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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상처 ‘이후’의 삶과 용서의 아이러니-<밀양>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상처 ‘이후’의 삶과 용서의 아이러니-<밀양>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1.06.07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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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포스터.
'밀양' 포스터.

폭력과 상처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폭력은 상처를 부르고, 상처는 폭력을 잉태한다. 폭력의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그곳에는 상처가 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다. 상처의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폭력의 검은 깃발이 음습하게 나부낀다. 폭력과 상처는 그렇게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 폭력은 정신과 육체에 상처를 남긴다. 트라우마의 진원지는 충격적인 사건과 경험이다. 그 사건과 경험은 전쟁, 학살, 고문 같은 정치적·국가적 폭력뿐만 아니라 유괴, 납치, 성폭행과 같은 개인적 차원의 폭력까지 포함한다.

이창동 영화의 핵심어 중 하나는 상처다. 그는 영화에서 상처를 껴안고 부대끼고 어루만지고 보듬는다. 상처에 관한 성찰과 전망을 냉정하게 풀어놓는다. 폭력이 어떻게 상처를 부르고, 그 상처가 어떻게 비극을 초래하는지를 집요하게 탐구한다. 상처는 폭력이 낳은 어둠의 자식이다. 폭력과 권력은 이음동의어다. 정치, 종교, 관습, 제도, 빈부격차 등은 모두 폭력이자 권력이다. 그의 영화 주인공들은 폭력(권력)의 피해자들이며 상처받은 인물들이다. 이창동은 그 상처를 헤집는다. 이창동 영화는 권력과 상처에 관한 영화다.

주목할 점이 있다. 이창동은 상처를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상처의 후유증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를 통해 상처의 원인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이다. 이창동은 상처를 망사커튼 뒤에 숨긴다. 어둠 속에 완전히 감추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인물이 상처받는 과정을 은밀하게,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대신 인물이 상처를 견디고, 상처와 싸우고, 상처를 치유하며 극복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밀양>(2007)은 남편의 불륜과 아들의 유괴로 치명적 상처를 입은 한 여성의 고통과 슬픔, 정신적 혼란을 소재로 한다. <밀양>의 서사는 신애(전도연 분)의 아들 준을 웅변학원 원장이 유괴, 살해한 사건이 전환점이다. 신애는 이 충격적 경험으로 인해 깊은 내상을 입는다. 하지만 이창동은 고집스럽다. 유괴와 살해를 표면화하지 않는다. 유괴 장면도, 유괴범의 목소리도 생략한다. 신애가 저수지에서 아들의 시신을 확인하는 장면에서조차 카메라는 냉담하다. <밀양>은 이 장면을 롱쇼트로 처리한다. 따라서 신애의 감정이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다리가 풀려 잠깐 주저앉는 장면만 남는다. 남편의 불륜과 교통사고 사망도 지나간 배경일 뿐이다. <밀양>은 이를 몇 마디 대사로 압축해 전달한다. 마른 먼지 같은 느낌을 준다.

 

'밀양' 스틸컷.
'밀양' 스틸컷.

대신 <밀양>은 상처받은 ‘이후’에 주목한다. 아들이 살해된 후 신애의 정신적 충격과 극복 과정에 집중한다. 상처가 어떤 과정을 거쳐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지, 개인은 상처에 어떻게 지배당하고 동시에 극복하는가를 탐색하는 것이다. 이창동의 영화에서 사건 자체는 차라리 부차적이다. 그러한 점에서 <밀양>은 <박하사탕>과 닮은꼴이다. <밀양>에서 출발한 기차는 쉬지 않고 달려 <박하사탕>이라는 역에 도착한다. <박하사탕> 역시 흐르고 흘러 <밀양>에서 일단 닻을 내린다. 안과 밖이 다른 듯하지만, 사실은 한 몸에 가깝다. 모래가 반쯤 흘러내린 모래시계 같다. 반을 접으면 두 영화는 거의 정확하게 겹친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스스로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어놓고 괴로워한다. ‘그 사건’이 없었던 시절, 첫사랑 순임이 수줍게 박하사탕을 손에 쥐어주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삶의 기쁨을 느끼던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흘러간 세월은 돌아오지 않는다. 영호의 딜레마는 거기에 있다. 그는 현실에서 상처받았다. 그런데 상처받은 영혼의 안식처는 없다. 영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형식적인 가해자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

