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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 잡초 우거진 황무지의 낭만, 그 심산하고 이상한 풍광
<미나리> - 잡초 우거진 황무지의 낭만, 그 심산하고 이상한 풍광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1.04.06 1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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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 최종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많은 평자와 관객들의 이목이 <미나리>에 집중되었던 시기가 지났다. 그 이후, 북미에서 일어난 아시안 혐오범죄와 맞물리며 <미나리>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동시에 <미나리>는 한국계 이민자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태그 때문인지 (혹은 트럼프가 남긴 상흔 어린 유산 때문인지) <미나리>에 대한 평가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혹은 유목의 삶이라는 주제에서 온전히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시대가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정신과 의제를 전달하는 일은 흔한 일이며, 영화의 순기능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미나리>가 사회적인 의제로만 소비되기에는 아까운 영화라는 감상이 들었다. <미나리>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이상한 풍광들이 어른거리고 있다.

 

생존만이 남은, 잡초 우거진 황무지

가장 대표적인 풍광의 이상함은 트레일러만 덩그러니 남겨진 풀숲이다. 당장 사막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할 것 없을 상황에서 <미나리>는 모래 대신 우거진 잡초에서 시작한다. 사막은 종종 서부극에서 그 척박함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을 함의한 아포리아와 같이, 텅 빈 기호가 되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사막의 자리에 구체적인 풍광이 들어서 있다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풍광이었다. 송경원 평론가가 지적했듯이[1], 이 이상함을 해석하기 위해 국적을 들이대는 것은 그다지 생산적인 방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구체적인 풍광을 체험 내지의 개인적 기억으로 묶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한 방식은 아닌 듯하다.

감독이 직접 언급했다시피, <미나리>의 중심에는 서부극이라는 거대한 미국의 신화가 어른거리고 있다. 낯선 땅에서 가족을 위해 성공을 추수하려는 아버지가 있으며,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와 가족들에게 그다지 편안하지 않다. 이해와 설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방식으로 노동을 거래하려는 이웃이 있는가 하면, 종교라기보다는 맹신에 가까워 보이는 믿음이 도사린 커뮤니티가 있다. 또한, 그들과 가장 가까워 보이는 집단은 이미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소외자들이어서 그들에게 수혜를 베풀기 어려운 처지다. <미나리>는 딱 여기까지만 묘사한다. <미나리>가 그리는 땅에는 <역마차>의 아파치나 <리오 브라보>의 ‘버뎃’과 같은 거대한 악당이 없다. 그저 산산히 부서진 개인들의 파편적 삶이 둥둥거릴 뿐이다.

<미나리>는 이 지점에서 00년대 이후 등장한 일렬의 수정주의적 서부극과 그 궤를 달리한다. <비겁한 로버드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서와 같이 신화 혹은 아이콘도 존재하지 않고,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처럼 개인을 서서히 탐욕으로 물들이는 석유도 없으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은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절대적인 불가사의도 없다. 그저 잡초가 우거진 황무지에서 어떻게든 안정과 평화를 찾으려는 심산한 인물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선택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적당한 납득의 절차 없이 방법을 수용하기로 마음먹은 인물의 모습들만 보여줄 뿐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영화에서 이야기하던 피상적인 가치는 모두 의미를 잃은 상태이다. 처음 상태 그대로 오직 생존만이 가치로 남아있으며, 그리고 이것이 과연 성공적인 선택이었는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구원 없는 화재, 남겨진 희망

철저하게 약자만이 나오는 이 풍광에서 <미나리>는 그 어떤 구원의 여지도 그리지 않는다. 대신 책임감 없는 희망만을 남겨놓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되돌아보자. 가족과 화합이라는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 도착한 순자(윤여정)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가 바라보던 미래였던 아이는 곧 죽을 것처럼 아프다. 그 와중에 경제적인 상황은 빚만 남게 될 최악의 상황이어서 발품을 팔아 거래처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최악의 상황은 가족을 해체하고, 그들이 영위하고자 했던 가치들을 가차 없이 무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자했던 순자의 행동은, 가족의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던 제이콥의 창고를 모두 불태워버린다.

<미나리>의 클라이맥스는, (드라마만 건조하다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상태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도 절정의 순간에 화재가 나곤 한다. <안드레이 루블뇨프>에서 종을 만드는 거대한 불은 피폐해진 인물들을 구원할 여지를 건내주고, <노스탤지어>에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시인을 말 위에서 분신하며, <희생>에서 불타오르는 집은 역설적으로 나무라는 새로운 희망을 보게 만든다. 그러나 <미나리>의 화재는 그 어떤 구원도 건네지 않는다. 그나마 제이콥과 모니카가 선택할 수 있었던 이혼이라는 마지막 옵션을 불태워버렸을 뿐이다.

