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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특별한 기억의 도시 나가사키 (2)
[이혜진의 문화톡톡] 특별한 기억의 도시 나가사키 (2)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1.02.01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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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평화기념상-출처: 壁紙.com
나가사키-평화기념상-출처: 壁紙.com

4. ‘기도의 나가사키’와 평화공원

나가사키 시 중심부에 위치한 ‘평화공원’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원자폭탄 폭심지에 건립된 ‘원폭중심공원’과 그 주변에 있는 ‘원폭자료관’을 하나의 세트로 묶어서 들러볼 것을 추천한다. 그 주변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우라카미 천주당과 우라카미 형무소, 그리고 나가사키 형무소 터에서도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 ‘에놀라 게이’가 투하되었음에도 일본군의 저항이 멈추지 않자 이어서 8월 9일 11시 2분 미국은 두 번째의 원폭 ‘리틀보이’를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이 사건은 원폭의 파괴력이 전례 없는 파멸을 초래하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무조건 항복 카드를 내밀었다.

처음에 미국은 무기공장들이 집중되어 있는 고쿠라(小倉)에 원폭을 투하할 예정이었으나 당일 고쿠라의 기상악화로 인해 원폭 투하 지점을 나가사키로 바꾼 것이었다. 나가사키는 제2의 목표지였기 때문이다. 원래의 원폭 투하 목표지점은 ‘나가사키 조선소’가 있는 항구였으나 당시 나가사키 상공에 깔린 짙은 구름으로 인해 원폭이 예정 궤도를 벗어나 우라카미 지역에 낙하했다.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는 약 75,000여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나가사키 인구가 약 24만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약 30% 이상이 이날 동시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여기에 원폭 투하 이후 방사능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까지 합하면 희생자의 수는 약 14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나가사키의 ‘평화공원’은 또 다시 이런 자멸적인 전쟁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원폭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핵무기의 궁극적인 폐기와 세계평화의 기원을 담아 조성되었다.

‘평화공원’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평화의 샘’이 보인다. 이것은 원폭 투하 당시 뼛속까지 파고든 화상으로 살이 타들어가는 아픔보다 오히려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숨져갔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써, 시시각각 변화하는 물줄기의 모양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의 날개 짓을 표상하는 동시에 이른바 ‘학의 항구’로 불리는 나가사키 항구를 상징한다. 공원의 한가운데는 나가사키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평화기념상’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평화기념상’은 나가사키 출신의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西望)가 5년간의 제작기간을 거쳐 1955년 8월에 완성한 높이 9.7m, 무게 30t에 이르는 거대한 인간 모습을 한 청동상이다. 동상의 뒷면에는 “오른손은 원자폭탄을 가리키고, 왼손을 평화를, 얼굴은 전쟁 희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기타무라 세이보는 “하느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를 슬로건으로 하여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원폭의 위험성’을, 수평으로 뻗어있는 왼손은 ‘평화’를, 지그시 감고 있는 두 눈은 ‘원폭 희생자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전한다. 현재까지도 이 거대한 ‘평화기념상’ 앞에 헌화를 하면서 원폭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8월 9일로 지정되어 있는 ‘나가사키 원폭의 날’에는 매년 이 ‘평화기념상’ 앞에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나가사키의 원폭중심공원-출처: 교보생명 공식블로그
나가사키의 원폭중심공원-출처: 교보생명 공식블로그

한편 원자폭탄 폭심지에 건립된 ‘원폭중심공원’은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 75,000명의 명단이 새겨진 추모비로 유명하다. 이곳에 가면 두 손으로 추모비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나가사키의 폭심지는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약 500m 떨어진 지점이었다. 우라카미 천주당은 메이지 유신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천주교인들이 1925년에 건립한 것으로써,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딴 건축물이었다. ‘원폭중심공원’ 안에는 불에 그을려버린 우라카미 천주당 벽돌 기둥의 일부만 남아 있을 뿐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우라카미 천주당은 1959년에 이전하여 재건된 것이다. 성당 내부에는 원폭 투하 당시 잔해로 남은 성상(聖像)들이 전시되어 있고, 성당 외부에 머리와 몸채가 떨어져나간 천사상과 잔해로 남은 돌조각들을 전시해 둠으로써 당시의 참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가까스로 참변을 면한 이 성당의 ‘안젤라스의 종’은 현재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나가사키 피폭의 공포를 ‘기도’를 통해 극복한다는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나가사키는 일본 가톨릭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하여 약 600여 명의 나가사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를 했고, 또 크고 작은 성당들이 모여 있는 우라카미 지역은 예부터 가톨릭교도와 피차별 부락민의 거주지였던 탓에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은 가톨릭교도들이 받았던 핍박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나가사키 출신의 의사이자 작가인 나가이 다카시(永井隆: 1908-1951)는 항상 중요하게 거론되는 인물이다.

