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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포츠영화와 군사독재의 그림자-<이장호의 외인구단>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포츠영화와 군사독재의 그림자-<이장호의 외인구단>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1.02.0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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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의 외인구단' 포스터.
'이장호의 외인구단' 포스터.

스포츠영화의 핵심 서사는 스포츠 경기 및 관련 인물의 행적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선수와 지도자가 땀 흘려 훈련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경기를 치르고, 승패에 울고 웃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한다. 이때 스포츠 종목이 무엇인가보다 인물의 성격에 따라서 주제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승패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훈련 과정, 인물 간의 갈등과 극복, 그로 인한 인물의 내면 변화를 강조한다. 스포츠영화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 사회, 젠더를 포함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이는 스포츠영화가 대중의 이데올로기에 민감한 상업영화이자 장르영화이므로 당연한 현상이지만, 스포츠라는 소재의 특성상 이러한 측면을 간과하기 쉽다. 시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투영되어 있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장호의 외인구단>을 꼽을 수 있다.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은 이현세의 빅히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각색한 작품이다. 각색의 관점에서 보면, 원작의 인물과 스토리를 거의 그대로 옮겨온 ‘충실한 각색’의 영화에 해당한다. 그런데 영화화 과정에서 만화의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공포’가 ‘이장호’로 바뀌었다. 당시 심의기관이 ‘공포’라는 단어로 인해 군사정권의 부정적인 성격이 부각된다는 이유로 제목 변경을 요구했고, 제작사는 감독의 인기를 활용하기 위해 ‘이장호’로 바꿨다고 한다. 영화 제목에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얼룩져 있는 셈이다.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1982년에 출범한 프로야구를 소재로 한다. 5공 군사정권은 정통성 부재라는 약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3S정책을 포함한 다양한 제스처를 취했고, 그중 하나가 스포츠의 활성화였다. 프로야구, 프로축구와 프로씨름(1983년)은 이러한 시대적 맥락에서 출범하였다. 또 1980년대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등 국가 차원의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쏟아졌다. ‘스포츠공화국’으로 불리는 5공 군사정권의 스포츠 진흥 정책에 의해 출범한 프로야구는 단기간에 최고 인기 종목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대해 강준만은 프로야구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겪은 국민들에게 “심리적 도피처나 한(恨)풀이의 수단”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장호의 외인구단>에는 스토리 및 인물에도 군사문화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외인구단은 부상, 운동 능력, 키, 혼혈아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 팀에서 쫓겨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손병호 감독 역시 독특한 스타일과 고집 때문에 감독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그는 오혜성, 백두산 등의 선수들을 모아 외인구단을 구성한다. 그리고 지옥훈련을 통해 선수들을 조련한다. 그런데 그의 강압적인 훈련과 일방적인 팀 운영 방식은 군사독재정권 지도자의 통치 스타일과 매우 비슷하다. 승리지상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점도 ‘하면 된다’와 헝그리정신을 강조하던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무인도에서 진행된 지옥훈련 장면.
무인도에서 진행된 지옥훈련 장면. <영화 캡처>
선수들이 무인도에서 갯벌 포복 훈련을 하는 모습.
선수들이 무인도에서 갯벌 포복 훈련을 하는 모습. <영화 캡처>

 

손병호 감독은 실패자, 낙오자, 아웃사이더인 선수들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지옥훈련을 실시한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을 강조한다. 무인도에서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정신력의 힘은 무한하다. 이제 남은 것은 너희들의 비장한 결심뿐이다. 한 팔 가진 사람이 두 팔 가진 사람들을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갖기 전에는 결코 살아서 이 섬을 나갈 생각을 말아라.”라고 훈시한다. 손병호 감독에게 훈련은 목숨을 건 비장한 행동이며, 경기는 전투와 다름없는 행위이다. 그에게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손병호 감독은 승리를 쟁취하는 비결은 오직 강한 힘이며, 그 힘의 출발점은 강인한 정신력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만화와 영화에 등장하는 손병호 감독의 훈련 방식은 당시 프로야구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로야구 구단들이 선수들의 정신력 강화를 위해 오대산이나 저수지에서 극기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 내용도 얼음물 입수, 10km 산악 구보, 50km 산악 행군, 맨발로 눈길 걷기처럼 혹독한 것이었다. 또한 1980년대에는 고등학교 학생들도 교련 시간에 군사 훈련을 했고, 대학생들은 전방 부대에 입소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 삼청교육대도 빼놓을 수 없다. 전두환은 권력을 잡자마자 사회 정화라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는데, 대상자들은 군부대에 입소해 가혹한 훈련을 받았다. 1980년대에는 군사 문화가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것이다.

손병호 감독은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방식으로 선수들을 이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지옥훈련을 통해 선수들을 조련한다. 반면 선수들의 내면에는 무관심하다. 선수의 진정한 욕망에 무심하고,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고, 승리라는 목표 달성에만 집착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까치’ 오혜성이 왜 외인구단에 합류했는지, 무엇 때문에 승리를 쟁취하려고 하는지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불화밖에 없다. 그는 오직 명령하고 지시할 뿐이다.

손병호 감독은 강압적이고 냉정하며, 상명하복의 군대식 질서를 선택한다. 채찍과 지팡이, 주먹으로 선수들을 마구 때리고, 모든 사항을 독단적으로 결정한다. 손병호 감독의 리더십은 1980년대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과 맞닿아 있다. 1980년대는 박정희에 이어 군인 출신의 집권자들이 군대식 리더십으로 국가를 통치하던 시기이다. 그들은 수직적인 지휘 체계 속에서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고,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국민들의 내적인 욕망을 폭력으로 억압했다. 손병호 감독은 군사독재정권의 지도자에 대응하는 리더인 셈이다.

 

'이장호의 외인구단' 스틸컷.
'이장호의 외인구단' 스틸컷.

그 결과, 손병호 감독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오혜성이 코리안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서 첫사랑 엄지를 위해 패배를 자초한 탓이다. 오혜성은 엄지의 남편이자 라이벌인 마동탁이 친 타구에 맞아 실명한다. 우승의 꿈도 물거품이 된다. 손병호 감독이 이끄는 서부구단은 50연승 대기록과 코리안 시리즈 진출이라는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지만, 결국 최종 목표인 코리안 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한다. 이 지점에서 숨겨져 있던 손병호 감독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난다. 강인하고 거친 이미지로 선수들을 지휘했지만, 그는 사실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손병호 감독은 감독직에서 해고된 직후 가슴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며, 코리안 시리즈 우승에 실패한 뒤 텅 빈 관중석을 통해 퇴장하다가 다시 가슴을 움켜쥔 채 비틀거린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라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그의 심장(내면)은 심각하게 병들어 있었던 것이다.

손병호 감독의 몰락은 1980년대 후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전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폭력과 억압, 불통의 리더십으로 국민들을 지배한 군사정권 지도자의 파멸에 대한 예고편이 된 셈이다. 결국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1980년대에는 대중문화와 스포츠계에 군사 문화가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스포츠영화이며, 손병호 감독의 행적은 군사정권의 부침에 대한 메타포로 읽을 수 있다.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스포츠영화의 인물과 서사를 통해 시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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