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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아의 문화톡톡] 노동의 소외를 그리는 그림책
[김시아의 문화톡톡] 노동의 소외를 그리는 그림책
  • 김시아(문화평론가)
  • 승인 2021.05.03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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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나일까?』 & 『블레즈씨에게 일어난 일』

그림책. 그림책이라고 하면 그림책 마니아들이 많이 생겼음에도 어린이만 보는 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림책 장르가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모두를 위한 예술 그림책’이 점점 많이 출간되지만,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에선 아직도 그림책에 대해 분류를 할 때 ‘어린이 코너’에 진열하고 정리하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지 않는 어른들은 새로운 그림책에 접근하기 쉽지 않다. 다행히 집이나 회사 근처에 그림책 전문서점이 있다면 좋은 그림책을 만날 확률은 높다. 그림책 서점은 이야기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삶의 오아시스 같은 장소다. 어른들도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 사이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모두를 위한 그림책’을 찾아낼수록 일상이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날’로 시작하는 오월. 이 글을 읽는 독자들과 함께 보고 싶어서 책상에 펼쳐 두고 보고 또 보는 그림책은 『누가 진짜 나일까?』(다비드 칼 글, 클라우디아 팔마루치 그림, 나선희 옮김, 책빛, 2017)와 『블레즈씨에게 일어난 일』(라파엘 프리에 글, 줄리앙 마르티니에르 그림, 이하나 옮김, 그림책 공작소, 2020)이다.

두 그림책의 공통점은 노동하는 남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누가 진짜 나일까?』의 주인공 자비에는 “멈추지 말자!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자!”라는 표지판이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그는 회사의 주문량이 늘어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공장에서 일하느라 피곤하고 지쳐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걸 잊어버리고, 친구와 엄마를 볼 수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일상의 즐거움이 없는 삶에 회의를 느껴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만, 회사 사장은 노동자 자비에가 끊임없이 일하는 동안 “정원을 관리하고, 엄마에게 생일 축하 전화를 하며” 데이트까지 할 수 있는 복제인간을 만들도록 권고하여 뜻밖의 일이 일어난다. 또 다른 그림책 『블레즈씨에게 일어난 일』에서는 사무직 노동자 블레즈씨의 발에 짐승처럼 털이 나기 시작한다. 서류 더미와 계속 전화를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일해야 하고 퇴근길 만원인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다. 서울의 어느 회사원의 일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블레즈씨는 일에 집중하며 걱정거리를 잊으려 하지만 요일이 지날수록 머리까지 털로 뒤덮이며 결국 목요일 저녁 곰이 되어 쓰러진다. 하지만 금요일 모든 것이 괜찮아지면서 완전 곰이 된 블래즈씨는 숲속으로 가고 나무에 올라가 어릴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낀다.

출처: 그림책공작소 출판사 블로그
출처: 그림책공작소 출판사 블로그

글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야기 첫 장면을 자세히 보면 블레즈씨는 연두색 잠옷을 입고 있다. 그의 슬리퍼는 녹색이고 벽지의 패턴도 녹색 계열이며 왼쪽 구석에 뿔이 달린 순록의 그림이 보인다. 침대 옆 좁은 탁자엔 책들이 꽂혀 있고 바닥엔 노트가 펼쳐져 있다. 집의 문도 녹색이며 그의 욕실과 주방에 식물이 자라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고 녹색 소파에서 책을 읽고 고장난 자동차도 녹색이다. 고장난 문, 고장난 차, 음식을 흘리는 주인공의 삶은 짜증이 폭발하며, 주인공의 자연에 대한 욕망은 녹색 계열의 색깔과 식물 모티브를 통해서 ‘말없이’ 드러나고 있다. 시들어가는 식물이나 가시 달린 선인장은 지치고 예민해지는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연결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직장 동료나 거리의 사람들은 붉은 계열의 옷을 입고 있어 블레즈와 대조된다. 또한 눈에 띄게 강조된 색은 나뭇잎 패턴에 칠해진 파란색이다. 반복적인 삶의 패턴을 가진 현대인들의 빡빡한 일상의 리듬은 시작과 끝의 면지에 가득 찬 나뭇잎 패턴처럼 촘촘하다. 욕실 벽에 그려진 가시 같은 나뭇잎 패턴과 어둠 속에 쓰러진 곰의 모습을 한 블레즈씨에 칠해진 블루는 우울하고 불안한 색이자 동시에 평화로운 자연으로 이어주는 밤의 색이기도 하다. 이렇게 색과 그림은 글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거나 발화하지 않지만,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욕망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분위기를 연출한다. 결국 곰으로 변신하여 자연으로 간 블레즈씨는 도시를 바라보며 동료 곰에게 “너 혹시 저기 아니?”하고 공장에서 연기가 나는 도시를 바라본다. 산더미 같은 일과 피폐해지는 도시적 삶을 탈출한 주인공 블레즈씨의 결말이 알레고리적으로 표현되었다. 시간적 배경이 일주일로 구성된 『블레즈씨에게 일어난 일』은 답답하고 꽉 찬 그림들이 연속되다가 자연 속에 서 있는 두 마리 곰을 그린 풍경 그림엔 절반이 넘는 하얀 여백을 보여준다. 이는 삶의 여유를 암시한다. 주말에는 혼잡하고 정신없는 주중의 삶과 분리되어 자연 속에서 곰처럼 살아야만 삶을 견딜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출처: 책빛 출판사 블로그
출처: 책빛 출판사 블로그

