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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14세 소년의 몸에 새겨진 시대의 불안과 폭력성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14세 소년의 몸에 새겨진 시대의 불안과 폭력성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1.01.04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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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시간의 폭력성이 절대적, 보편적인 것과 달리 시대의 폭력성은 상대적, 선택적이다. 즉,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도 특정 인물이 특정 사건과 맺는 관계 양상이나 영향력은 동일하지 않다. 동시대의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날씨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 날씨에 똑같은 정도로 노출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특정 인물의 상황까지 고려하면, 시대의 폭력성은 간단치 않은 과제가 된다. 그래서 영화가 특정 시대의 문제를 어떠한 관점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다루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관계를 살펴보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인물의 특성이다. 어떤 영화는 시대 상황과 관련이 없는 인물, 시대의 폭력성에 저항하는 인물, 시대의 중심부에서 요동치는 인물들의 행적을 동시에 그린다. 이러한 영화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시대의 폭력성과 관련을 맺는다(<1987>).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4세 사춘기 소년을 통해 시대의 음험한 공기와 거친 폭력성을 은유적으로 다룬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대만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감독인 에드워드 양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는 1950년대 말, 혼란스러운 대만 사회를 시대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중학생 샤오쓰의 학교생활을 뼈대로 삼아서 그의 가족, 친구, 첫사랑 등의 문제를 그려낸다. 이때 카메라는 인물과 멀찌감치 떨어져서 무심한 듯이 그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또 사건의 인과관계에 집중하기보다 에피소드의 연결과 조합을 통해 시대의 풍경을 그려낸다. 그런데 샤오쓰는 얼핏 보면 시대의 공기와 무관한 인물이다. 그는 단지 사춘기 중학생일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시대의 불순한 공기가 소년의 삶을 휘감고 있다. 샤오쓰의 행적에는 시대의 폭력성이 안개처럼 은밀하게 스며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샤오쓰의 불안과 혼란은 1950~60년대 대만 사회의 날씨를 상징한다. 당시 장제스가 중국 본토에서 밀려난 세운 중화민국은 전쟁과 독재, 테러, 주민들 간의 갈등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한마디로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대만의 이러한 시대 상황은 14세 소년의 몸과 마음에 응축돼 있다. 주인공 샤오쓰는 사춘기 소년처럼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대만의 정치, 사회 상황을 상징하는 인물인 셈이다. 샤오쓰는 국어에서 낮은 성적을 받아 야간반으로 옮기고, 같은 학교 여학생 밍과 첫사랑에 빠지고, 폭력 조직인 소공원파와 217파의 세력 다툼 사이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친구인 킷캣과는 미국 팝송을 즐겨 듣는다. 그는 공부, 첫사랑, 폭력, 살인, 음악, 불안 등이 뒤엉켜 있는 인물이다. 에드워드 양 감독이 1961년 대만에서 처음 발생했던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미성숙한 상태에서 혼란과 불안의 질풍노도기를 통과하던 샤오쓰의 행적이 대만 사회와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인물 설정은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는 폭력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눈앞의 이익을 좇아 배신하는 인물과 험악한 복수가 난무한다. 폭력 조직인 소공원파와 217파의 세력 다툼 때문이다. 그런데 소공원파와 217파의 구성원들은 얽히고설켜 있는 관계이다. 지역적으로 인접해 있고, 같은 학교를 다니기도 하고, 인물들의 옷차림이나 외모가 서로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언뜻 봐서는 누가 소공원파이고 누가 217파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두 집단을 통해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서 시대의 폭력성은 다양한 측면으로 나타난다. 