<밀양>은 피해자의 영화다. 이창동의 인터뷰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는 “원작인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건 80년 광주 이야기라고 직감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벌레 이야기』에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내용이 없다. 이 소설에서 유괴는 분명 중요한 소재이지만, 사실은 한 종교인의 시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용서의 주체에 관해 질문하고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창동은 이를 ‘80년 광주 이야기’로 해석한다. 그래서 <박하사탕>과 <밀양>의 뿌리가 연결된다.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상처의 늪에 빠지는 악순환이다. <밀양>과 <박하사탕>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 용서와 복수가 고리를 이룬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죽음을 선택한다. 부조리한 권력과 폭력에 대한 저항의 방법이다. 영호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다.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속죄한다. 그러나 <박하사탕>에서는 아무도 영호의 죄를 묻지 않는다. 영호가 죄인인지 아닌지 관심조차 없다. 현실 세계에서 진짜 가해자들은 정반대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들의 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창동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아이러니를 견디지 못한다. 연약하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영호는 죽음으로 그 부조리에 항거한다.

 

'밀양' 스틸컷.
'밀양' 스틸컷.

<밀양>은 종교에 질문을 던진다. 용서란 무엇인가. 누가 죄인을 용서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 지점에서 거대한 싱크홀이 생긴다. 유괴 살인범은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이미 용서받았다. 용서한 주체는 하나님이란다. 신애는 당황한다. 어찌할 수 없는 벽 앞에서 절망하고, 뜨겁게 절규한다.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녀는 하나님에게 용서할 기회를 빼앗겼다. 그래서 묻는다.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권리가 있나요?” 가해자인 유괴범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는 오히려 신애의 고통을 걱정한다.

신애는 참담하다. 교도소 마당에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종교는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다. 교회 신도들 앞에서 “이젠 안 아프다. 평화를 얻었다”라고 간증했던 믿음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용서는 칼날이 되어 신애의 상처를 더욱 깊게 후벼판다. 그래서 <밀양>은 묻는다. 피해자의 용서가 없는 제3자(하나님)의 용서는 과연 가능한가. 대답은 어렵지 않다. 피해자의 용서가 없는 용서는 무효다. 1980년 광주의 진짜 범죄자들에게, 하나님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폭력성을 내포한 역사와 종교는 샴쌍둥이 같다.

<밀양>의 첫 신은 푸른 하늘이다. 자동차 안에서 바라보는, 햇빛 눈부신 맑은 하늘. 그곳에는 하나님이 있다. “햇빛 한 조각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라는 그 하늘이다. 이 장면은 은유적이다. 고장 난 자동차 안에서, 고장 난 영혼이 바라보는 햇빛은 과연 구원의 햇빛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신애의 여정은 순탄치 않다. 서른세 살의 그녀는 많은 것을 잃었다. 피아니스트의 희망도, 남편의 사랑도 물거품이 됐다. 그런데 새 출발을 하겠다고 떠난 길 위에서,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하는 길 위에서 자동차가 멈춰버린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신애는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요.” 자신의 경유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신애는 그렇게 고장 난 자동차처럼 심신이 망가진 채 밀양을 찾는다.

 

'밀양' 스틸컷.
'밀양' 스틸컷.

