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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고전산책] 모든 이상주의자는 플라톤에 빚지고 있다
[안치용의 고전산책] 모든 이상주의자는 플라톤에 빚지고 있다
  • 안치용(문화평론가)
  • 승인 2021.03.1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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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국가>2

플라톤이 생존한 시기에 여자는 전적으로 대상화한 존재, 혹은 온전한 타자였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아테나이에서 여자는 정치를 할 수 없었다. 여자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처럼 악처가 되든지, 아니면 훌륭한 통치자를 낳는 생식기계가 되든지 정도의 주변적 역할만을 수행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성과 노예 사이의 차이는 미미했다.

플라톤은 혈통을 이야기하면서 재미있게도 개를 거론했다. 혈통에 있어서 개와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관점인데, 현대 유전공학이 알려주는 지식으로도 (물론 관점 차이가 존재하지만) 개와 사람은 대동소이한 생명체이다. 플라톤의 암묵지적인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이상주의에 깃든 우생학의 불길한 그림자

철인통치와 관련하여 혈통 문제는 이제 양가성을 드러낸다. 개인의 혈통을 부정한 플라톤이 집단의 혈통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개 종자를 개량해 우수한 견종을 만들어내는 동물학자의 태도와 흡사하다. 혈통과 관련하여 인간과 개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은 플라톤의 태도에서 그를 열린자유주의자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인간개량의 의지를 표명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우생학이 연상되면서 다시 예의 전체주의 그림자를 호출하게 된다.

 

최선의 남자들은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자주 성적 관계를 가져야 하지만, 제일 변변찮은 남자들은 제일 변변찮은 여자들과 그 반대로 관계를 가져야 하고, 앞의 경우의 자식들은 양육되어야 할 것이로되, 뒤의 경우는 그럴 필요가 없다네. 젊은이들 중에서도 전쟁이나 다른 데서 빼어난 사람들에겐 아마도 포상과 그 밖의 상의 주어져야만 하며, 여자들과의 한결 잦은 동침의 자유가 허용되어야만 하겠는데, 이는 이걸 핑계로 동시에 최대수의 아이들을 이런 사람들한테서 얻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서일세. 빼어난 자들의 자식을 받아서는, 이 나라의 특정 지역에 떨어져 거주하는 양육자들 곁으로, 보호 구역 안으로 데리고 갈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반면에 열등한 부모의 자식들은, 그리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의 자식으로서 불구 상태로 태어난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듯, 밝힐 수 없는 은밀한 곳에 숨겨둘 걸세.”(플라톤의 <국가> 5권 중에서)

 

공동체 차원의 질서와 사회 전체의 진보를 희구하는 플라톤의 입장은 진보주의자의 핵심 덕목에 닿아 있다. 공동체 운영원리로서 철인통치는 사적 소유 없는 철인들이 사익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온전히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다는 측면에서 재삼 강조하거니와 특정 혈연 집단의 이익추구에 매몰된 귀족정치하고는 명백하게 달라진다.

그러나 <국가>의 철인통치는 특정 혈연집단의 이익추구로부터는 자유를 획득하지만, 특정 혈연집단 자체의 구속으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인다. ‘이익에서 벗어났지만 종국에 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간단히 말해 철인은 개인으로서 귀족주의를 극복하지만 집단으로서는 의도와 달리귀족주의를 강화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처자공유라는 아이디어가 공동체 전체에서 시행되지 않고 공동체 내에서 집단별로 구분하여 적용되어야 한다는 관점은 안타깝게도 히틀러 등에서 엿보이는 종의 우생학을 연상시킨다. 플라톤은 철인의 후계자를 육성하기 위해 최선의 남자들이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잦은 성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논리로 변변치 않은남자들은 변변치 않은여자들과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다음 단계로서, 최선의 남자들과 최선의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최선가능성이 높은 아이들은 공동체 차원에서 잘 양육되어야 한다. 당연히 개인들이 각자 제 자식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다. 공동체가 아이들을 부모들과 격리시켜 공동으로 양육하는 방식이 적용된다. 최선이 아닌 남자들과 최선의 아닌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불가피하게도 생존의 확률이 줄어들거나 그 기회가 박탈된다. 최선의 남자들과 최선의 여자들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최선가능성이 떨어지는 아이도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우생학과 다윈주의가 작동하는 무시무시한 체제를 상상하게 된다.

