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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스탈린, 그리고 기자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스탈린, 그리고 기자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1.01.05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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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영화리뷰) <미스터 존스(Mr. Jones)>

 

아일랜드 대기근(영어: Great Famine, 아일랜드어: An Gorta Mór, An Drochshaol)은 1845년에서 1852년까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집단기근과 역병, 대규모 해외이주 사건을 일컫는다. 대기근 시기에 백만 명이 죽고, 백만 명이 해외로 탈출하여 아일랜드 인구의 대략 4분의1이 감소했다.

1845년 갑자기 감자역병이 아일랜드 전역에 발생하며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아일랜드인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감자역병이 대참사의 원인이긴 했으나, 먹을 곡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일랜드의 영국인 지주는 아일랜드인을 소작인으로 부리면서 많은 밀과 옥수수 등을 수확했으나 전량 영국으로 가져갔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감자역병으로 감자가 수확되지 않아 아일랜드인이 재앙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영국인 지주나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거둔 곡식을 아일랜드에서 풀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아일랜드인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거나, 굶어 죽거나, 국외탈출의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유럽의 빵 바구니’에서 발생한 대기근

비슷한 유형의 대기근이 약 1세기 뒤에 세계의 곡창이자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 영화 <미스터 존스(Mr. Jones)>는 이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소재로 한 극영화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비교적 소상히 알려졌고, 영화나 소설의 직간접 소재로 많이 활용된 반면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여전히 실체에 관한 논란이 존재한다.

영화는 ‘가레스 존스’(1905~1935)라는 영국 저널리스트의 우크라이나 대기근 취재 전후를 다룬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홀로도모르(Holodomor)’로도 표현되는데, ‘기아’라는 뜻의 ‘홀로도(Holodo)’와 ‘죽음’이란 뜻의 모르(mor)가 합쳐진 우크라이나 말이다. 1932~33년 옛 소련의 자치공화국인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으로 약 350만 명이 아사한 사건을 지칭한다. 사망자 규모는 관점에 따라 이 숫자의 2~3배까지로 늘어난다. 아일랜드 대기근과 마찬가지로 ‘홀로도모르’ 시기에 우크라이나 인구의 4분1 가량이 감소했다는 분석도 있다.

 

영화는 ‘홀로도모르’를 최초로 보도한 존스(제임스 노턴)의 취재기를 통해 ‘홀로도모르’를 조명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 나가는 와중에 스탈린이 그곳에서 생산된 곡식을 모두 수출해 산업화에 쏟아부었다는, 즉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인의 아사(餓死)를 유발했다는 사실상 학살이라는 견해에 동조하는 듯하다. 이러한 반(反)스탈린적 분석은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공식적 입장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932~33년의 대기근을 재조사하여 당시 ‘대학살’과 가레스 존스의 기사가 모두 사실이었음을 공표했고 2008년에는 가레스 존스에게 사후 훈장을 수여했다. 키예프에 있는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 대학 저널리즘 연구소는 2019년 ‘가레스 존스 메달’을 제정하여 ‘홀로도모르’ 연구에 기여한 기자, 학자, 출판사 등에 수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홀로도모르’는 아일랜드 대기근처럼 인간의 악의에 의한 의도한 학살, 혹은 최소한 방조한 학살이란 설명은 진실일까. 아일랜드에서 많은 영국인 지주와 영국 정부의 악의가 2백만명의 아일랜드인을 고토에서 죽이거나 몰아내었다면 약 100년의 시차를 두고 우크라이나에선 독재자 한 사람의 악의가 그보다 많은 우크라이나인을 굶겨 죽였다는 주장은 진실일까. 이 사건에 스탈린과 소련 공산주의 관료의 악의 혹은 의도가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홀로도모르’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악의나 의도에 의한 것이었는지, 또는 무능과 부패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존스의 우크라이나 취재는 분명 진실을 추구한 기자정신의 발로였지만, 그의 취재는 르뽀라는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현상을 포착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고, 죽음을 무릅쓰며 용기를 발휘한 행위는 저널리스트의 귀감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가 현상을 적시하였을 뿐 현상의 원인을 취재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의 기자정신에 비추어 명확히 부언되어야 한다.