신애는 피아노학원을 연다. 카센터 사장 종찬은 그녀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부동산을 소개해주고, 학원에는 가짜 상장을 붙인다. 신애는 친화력을 발휘한다. 아무 인연이 없는 옷가게 주인에게 인테리어를 바꾸면 장사가 잘 될 거라고 조언하고, 웅변학원의 사장에게는 땅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다. “있는 척하려고 거짓말한 것”이다. 그녀의 ‘~인 척’은 눈물겹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결국은 비극의 씨앗이 된다. 그녀는 알고 있다. 밀양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를, 그 시선이 얼마나 치밀하고 엄혹한지를 동물적 감각으로 느낀다. 그 시선의 다른 이름은 권력이다.

푸코는 “매 순간 모든 상황에서, 어느 한 지점에 대한 다른 지점의 모든 관계에서 권력이 산출된다”라고 말한다. “권력은 도처에 있는데 이는 권력이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처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개념은 신애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신애에게 밀양은, 밀양 주민들은 살아 있는 권력이다. 그 자체로 이미 폭력적이다. 그들은 신애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그들의 시선은 도처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햇빛은 권력의 속성을 닮았다. 지상의 모든 곳을 비춘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늘 존재한다. ‘햇빛의 편재’다. 그 시선은, 권력은 억압으로 작용한다. 햇빛과 권력, 폭력의 삼위일체다. 

신애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안다. ‘서울에서 젊은 과부가 내려와 피아노학원을 운영한다’라는 행위의 파괴력을 알고 있다. 신애는 권력의 내부에 편입하려고 몸부림친다. 밀양과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밀양은 죽은 남편의 고향이고, 그는 밀양에 내려와 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왔다’라는 명목을 내세운다. 신애는 탐색전을 벌인다. 종찬에게 거듭 묻는다.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 “밀양은 무슨 뜻이죠?” 그러나 신애는 이미 알고 있다. 밀양이 ‘비밀의 햇빛’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그 고장에서 일어날 사건들이 살을 베고, 마음을 할퀴고, 운명을 좌우하리라는 것을. 그런데 종찬은 출제자의 의도를 잘못 읽는다. 무가치한 정보만 제공한다. 종찬의 구애가 계속 미끄러지는 이유다.

신애는 스킨십을 통해 권력의 문을 연다. 웅변학원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고, 노래방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주민들과 교유한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신애의 과도한 편입 노력은 비극을 가져온다. 그녀는 돈이 없으면서도 땅을 보러 다닌다. 이 복부인 행세는 아들의 유괴라는 두 번째 불행의 씨앗이 된다. 신애는 영웅이 아니다. 지방 소도시의 가여운 소시민일 뿐이다. 또 신애의 성격적 결함은 후천적이다. 그런데 소시민의 후천적인 성격 결함이 비극을 낳는다. 권력의 두꺼운 껍질을 뚫고 낯선 고장에 정착하려는 안타까운 몸짓이 결국은 아들의 유괴와 살해라는 비극을 불러온다.

 

'밀양' 스틸컷.
'밀양' 스틸컷.

신애의 성격적 결함이 야기하는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괴범을 용서하는 행위로 발전한다. 신애는 아들을 잃은 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라는 부흥회가 계기가 된다. 그녀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못 이겨 온몸으로, 통나무처럼 통곡한다. 그런데 목사의 손길이 닿자마자 통곡은 울음으로 바뀌고, 그 울음은 곧바로 잦아든다. 목사의 손길은 하나님의 손길이다. 따뜻한 사랑의 햇빛이다. 신애는 금세 변한다. 독실한 신자가 되어 간증까지 한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확실히 알았다”라고 고백한다.

신애는 마침내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에 찾아간다. 목사와 신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면회를 강행한다. 이제 “신이 있다면 내 아들이 왜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느냐”고 울부짖던 신애가 아니다. 그녀는 통과의례가 필요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기 위한 이벤트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신애의 자기 과시와 가식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신애는 벽에 부딪혀 깨친 거울 파편이 된다. “하나님이 먼저 용서했다”라고 말하는 유괴범의 평화로운 얼굴 앞에서 모래성처럼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상처를 감추기 위해 쓴 위선의 가면이 더 큰 상처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애는 살아남는다. 그 비밀은 무엇일까.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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