 

모자람 있는 인간이 그와 똑같이 모자람 있는 자손을 생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자는 요구는 가장 명석한 이성의 요구이며, 그 요구가 계획적으로 수행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인간적인 행위를 뜻한다.”

--“나의 투쟁”, 아돌프 히틀러 지음, 황성모 옮김, 동서문화사, 2014, 385

 

인용문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가져온 것이다. ()과 민족의 요구를 최상위 가치로 수용한 나치는 인류역사에서 최악의 전체주의 사례로 간주된다. 시간순서를 무시하고 말하면 플라톤의 철인통치 집단 구상에 히틀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사실이다. 거기에다 비록 순진한 수준이긴 하지만 정치공작적인 사고까지 가미된다. 즉 동침과 관련하여 교묘한 제비뽑기 또는 정교한 추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추첨을 조작하면 저 변변치 않은 사람들이 운을 탓할 뿐, 통치자들을 탓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추첨을 조작해서 최상의 남자들이 최상의 여자들과 많이 잘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고, 다른 이들은 ,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플라톤과 히틀러를 같은 부류로 묶는다면 언어도단이다. 히틀러가 순도 100%의 전체주의를 지향했다면 플라톤은 단지 이상적인 공동체를 구상했다. 플라톤의 구상에 어쩔 수 없이 히틀러적인 요소가 섞여 들어갔을 뿐이다. 비록 그것이 같은 성분이라고 하여도 히틀러에겐 100%로 나타나고, 플라톤에겐 10% 미만으로 나타나, 플라톤의 사상은 히틀러와는 판이하게 다양한 성상을 풍성하게 발휘할 수 있는 합금으로 변형된다고 보아야 한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의 사상은 전혀 다르다.

히틀러의 거대한 근대국가 독일과 인구 21만여명의 소규모 정치공동체인 플라톤의 아테나이는 규모 외에도 많은 측면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에 두 사람의 사상 또한 각각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플라톤이 살던 시대는 전쟁이 일상이었다. 노예제 또한 보편적이며, 장애인 인권 같은 개념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인간등급이 확연하고 폴리스 간에 물리적인 충돌과 다툼이 만연한 시대상황에서 검토된 결과론으로서의 유사 우생학과, 자유ㆍ평등 같은 천부인권이 널리 받아들여져 공식적으론 인간등급이 철폐된 세상에서 공공연하게 주장된 시대착오적인 본격 우생학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단언컨대 플라톤이 시대를 바꿔 히틀러의 위치에 있었다고 하여도 결코 나치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자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데아

이데아는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다. 사회와 정치를 다루는 철인통치 이념에 비해 더 본질적인 철학의 문제를 다룬다. 이데아라는 개념을 통해 무엇보다 플라톤의 세계인식 방법을 이해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데아를 설명하려고 만든 동굴의 비유는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동굴의 비유를 잘 이해하려면 비유 안의 배치를 잘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 비유에서 인간은 빛이 들어오는 동굴의 입구를 등지고 입구 반대편에 놓인 벽을 바라보는 존재로 설정된다. 인간에 관한 설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뒤돌아볼 수 없게 강제돼 있다는 것이다. 동굴 안 인간의 상황이 이렇고, 동굴 밖과 (자기 앞만 바라보게 돼 있는) 인간 뒤편의 상황을 총괄해서 살펴보면, 제일 먼저 불이 환하게 빛나고 있고 그 앞에 실체(이데아)가 놓이며 실체와 인간 사이에 막 같은 게 존재한다. -실체-막은 일직선상에 위치한다. 빛을 받은 실체의 그림자가 막을 투과해 동굴벽에 투사되고 인간은 투사된 그 상()을 본다는 게 동굴의 비유의 전체적인 그림이다. 플라톤의 <국가> 본문을 통해 다시 확인해 보자.

