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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아의 문화톡톡] 보이지 않는 장애: 비장애 사회의 비정상적 언어와 문화
[김시아의 문화톡톡] 보이지 않는 장애: 비장애 사회의 비정상적 언어와 문화
  • 김시아(문화평론가)
  • 승인 2021.04.05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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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의구심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을 접한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17년을 살았다. 작은 도시였지만 국제적인 도시이고, 프랑스와 독일 문화를 함께 간직하고 있으며, 중세적이고 현대적인 건물이 공존하는 도시다. 도시 외곽까지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있고 시내를 관통하는 트램이 라인강을 건너 독일 켈까지 이어져 있다. 별다른 제약 없이 국경을 쉽게 넘을 수 있었고 장애인부터 비장애인까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이런 환경 덕분이었는지 길을 가다 보면 종종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유유히 걸어가는 시각 장애인들을 종종 보았고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여 전동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는 종종 보았다. 언젠가 트램을 타고 시내 중심으로 갈 때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장치하고 가는 사람도 보았다. 나는 그들을 불쌍하게 바라본 적이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불편한 점이 많을 텐데 용기 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아서 나 또한 씩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국인에 비해 어려움이 많다. 일시적인 언어장애부터 낯선 문화까지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체류증을 받는 것부터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루 것 자체가 매번 삶의 전투였다. 교수의 강의를 다 알아듣지 못해 친구의 노트를 복사해서 복습하며 드문드문 알아듣고 적은 내 노트의 빈 단어를 채워나가며 공부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이 날 불쌍히 여긴적은 없는 것 같다.

2017년 말부터는 내 삶의 공간은 대한민국이고 도서관 시설이 잘되어 있는 서울 근교에서 살고 있다. 주변에 산책로도 잘 되어있고, 살기에 편한데 아직 시각 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을 길거리에서 마주친 적이 없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이동할 때도 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팬데믹 상황이라 그럴까? 우리 사회는 프랑스보다 장애인들이 없는 사회인가? 정신적 장애나 신체 내부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닌 외부 장애를 가진 사람만도 125만에 이른다는데 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을 쉽게 볼 수가 없는가? K-방역, K-문화를 외치며 다른 나라보다 앞서가려고 노력하는 우리 사회는 과연 모두가 함께 조화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형제애 (Fraternité)’ 문화를 가진 사회인가?

 

탈시설을 통한, 모두가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장혜영 국회의원은 2017년 겨울부터 중증발달장애를 가진 한 살 아래 동생 장혜정과 함께 살고 있다. 13세부터 서른까지 17년을 살았던 장애인 시설에서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보호자들을 소집했을 때 사회적 공론화를 덮기 위해 온 부모들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탈시설 활동가의 질문을 통해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자각을 하게 되었단다.

“동생분은 자립 준비 안 하세요?”, “생각을 시설에서 출발하면 한 바퀴 돌아도 다시 시설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데 생각을 동생의 삶에서 출발하면 뭔가 다른 게 보일지도 몰라요. 그 말이 마음속에 박혀서 떠나지 않더라고요.”

그토록 동생을 사랑하면서도 동생의 자립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사랑함에도 차별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장혜영은 인권이 유린당하는 시설에 동생을 두지 않았고 장애인 시설에 대한 ‘탈시설’ 운동을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탈시설이라는 단어는 단지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사는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사회로 돌아온다’라는 개념이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더불어 살 준비가 되어있는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를 꿈꾸는 국회의원 장혜영. 나는 그를 이슬아 작가를 팔로우하다가 알게 되었고 탐욕으로 가득 찬 정치인과 국회의원과는 다른 장혜영 국회의원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의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보기

아이러니하게도 독일 나치 정부는 유대인들과 소수자들을 ‘비인간’이라 규정하며 비인간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1963)에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라며 평범(?)하고 근면(?)하게 보였던 유대인 박해 실무 책임자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에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기계적인 사람을 확인한다.

해방 이후 서양보다 더 서구화된 우리 교육은 분단 이후 경제적 성공을 위한 입시교육으로 치달으며 ‘스스로 생각하기’ 교육을 외면한다. 같은 동족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이 합법이요 통일을 외치면 불법이며 ‘빨갱이’로 낙인찍었던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 대립을 넘어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첨예한 사회다. 그러니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는 교육보다 ‘충과 효’를 강조하며 순종하고 복종하는 '노예교육'을 선호한다.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육은 부재하고 역사보다 수학과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차별과 서열에 의한 수직적인 사회인지 알고 느낄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 완전함과 불완전함이라는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보통’이라는 언어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2019)를 읽다 보니 장애인을 향한 “희망을 가지세요.”라는 표현도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한다고 한다.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작가가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2021)를 읽다 보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나온다.

““불쌍해. 그래도 언젠가 청력을 회복할 기술이 나올 거예요.” 아마도 사람들은 비극적인 현실에 처한 장애인들이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건네는 듯하다. 듣는 입장에서는 조금 당혹스럽기도 하다. 이러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언젠가는.....’ 하는 위로를 들으면 어떡하지? 나쁜 의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김초엽 작가가 했던 인터뷰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본 후 작가 스스로 느낀 당혹감을 고백한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 마음이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향한 수직적인 시선이 아닌가 점검해봐야 한다. 우리는 그저 조금씩 다르게 태어났을 뿐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을 이해하며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되어야 우리는 정말로 ‘K’ 문화가 자랑스러울 것이다.

 

글. 김시아 (KIM Sun Nyeo)

문화평론가. 파리 3대학 문학박사. 대학에서 문학과 ‘그림책의 이해’를 가르치며 <아델라이드>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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