터.
'수상한 그녀'의 포스터.

반면 <어바웃 타임>과 <수상한 그녀>에서는 인물이 과거(비현실)로 이동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현실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팀이 시간여행을 하고 오두리가 젊어지기는 하지만, 그 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현실 세계에 비현실적인 요소가 틈입함으로써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관객들이 동일시를 통해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팀과 오두리의 나이이다. 팀은 시간여행 능력을 성인이 된 날에 처음 알게 된다. 오말순은 스무 살 오두리로 변신한다. 시간여행 모티브가 통과제의 구조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영화는 장르도, 시공간도, 인물의 성격도 다르다. 그렇지만 시간 여행 모티브를 토대로 인물들이 현실세계의 결핍, 부재, 상실, 불행을 극복하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시간 여행을 통해서 실수를 바로잡고, 오랫동안 접어두어야 했던 꿈을 이룬다. 현실세계와 환상세계가 공존하며, 현실을 가족애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들도 죽음을 막지는 못한다. 팀의 아버지도, 오말순도 죽음의 세계로 떠나간다. 그런데 팀의 아버지는 마지막 시간여행에서 어린 아들과 바닷가를 산책하고, 수제비 뜨기 놀이를 한 순간으로 돌아간다. 오말순은 교통사고로 입원한 손자를 위해 헌혈을 한다. 청춘을 포기하고 손자를 구한다.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2020년의 끝자락이다. 작년에 그러했던 것처럼, 올해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난 한 해를 반추한다. 하지만 과거를 바꾸거나, 세월을 거슬러 변신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바웃 타임>과 <수상한 그녀>는 시간여행의 가능성과 삶의 매듭을 푸는 방법을 선물해준다. 두 영화가 현실세계를 배경으로 삼아서 장삼이사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은 작은 위안이 된다. 현실세계에서는 지나간 실수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지만 시간여행의 환상성이 부재, 결핍, 상실, 후회로 채워진 삶의 꼬인 매듭을 조금은 풀어줄지도 모른다.

 

'어바웃 타임'의 스틸컷.
'어바웃 타임'의 스틸컷.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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