 

이를테면,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즉 불빛 쪽으로 향해서 길게 난 입구를 전체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게 가진 그런 동굴에서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게.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만 보도록 되어 있고, 포박 때문에 머리를 돌릴 수도 없다네. 이들의 뒤쪽에서는 위쪽으로 멀리에서 불빛이 타오르고 있네. 또한 이 불과 죄수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가로로] 길이 하나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담(흉장)이 세워져 있는 걸 상상해 보게. 흡사 인형극을 공연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사람들 앞에 야트막한 휘장(칸막이)이 쳐져 있어서, 이 휘장 위로 인형들을 보여주듯 말일세. 이 담(흉장)을 따라 이 사람들이 온갖 인공의 물품들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 또는 그 밖의 온갖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진 인물상()들 및 동물상들을 이 담 위로 쳐들고 지나가는 걸 말일세. 또한 이것들을 쳐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소리를 내나, 어떤 이들은 잠자코 있을 수도 있네. 이상한 비유와 이상한 죄수들을 말씀하시는군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일세. 글쎄, 우선 이런 사람들이 불로 인해서 자기들의 맞은편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들 이외에 자기들 자신이나 서로의 어떤 것인들 본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실상 이들이 일생을 통해서 머리조차 움직이지 못하도록 강제당했다면, 어떻게 볼 수 있었겠습니까?”(플라톤의 <국기> 7권 중에서)

 

동굴의 비유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앞만 보도록 한 설정은, 특정한 방향으로 편향되기 마련인 인간의 사고를 잘 설명한다고 볼 수 있어 매우 적절하다. 일상에서 누구에게나 목격되는 확증편향 같은 현상이 소소한 예에 해당한다. 플라톤의 인간은 자신의 앞 동굴 벽에 펼쳐진 그림자를 보며 실체를 추정한다. 상상해 보면, 인지가 작동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점부터 사지와 몸을 결박당한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이 동굴 안에서 그 상태로 살면서 앞만 보도록 한 것은 인간의 사고체계, 고정관념, 이데올로기 등의 탄생과 작동방식을 함축적으로 설명한다. 앞만 볼 수 있고 머리를 뒤로 돌릴 수 없다는 비유의 원초적 한정은 인간에게 주어진 인식의 틀이자 한계이다.

인간이 그림자만 보는 존재라는 설정과 함께 이 비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장치는 실체와 그림자 사이에 존재하는 막이다. 그리하여 이 막 때문에 인간이 보는 그림자라는 게, 실체든 이데아든 그 무엇의 그림자든 그마저도 직접 투영된 그림자가 아닌 게 된다. 그림자가 막을 통해서 투영되기에 그 막이 만약에 붉은색이라면 비치는 그림자도 붉은 그림자가 된다.

인간의 인식체계 전반을 이해하기 쉽게 구조화한 이 비유는 개인뿐 아니라 집단ㆍ시대 차원에서도 적용가능하다. 막은 개인ㆍ집단ㆍ사회ㆍ시대 차원에서 본원적 인식 한계로 작동한다. 말 그대로 인식의 스크린이다. 이때 막 자체가 판이하게 설정된 혹은 형성된, 개인들ㆍ집단들ㆍ시대들 사이에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인식의 간극이 나타난다. 예컨대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저게 공룡이나 사자냐를 두고 벌이는 토론은 모종의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붉은 막을 투과 한 그림자와 푸른 막을 투과한 그림자의 색깔을 두고는 결코 합의를 도출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동굴의 비유는 기본적으로 무엇이 진리인가를 판정하는 인식론 모델이지만 무엇이 진리인가를 판정하는인간 존재는 무엇인가에 관한 존재론 모델이기도 하다. 즉 평범해 보이는 동굴의 비유에는 인간의 삶, 인간의 존재가 외양상 주체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구성된 것일 뿐이라는 심오한 깨달음이 깔려있다.

수 천 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와 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였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 동굴의 비유에서 가장 놓치기 쉬운 본질적인 논점은,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델에서는 타오르는 불(혹은 빛)이 있어야 한다. 불이 있어야 인식 자체가 성립한다. 안타깝게도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림자밖에 없는데, 그 그림자마저도 실체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만일 실체의 바깥에서 동굴 안으로 비추는 불이 없다면 동굴 안에서 벽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다.