나가이 다카시-출처: 한겨레21
나가이 다카시-출처: 한겨레21

일찍부터 나가이는 방사선 치료 연구에 매진해왔었는데 그로 인해 1945년 6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이후 1945년 8월 원폭으로 머리를 크게 다쳐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피폭 환자들을 돌보고 작가로서의 역할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신앙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지켜가는 일에 투신했다. 특히 1949년 1월에 출간된 그의 첫 번째 저서 나가사키의 종은 1948-1951년까지 불운이 연속되는 가운데서 어렵게 자신의 피폭 경험을 기록해간 책이다. 이 책은 원폭을 둘러싼 언급 자체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던 미군정 시기에 서술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병마로 인한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해가면서 자신의 피폭 경험을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써내려간 책이라는 점에서 현재까지도 가톨릭교도들의 필독서로 통한다. 이렇게 나가사키의 원폭 경험은 특별히 가톨릭교도들의 희생이 컸던 데다가 일본 내부에서도 히로시마의 원폭 경험에 비해 비교적 소극적으로 인식되면서 은인자중(隱忍自重)의 이미지로 통하고 있는 탓에 ‘분노의 히로시마’와 ‘기도의 나가사키’라는 이미지 구도를 양산해내고 있다.

군함도-출처: 조선일보
군함도-출처: 조선일보

5.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 군함도

최근까지 ‘군함도’는 한국에서 출간된 어떤 일본 여행 관련 책자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군함도’는 나가사키 여행의 필수코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가사키 항구에서 약 18.5km 거리에 위치한 ‘군함도’는 그 모양이 일본 전함 ‘도사(土佐)’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일본에서는 ‘군칸지마’ 혹은 해안선이 쭉 뻗어있다는 뜻에서 ‘하시마(端島)’라고도 불린다. 과거 일본에서 이 섬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이유는 ‘메이지 산업혁명의 유산’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1810년 무렵 이곳에서 양질의 석탄이 발견되면서 1870년 경 사가번(佐賀藩)이 소규모로 석탄을 채굴하기 시작한 이래, 1890년 미쓰비시가 탄광 경영권을 인계받으면서 본격적인 석탄 채굴이 시작되었다. 깊이 약 1,000m에 이르는 해저탄광에서 채굴된 양질의 석탄은 1890년부터 1974년 폐광에 이르기까지 조선과 제철분야에 이용되면서 일본의 산업 근대화에 크게 공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찍이 작은 인공섬에 불과했던 ‘군함도’는 1897-1931년에 걸쳐 총 여섯 번의 매립공사를 통해 남북으로 480m, 동서로 160m, 면적 6.3ha로 확장되어갔다. 군함도의 내부는 일본 최초로 콘크리트 아파트가 들어서고 수영장과 학교, 점포, 병원, 영화관까지 갖춘 하나의 계획도시로 탈바꿈해갔다. 일본의 고도경제성장기 무렵 인구가 절정에 달했던 1960년에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컬러 TV가 보급되었고 모든 주민들에게 콘크리트 아파트가 제공되는 등 최고의 특혜가 주어지자 이 작은 섬에 총 5,267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기도 했는데, 이 비율은 당시 도쿄 23구 총인구의 9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나가사키 항구에서 배를 타고 약 40분을 나가야 도착할 수 있는 이 작은 섬에서 1,000m의 해저로 내려가 석탄을 채굴하는 이 위험천만한 일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는 것은 그 만큼 일본의 산업 근대화에서 석탄이 차지하는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석탄의 자리를 석유 에너지가 대체되기 시작되면서 1974년 1월 15일 폐광되었다. 폐광 이후에도 ‘군함도’는 미쓰비시가 소유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나가사키 시의 시유지가 되어 일반을 상대로 관광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군함도-출처: 연합뉴스
군함도-출처: 연합뉴스