 

고통에 공감하기

‘홀로도모르’가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 실패와 무능에 의한 것이었는지, 스탈린이란 독재자의 상상을 불허할 악의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저널리즘 나아가 아카데미즘에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긴 하지만 ‘홀로도모르’란 역사 자체로 보면 무익한 논의일 수 있다. 사람들을 먹여 살릴 곡식이 있었지만 어쨌든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일랜드와 달리 우크라이나엔, 혹은 소련 전체로는 그러한 수요를 감당할 곡식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영화에서 그렸듯 굶주림에 시달리다 사람까지 잡아먹은 참담한 상황이 빚어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많은 이가 대서양을 건너지 못하고 수장됐지만 아사 지역을 탈출할 기회라도 부여된 아일랜드와 달리 1932~33년의 우크라이나는 봉쇄됐다. 따라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거나, 굶어 죽거나, 국외탈출의 세 가지 선택이 가능했던 아일랜드인과 달리 우크라이나인은 하느님의 도움으로(혹은 스탈린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거나, 굶어 죽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만이 가능했다.

당시 모스크바의 외국 기자들은 소련 정부에 협조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면서 기사를 계속해서 쓰거나, 존스처럼 죽음을 감수하며 사실을 전달하고 모스크바에서 쫓겨나는 두 가지 선택을 앞에 두었다. 존스는 운이 좋았던 사례이고, 존스의 동료 기자처럼 존스의 길을 선택했다가 총에 맞아 죽는 제3의 선택이 있긴 했다. 존스가 자신의 30살 생일을 하루 앞둔 1935년 8월 12일에 내몽골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니 사실 모스크바의 기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밖에 없었다고 해야겠다. 쓰고 죽거나, 침묵하며 살거나.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은 “자신의 이상, 젊음, 용기만으로 잔혹한 현실에 맞서 연속적인 지옥의 순환에 들어가는 존스의 모든 메커니즘을 간단하고 솔직하게 설명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홀란드 감독은 “가짜 뉴스, 대안적 현실, 언론의 부패, 정부의 비겁함, 사람들의 무관심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실은 시대를 초월한 오늘날의 이야기”라며 “여전히 부패한 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 그리고 이기주의자들이 가득한 반면 오웰과 존스 같은 사람이 부족한 현실을 지적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현재에 다시 꺼냈다”고 제작동기를 밝혔다.

 

영화에선 존스가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 월터 듀란티(피터 사스가드), 조지 오웰(조셉 묠)과 각각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지 오웰과 만남이 실화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두 대화에서 존스의 상대가 공통적으로 얘기한 단어는 ‘맥락’이었다. 당시 사회주의에 우호적이었던 지식인들이 품은 사고의 틀과 관련된다. 거대한 시대정신이 진행하게 되면 어쩌면 약간의 퇴행과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 퇴행과 부작용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시대정신의 전진을 성원해야 한다는 취지로 ‘맥락주의’ 사고를 요약할 수 있겠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도 ‘맥락주의’는 상당한 힘을 얻고 있다. 참고로 조지 오웰은 나중에 소설 <동물농장>을 발표하며 ‘맥락주의’에서 이탈한다. 혹은 조지 오웰이 ‘맥락주의’에서 이탈했다기보다 소련이 맥락을 잃어버렸다고 말해야 할까.

시대정신의 전진을 응원하고 수용할 때 어느 수준의 일시적 퇴행까지 용납할 수 있는 것일까. 복잡한 논의이지만, ‘홀로도모르’가 ‘맥락주의’의 일시적 퇴행에 속하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은 확실하다. 영화 <미스터 존스>를 스탈린의 만행에 초점을 맞춰서 보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 목격된 거대한 비극적 사건과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당시 소수 지식인의 무력했지만 의미 있는 분투에도 주목하면 좋겠다.

더 본질적인 핵심은 영화에서 흑백으로 보여준 ‘홀로도모르’이다. 부당하게 주어진 다중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그 고통의 이유를 찾는 인간적 노력에 주목하는 것, 두 가지를 유의하며 감상할 것을 제안한다. 홀란드 감독이 언급한 대로 가레즈 존스와 조지 오웰에 더 유의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감상법이긴 하지만, 그들의 출발점 또한 ‘공감’과 ‘인간’에서 찾아진다.

 
 
글·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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