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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련을 통해 깨달은 생명사랑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시련을 통해 깨달은 생명사랑
  • 정재형(문화평론가)
  • 승인 2021.01.18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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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뉴스 데이 Les Innocentes>(2016)의 원제는 ‘무고한 자들’이라는 뜻의 ‘Les Innocentes(The Innocents)’ 이다.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러시아군인들에게 강간 당해 임신한 폴란드 수녀들을 소재로 한다. 그들은 무고한 자들이란 뜻이다. 임신함으로써 순결서약을 어긴 죄를 지었지만 그들 의지가 아닌 관계로 무고하다는 의미일 게다. 그 만큼 이 영화는 논쟁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럴듯하게 의역한 ‘천주의 어린 양’ 즉, 라틴어 ‘아뉴스 데이(Agnus Dei)’도 그런 의미다. 죄지은 자들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예수를 상징하는 희생양은 예수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진 모든 신도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순결한 딸들로 자처한 수녀들이 임신을 했다면 그건 괴로운 정도가 아니라 한시도 살고 싶지 않은 그들의 십자가다.

 

예수 수난을 몸으로 익히는 수녀들

영화의 후반부 원장이 더 이상 아기를 유기하지 못하도록 감독수녀가 아기를 안고 살려야겠다는 말을 전달하는 한다. 원장과 감독수녀는 심하게 대립한다. 둘의 팽팽한 대립과 갈등의 느낌이 화면 구도를 통해 묻어난다. 화면 왼쪽에는 원장, 오른쪽에는 책임수녀가 아기를 안고 있다. 이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흰색과 검은 색의 대비다. 수녀의 머리와 몸을 감싼 검은 색과 이마에서 목부분을 감싼 작은 부분 흰색, 그리고 커텐이 걷힌 창문과 그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은은한 불빛.

수녀 옷에서 검은 색은 어둠, 죽음, 강직함 등 의미를 갖는다. 성서적으로 확장하면 예수 수난이다. 수녀들은 검은 옷을 입음으로써 예수와 혼연일체가 된다. 수사들은 예수 몸을 입음으로써 예수 수난의 고통과 희생적인 죽음의 숭고한 의미에 동화된다. 반면 흰색이 상징하는 바는 순수, 결백 등 구도자의 내면적 진실성이다. 수녀들은 몸을 바닥에 대고 양 팔, 양 다리를 벌려 마치 십자가 모습처럼 기도를 올린다. 고통스럽지만 이 의식은 십자가 체험을 수시로 하는 수사들의 기본적인 행동이다.

책임수녀가 안은 아기 강보도 하얀 색이다. 검은 색 규율속에서 일탈하여 하얀색 순수 세계로 빠져 들어간 아기를 덮은 색은 구원과 생명 색으로 의미매김 된다. 그러한 탈출의지는 후경에 제시된 열려진 창문과 흘러들어오는 미미한 빛의 동조로 더욱 강화된다. 안의 어둠과 밖의 밝은 자유를 연결시킨다. 실내는 검고 밖은 하얕다. 흰색과 검은 색 대비는 수녀들의 몸을 통해, 또 실내와 실외의 빛을 통해 암시된다.

 

인간을 시험하는 역사의 시련들

마침내 원장수녀는 아기를 바구니에 담아갖고 나가서 큰 십자가상이 있는 산길에 유기한다. 원장은 아기를 십자가의 예수상 바로 앞에다 놓으면서 기도를 바친다. 그녀에게서 이 방법은 최선이다. 만일 아기를 수도원에서 키운다면 나중에라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고 그때 수도원의 명성은 끝장이 난다. 그러니 원장의 입장에서 수도원을 살리고자 한다면 아기를 유기해야만 했다.

원장도 고뇌한다. 그녀라고 아기를 두고 처음부터 냉정했던 것은 아니다. 생명을 떨구는 일이 기계적으로 될 수는 없다. 원장 역시 많은 고민을 거듭하면서 내린 결정은 다수의 수녀들과 수도원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고육책인 것이다. 이 장면은 그러한 비장함이 드러난다. 화면 왼쪽과 오른쪽은 완전히 대비된다. 왼편에는 거대한 고목이 울창하게 서있다. 오른쪽은 잡초들만 늘어선 평지다. 그 중간에 십자가가 서있고 그 앞에 아기 바구니를 내려 놓은 원장이 자리한다. 그녀는 수도원의 우두머리로써 권위적이지만 이 장면을 보면 원장의 권위는 사라지고 없다. 왜소하게 후경에 위치하고 작은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다. 이 장면에는 왼쪽으로 상징되는 채움과 오른쪽으로 상징되는 비움의 가운데 공간에 아기, 수녀, 십자가의 세 요소가 자리하고 있어 긴장감을 자아낸다.

원장의 뒤에서 마치 원장 마음의 그림처럼 제시되는 헝클러진 관목숲, 그건 정리되지 못한 채 굳건하게 그녀를 받치는 고집스러움, 완고함 같은 느낌이다. 반면 정 반대에 놓여 있는 빈 공간의 미덕. 그것은 세속적인 판단의 이면인 평온, 고요, 섭리를 암시한다. 화면의 중앙 앞에서 뒤로 그어지는 산길은 인간이 걸어갈 수 있는 선택의 진로를 말한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 마치 성서에 나오는 욥기의 한 대목과도 같다. 하느님의 명령대로 아들을 제단위에 바친 욥의 갈등과 고뇌를 상징한다. 그건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하느님의 시험과 인간의 선택. 인간은 하늘의 뜻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의적으로 인생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 항상 인간은 선택하고 그 결정의 순간은 이 장면처럼 긴장된다. 우리의 삶은 그러한 선택의 연속이 아닐까.

 

영화는 수녀들의 죄 보다도 그들이 잉태한 생명에 대한 인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은 생명을 얻게 되었고, 그 생명에 대해 사유한다. 처음엔 자신의 생명이라 생각하지 않고 불결한 존재로만 여겨졌을 테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세상에 떨어져 나온 불쌍한 존재인 어린 영혼에 대해 그들은 동정심을 갖는다.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몰래 길에 갖다 버린 수녀원장의 노회한 행위 보다도 젊은 수녀들의 동정심은 모든 생명에 사랑을 부여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성애에 대한 깨달음으로 비유된다.

심지어 한 수녀는 아기를 양육하기 위해 수녀원을 나와 환속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영화는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수녀원에서는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출산 이후 오히려 깨달음을 얻었고, 속세에 나와 사랑을 실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건 하늘의 뜻이 멀리 있지 않고 나와 이웃과 이곳에 있다는 것이 아닐까.

 

 

글·정재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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