어찌저찌 몸뚱이만 남겨된 가족의 상태를 남겨두고, <미나리>는 순자가 ‘혼자서도 잘 자란다’며 손자와 심은 미나리를 바라본다. 많은 평자들은 이 지점을 남겨진 희망이라고 지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달리 말하면 이들의 상태는 ‘그것 밖에 남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제이콥과 모니카, 나아가 데이빗(앨런 김)과 앤(노엘 조)은 이제 미나리처럼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들이 구축하고자 했던 네트워크는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하고, 주변에는 해체된 가족과 자살한 남자의 이야기가 유령처럼 떠도는 ‘잡초의 땅’에 내던져졌을 뿐이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잡초, 잔존이라는 인정 투쟁의 낭만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정이삭 감독이 그리고자 했던 잡초 우거진 황무지, 고전적 헐리우드의 장인들이 서부극에서 가장 가공하기 힘들어했던 그 사막 혹은 황무지라는 풍광은 어떤 것이었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풍광 그 자체가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프랑소와 줄리앙의 말을 빌리자면, 풍광은 시간이 집적된 결과[2]이다. 줄리앙은 수많은 인물들의 행동과 인상, 그리고 결정들이 쌓이고 겹쳐져 퇴적된 거대한 산과 같은 것을 우리는 풍광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미나리>에 집적된 시간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미나리>에 집적된 시간은 신화적일만큼 전형적이어서, 그 어떤 것도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나리>에서 특정된 시간을 뒤적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제이콥과 모니카가 어떤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몇 가지 단서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나마도 그 단서는 몹시 탈시간적이다. 가령, 순자가 미국에 가져온 비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7-80년대로 추정되는 시간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서를 따르자면 데이빗과 앤은 이미 20대를 넘겼어야 한다. 이처럼 <미나리>의 시간은 특정한 시간없이, 그저 ‘과거’라는 유령만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미나리>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이민자라는 특정한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어렴풋한 노스탤지어일 뿐이다. 그리고 이 노스탤지어는 향유자가 있는 한, 그 의미를 달리하며 꾸준히 우리의 오늘을 비출 것이다.

<미나리>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이상한 풍광은 바로 이 노스탤지어가 지닌 현재성에 기대고 있다. 한 때 이민자의 입장에서 자본과 확장이라는 거대한 악당과 싸웠던 노스탤지어는, 이제 악당 없는 땅에서 생존이라는 투쟁했던 노스탤지어로 변해있다. <미나리>의 노스탤지어를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은 시스템의 밖에서 시스템 안을 안착한 이들이다. 그것이 <미나리>라는 서부극에서 악당이 사라진 이유일 것이다. 나아가 악당이 사라진 시대의 개척의 낭만이란 것이, 대결이 아닌 잔존이 되어버렸다는 아이러니가 <미나리>가 지닌 풍광의 이상함일 것이다. 시스템과 싸우던 대립적 투쟁의 자리는, 어느새 시스템의 언저리일지라도 어떻게든 그 안에 안착하려는 인정 투쟁의 자리로 변했다.

 

영화 <미나리> 스틸컷

잔존과 생존이 낭만이 된 시대에 <미나리>의 성과를 찬양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이해가 가며, 기대되는 동시에 심난한 일이다. 가까스로 사막에 저항하던 존 포드의 낭만은, 이제 가까스로 마을에 안착한 잔존의 낭만으로 변해있다. 조금 넓게 본다면, 시스템과 나의 차이를 확인하던 낭만은, 이제 시스템과 나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낭만으로 변해있는 것 같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에서, 미국이라는 시스템에 가까스로 포섭되려는 이야기의 낭만은 어쩌면 우리가 바라고 있는 신화가 아닐까. 그리고 나에게 <미나리>가 그려놓은 풍광과 낭만은 이상하다. 나는 아직 이것이 우려인지 기대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글・이현재

영화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영화평론부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경희대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2018) 등의 다양한 연구를 보조・수행했다. 평론으로는 「보이(지 않)는 폭력」(2020, 창비) 등이 있다.


[1] 송경원, 「‘미나리’의 세 가지 결정적 순간」, 『씨네21』, 21.03.23

[2] Fransois Jullien(김설아易), 『풍경에 대하여(Vivre de paysage ou L'impensé de la Raison)』, 아모르문디, 201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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