실체와 불 가운데서도 불이 우선한다. 실체가 없고 불만 있다면, 허무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체가 있고 불이 없다면 있음이 있다 하여도 우리는 있음을 볼 수 없게 된다. 세계의 종말, 인식의 종말인 셈이다.

 

이상주의자의 낙관과 성난 얼굴로 뒤돌아보기(look back in anger)

 

동굴의 모델에서 불의 존재는 플라톤의 낙관주의를 방증한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불이 타오를뿐더러 실체, 즉 이데아까지 존재하여 인간은 동굴 안에서 동굴 밖을 탐색할 수 있다. 불이 타오르는 세상이 플라톤이 생각하는 세상이다. 반대로 얼마든지 불이 타오르지 않는 세상을 상정할 수도 있었다.

동굴의 비유로 제시된 인식 모델은 이상주의 모델이다. 동시에 이데아와 현실이 구분될 수밖에 없는 이원론 모델이란 점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어쨌든 희망이란 걸 발견할 수 있다. 희망이란 건 실현가능하기 때문에 품는 것이 아니라, 품을 수 있기 때문에 품는다. 이데아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면 이데아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데아가 존재하기에 희망을 품는다.

동굴 안의 인간이 결박을 풀고 성난 얼굴로 뒤돌아볼 수는 없을까. 그런 드문 예도 있지 않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불교에서는 결박을 풀고 뒤돌아서서 이데아를 직접 본 그 사람은 부처일 것이다. 또는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선지자일 수도 있다.

이데아와 관련된 희망과, 뒤돌아서서 보겠다는 근원을 향한 열망은, 이데아에 직접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여도-거의 대부분 직접 도달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존재와 인식을 향상시키는 데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자신이 특정 방향만을 보도록 구속되어 있으며,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상이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설치된 특정한 유형의 막을 투과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비록 직접 이데아를 보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시선과 자신 뒤편의 막을 감안해 자신의 인식을 조정해 보다 이데아에 가까운 더 나은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철인통치에 대해서는 플라톤도 실현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으리라는 게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이데아에 관한 고찰은 비록 실현가능성을 따질 수는 없지만, 분명 찬반이 대립할 수밖에 없는 모델이란 측면에서, 나는 이 고찰에서 드러난 플라톤의 간절함에 주목하게 된다.

칸트 식으로 말해 인간은 발밑의 진창길을 걸지만 끊임없이 하늘의 별을 보는 존재라고 할 때 이 설명은 이데아를 염원하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몸을 갱신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별을 보는 존재. 인간은 왜 별을 볼까. 별을 본다고 발밑의 남루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왜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별을 볼까.

불이 있고 그 불이 이데아를 비추고 있음을 믿는 한 이데아에 대해 상상하고 파악하기를 멈출 수 없는 그 원천에 대한 열망. 그 열망이 우리가 인간임을 입증하는 근거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분열된 존재로 역사를 일구었는데, 언제인지 모르지만 통일된 존재로서 분열되지 않은 태고의 경험이 있었다고 많은 철학자나 작가들이 상상하듯, 우리는 현존하는 존재ㆍ인식의 분열을 넘어서서 어느 순간 이데아와 접속하는 꿈을 꾼다. 진보주의자의 꿈이다.

그 꿈은 인간 개인이 혼자 꾸는 꿈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꿀 수 있는, 또는 꾸어야만 하는 꿈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진보주의자를 진보주의자로 구별시켜주는 가장 뚜렷한 표식이다. 나 혼자 외롭게 걷는 발걸음이 아니라 더불어 가는 발걸음. 함께라면, 예컨대 어깨 결고 함께 걷는다면 하늘의 별을 보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진창길을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데아에 조금씩 다가설 수 있으리란, 조금 평이한 말로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함께라면 해낼 수 있으리란 믿음. 이 두 가지야말로 진보주의자의 대표적인 덕목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인간 본령에 관한 가장 오래된 진지한 탐색이었다. 분열과 낙담 속에서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이 믿음에 관해선 플라톤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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