폐광 이후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죽음의 도시(Dead City)가 된 ‘군함도’는 줄곧 일반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가 2005년 8월 23일 기자들에 한해 특별 상륙을 허가함으로써 완전히 폐허가 된 섬의 면면들이 매체에 소개되면서 새롭게 알려졌다. 이후 2009년 4월 22일부터 미리 정비된 일본인 거주지 시설 등 ‘군함도’ 남부구역의 견학통로에 한해서 관광객의 방문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나머지 구역은 공개하지 않고 있는 탓에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현장은 접근이 불가능하다. 관광이 허용된 지 한 달 만에 4,500명이 넘는 인원이 ‘군함도’를 방문한 이래 ‘군함도’는 일본 산업 근대화의 기억을 호출하는 장소로 활용되면서 2015년 7월 5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나가사키는 <군함도(군칸지마)>라는 이름을 붙인 술을 비롯하여 석탄 비스킷과 티셔츠 등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하기 위한 관광 상품들을 지속적으로 출시하면서 ‘군함도’를 세계에 알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메이지 산업혁명의 상징인 ‘군함도’의 빛나는 영광의 이면에는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강제노역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 당시 이곳에 수용된 조선인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무작위로 끌려온 사람들과 나가사키 형무소에 수감된 죄수들이었던 탓에 고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가혹한 처우가 정당화되었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1940-1945년까지 약 800여 명의 조선인들이 바닷물과 가스가 흘러드는 비좁은 해저탄광의 700-1,000m까지 내려가 석탄 채굴에 동원되곤 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에게 ‘군함도’로 들어가는 통로는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지옥문”으로 통했고, 또 열악한 생활과 노동환경으로 인해 ‘군함도’를 ‘지옥섬’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심지어 10대 초중반의 소년들조차 하루에 깻묵 2개를 배당받으며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작업복도 없이 비좁은 공간에서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12-15시간의 고된 노동에 시달렸으며 잦은 갱도 붕괴 사고로 매일 죽어나가는 조선인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는 증언이 전해지기도 한다.

‘군함도’ 탈출을 시도한 조선인들도 다수 있었지만 험난한 파도에 휩쓸려가거나 중도에 발각되어 총살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기껏 바다를 건너 탈출에 성공하더라도 한창 전쟁 중에 있는 일본 본토에 도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는 ‘군함도’에 있던 조선인들이 석탄을 채굴하던 곡괭이 대신 청소도구들을 들고 폐허가 된 나가사키 시내를 청소하는 데 다시 동원되었다. 당시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2만여 명이었는데 이 중 1만여 명이 원폭으로 희생되었다. 이렇게 원폭 피해와 강제동원으로 이중 삼중의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로서는 ‘군함도’를 둘러싼 일본 정부의 홍보를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시민모임’과 같은 일본 내부의 진보단체들은 “한국인 피폭자가 전체의 10%로 추산되는 만큼 일본 정부는 피폭 한국인에 동등하게 지원해야 한다”라고 촉구를 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이 문제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군함도’의 잔혹한 역사에 대해 한국인들의 무관심 역시 중요하게 지적될 문제다. 약 27년간의 실증적 고찰을 통해 2016년에 재탄생한 한수산의 장편소설 군함도와 2017년에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군함도>를 통해 한국에서도 ‘군함도’에 대한 본격적인 고증과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낼 움직임이 기대되었지만 신통한 결과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이처럼 나가사키는 메이지 일본 산업 근대화를 이끈 역사적 현장이자 일본 산업혁명의 명암을 간직하고 있는 유산이자 강제동원이라는 국제적 문제들과 일본 가톨릭교도를 둘러싼 독특한 역사 등을 파노라마처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일본의 여행지라고 할 수 있다.

 

 

* 이 글은 <작가마당> 2016년 하반기호에 게재된 것을 수정하여 1·2부로 나누어 게재한 것이다.

글·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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