권위주의적이고 나태한 교사, 여성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아버지, 소공원파와 217파의 패싸움 등이다. 물론 살인과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소공원파 두목 허니와 샤오쓰의 첫사랑 밍의 죽음은 허무하다. 허니는 217파 두목과 산책하는 과정에서 기차에 떠밀려 죽는다. 카리스마를 지닌 소공원파 보스의 죽음치고는 허망하다. 밍의 죽음도 비슷하다. 학교에서 쫓겨나 혼자 공부하던 샤오쓰는 첫사랑 밍과 친구 샤오마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고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우연히 길에서 만난 밍을 칼로 찌른다. 밍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샤오쓰는 당황한다. “일어나. 빨리 일어나. 힘줘서 일어나. 너 죽지 않을 거야. 날 믿어. 빨리빨리 일어나. 넌 할 수 있어. 빨리 일어나. 일어나. 왜 안 일어나는 거야.”라고 울부짖는다. 우발적인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춘기 소녀 밍의 짧은 삶은 허망하게 끝난다. 217파 두목의 죽음을 포함하여, 이 영화의 죽음들은 온전히 은유적이다. 샤오쓰가 불안과 방황의 대만 사회를 상징한다면, 허니와 밍은 허무하게 죽어가는 시대의 희생양들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시대의 폭력성을 직접 드러내는 장면도 나온다. 샤오쓰의 아버지가 좌익 혐의를 받고 취조당하는 장면이다. 착실한 공무원이었던 샤오쓰의 아버지는 어느 날 집으로 찾아온 기관원들에게 끌려간다. 본토인 상하이 출신인 아버지는 대학 친구들과의 관계, 그들과의 만남, 그들의 행적을 빠짐없이 적도록 강요받는다. 아버지는 넓고 휑한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초췌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서 종이 위에 옛 친구들의 이름과 행적을 적는다. 기관원은 아버지가 빠뜨린 이름들을 하나씩 거론하면서 아버지를 윽박지른다. 중국과의 갈등이 국가의 폭력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국가가 울려 퍼질 때, 폭력배들조차 부동자세로 서 있는 장면도 비슷한 맥락이다(인물의 성격은 다르지만, <국제시장>에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이 취조 장면은 낯설지 않다. 임철우의 중편소설 ‘붉은 방’과 너무나 유사하다. ‘붉은 방’에서는 고교 교사인 오기섭이 출근길에 기관원들에게 납치당해서 붉은 방에 감금된다. 시국사범 은닉 혐의로 체포되어 지하의 방에 구금된다. 오기섭은 그 붉은 방에서 6‧25 때 월북한 큰아버지의 기억, 지인의 부탁으로 재워준 운동권 인사와 관련된 행적을 낱낱이 적도록 강요받는다. 집단 구타, 물고문, 강제 진술서 작성이 이어진다. 분단의 시대 상황이 국가 폭력의 당위성으로 돌변한다. 오기섭은 그 방을 “피의 지옥”이라고 표현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붉은 방’에서 기관원들은 아버지와 오기섭의 행적, 그들이 알고 지냈던 인물들에 대하여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 국가 시스템이 곧 파놉티콘의 재현인 것이다. 파놉티콘은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제안했던 원형 감옥이다. 건물 외곽에 원형으로 수감자들의 방을 만들고, 중앙에 감시탑을 둔 형태이다. 그런데 수감자들의 방은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도록 만들고, 간수가 있는 감시탑은 어둡게 유지한다. 간수는 어둠 속에서 수감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이때 간수는 수감자들을 24시간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수감자들은 자신이 언제나 감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평소에도 감시당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로 인해 푸코가 말한 규율의 내면화가 이뤄진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스틸컷.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성장영화의 외투를 입고 있다. 그런데 14세 사춘기 소년 샤오쓰 자체가 불안과 혼란으로 얼룩진 시대의 특징을 상징한다. 그는 어여쁜 소녀와 첫사랑을 하고 미국 팝음악에 빠져 있기도 하지만,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폭력과 살인에 휘말리기도 한다. 샤오쓰의 행적과 특징이 비유적이라면, 아버지의 행적은 시대의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가부장적이라는 점에서는 폭력의 집행자이지만, 국가 시스템에 의해 삶이 무너진다는 점에서는 폭력의 희생자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이처럼 인물의 불안과 혼란을 통해 시대의 폭력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인물과 사건, 시대 배경은 전쟁과 분단으로 점철된 우리나라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영화가 시대의 불안과 폭력성을 다루는 방법을 고민할 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훌륭한 모범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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