『누가 진짜 나일까?』에서 그림을 그린 클라우디아 팔마루치는 복제인간이라는 테마에 상응하도록 테오도르 제리코의 작품을 모사하며 오마주 한다. <도벽에 빠진 환자>, <도박에 빠진 여인>, <계율에 빠진 남자>, <질투에 사로잡힌 여인> 초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스타일을 참고 인용하여 직원들의 “곤혹스러운 표정”과 피곤해 보이는 표정을 열거한다. <질투에 사로잡힌 여인>의 표정을 본 따 그린 빨간 두건을 쓴 여인이 손에 쥐고 있는 책 표지에 적힌 ‘THOEODORE GERICAULT’ 제목 덕분에 작가가 화가에 대한 오마주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은 다른 페이지에서도 드러난다. 복제 인간이 집에 있어서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자며 악몽을 꾸는 자비에의 몸짓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판화 시리즈 가운데 유명한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라는 문장이 적힌 그림의 몸짓이며 같은 분위기의 음산함이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또한 이탈리아 작가인 클라우디아 팔마루치는 복제 인간 때문에 자기 집에서 도망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는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그놀리의 ‘구두’를 연상시키는 확대된 구두 이미지로 무겁고 육중한 자비에의 마음을 표현한다. 다비드 칼 리가 쓴 이야기의 서사도 흥미롭지만, 글을 그림으로 해석한 클라우디아 팔마루치는 그가 좋아하는 화가들에 대한 오마주와 작품과의 시각적인 상호텍스트성으로 독자에게 회화의 세계로 안내한다. 원래 작품과 비교해 보는 재미와 더불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보고 공부하게 만드는 기쁨을 준다. 그림책은 그림을 보면 볼수록 섬세한 디테일이 보이고, 알면 알수록 독서의 즐거움이 배가되는 장르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노동자의 날’에 글감을 고민한 필자는 일요일 낮에 시간을 내어 부모님을 뵙고 지난해 봄 아버지 밭에 심은 키 작은 라일락 나무와 키가 조금 커진 블루베리 나무, 키가 훌쩍 자란 장미나무를 보고 왔다. 오월이 되니 보랏빛 라일락꽃이 피었고 블루베리는 은방울처럼 하얀 꽃을 피웠다. 세 그루의 키 작은 나무 주변에 풀을 뽑아 주며 햇볕에 등이 따스해서 기분이 좋았다. 작년 삼월, 친구가 좋아하는 나무가 라일락이어서 라일락 나무를 심었고 그 옆에 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와 친구의 이름과 같은 엘리자베스 장미 나무를 심었다. 친구가 그리울 때 보랏빛 라일락 향기와 분홍빛 엘리자베스 장미가 그리움을 삶의 기쁨으로 채워주리라 생각했다. 『누가 진짜 나일까?』의 마지막 장면에서 크레이프를 팔고 있는 주인공은 “바람 부는 날엔 사람들이 달콤한 크레이프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며 자신의 복제 인간을 만나면 모른 척하며 남들에게 하듯 “달콤한 걸 드릴까요, 짭짭한 걸 드릴까요?”하고 물을 거라며 이야기는 끝난다.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니 소금처럼 짠 게 인생이라면 일상의 소소한 행복은 달콤한 후식 같다. 지루하고 슬프고 무거운 삶 속에서 잠깐이라도 달콤한 인생을 맛보게도 해준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 한국에서의 삶은 선택의 여지없이 "빨리빨리"를 외치며 비인간적인 경쟁속에서 속도전을 하게 된다. 일상적인 삶의 리듬을 비교하면 프랑스보다 한국이 세 배는 빠른 듯 느껴진다. 삶의 속도가 인간적으로 조금 느려진다면,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삶이 풍요로울 것이다. 얼마 전 출간된 배유정 작가의 『밤버스』와 원화전을 보며 남아메리카 여행을 꿈꾸었다. 일하는 시간보다 여유 있는 시간이 많아져 개인적으로는 전시회를 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글 · 김시아

문화평론가. 파리 3대학 문학박사. 대학에서 문학과 ‘그림책의 이해’를 가르치고 연구하며, 『기계일까 동물일까』, 『아델라이드』, 『에밀리와 괴물이빨』 (2021년 5월 출간 예정)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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