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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터키인 미나리 뿌리내리기의 어려움 - <미치고 싶을 때 Gegen die Wand; Head-On>(2004)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터키인 미나리 뿌리내리기의 어려움 - <미치고 싶을 때 Gegen die Wand; Head-On>(2004)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06.2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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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독일어로 <벽에 부딫혀서(Gegen die Wand)>다. 말 그대로 절망적인 상태를 암시한다. 감독 파티 아킨(Fatih Akin, 1973- )은 터키계 독일감독으로, 독일 함부르크에서 터키 이주민 2세대로 태어났다. 대학에서 시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후, 1998년 영화로 데뷔하였다. 대표작은 <미치고 싶을 때>(2004)와 <천국의 가장자리 Edge of the Heaven>(2007). 아킨 영화의 소재는 독일의 터키 이주민이고, 그들의 갈등을 그린다. <미치고 싶을 때>는 그러한 소재를 잘 그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여주인공 시벨의 가족으로 대변되는 완고한 터키 무슬림이 등장한다. 시벨은 개방된 성에 관한 입장을 대변한다. 남자 주인공 자히트는 독일내에서 터키인으로 살아가는 이주민의 중립적, 갈등적 입장을 묘사한다. 이처럼 터키 이주민의 갈등은 영화속에서 잘 드러난다. 깐느 영화제에서 수상할 당시 아킨은 터키영화로 대접받고 싶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뿌리 터키를 자긍심으로 생각했다.

 

한편 아킨 감독은 나찌즘이나 파시즘을 경멸하는 정치적 시각을 공언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를 비난하기도 했다: “부시의 정책은 나찌의 제3 제국과 흡사하다. 부시의 영향아래서 헐리우드는 펜타곤의 명령으로 관타나모에서 행해지는 고문을 정상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들을 생산해낸다. 나는 부시가 3차 대전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때 그들은 파시스트다.”

독일사회에서 터키 이주민상황은 얼마나 심각할까? 우리가 흔히 다문화 사회의 갈등이라고 말하는 것의 원류가 바로 독일의 터키 이주민 실상이다. 현재 독일내에 터키계 이주민의 수는 대략 250만 정도다. 50여년 전에 이주한 1 세대로부터 3세대 정도 성장했다. 현재 독일의 이주민 정책은 동화주의(반대는 통합주의)로 변하고 있는데, 그것은 소수 민족 고유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터키는 종교적으로 무슬림인데 기독교 문화인 독일과 마찰을 빚는다. 게다가 실업율의 증가로 소수 민족의 업종 진출이 제한되어, 더욱 사회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터키 이주민들은 독일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터키로 재귀환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성, 다문화주의다. 성은 인간의 자유로움과 외로움의 해소를 의미한다. 자히트는 애인의 상실감으로 외로워진 마음을 성으로 달랜다. 애인 마렌과의 관계는 단지 허전함을 해결하는 유희일 뿐이고, 집착의 의미는 없다. 터키 여자 시벨은 많은 남자들과의 성관계를 통해 자유분방함을 구가한다. 의무나 억압이 없는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엄숙함을 강조하는 이슬람 가정은 그녀의 성적 방종을 허락하지 않고, 그녀는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스탄불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와 결혼하고, 그녀는 순종적인 여자로 변한다.

다문화주의 이면에는 동화시키려는 서구와 저항하는 동양이라는 두 문화권의 갈등을 볼 수 있다. 자히트의 모습은 록큰롤, 음주, 마약 등의 서구 문화로 범벅되어 있다. 시벨의 자유분방함 역시 낯선 남자들과의 원 나잇 스탠드, 음주, 가무 등 서구적 프리스타일로 점철되어 있다. 터키의 전통에서 벗어나 점차 서구화되어가는 동양인의 모습을 보인다. 그것을 억압하는 세력으로 전통적인 집안의 분위기가 대조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권위적이어서 긍정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억압된 오빠의 이미지나 근엄한 아버지의 모습, 체념적이고 수동적인 어머니가 20대 초반의 약동하는 현대 동양 여성을 포용하지 못한다.

다문화주의는 독일의 터키이주민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준다. 독일의 인종차별주의는 터키인들이 자유로운 터전으로 독일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한다. 자히트는 청소를 하며 경제적으로도 하층민 노동자 계급으로 살아간다. 그에게 독일이 기회의 땅일리는 없다. 그렇다고 터키로 되돌아갈 계기도 없다. 그가 선택하는 길은 성적인 방종과 마약, 그리고 자살이다.

 

이 영화에서 자살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의 속성은 대비된다. 자히트는 죽으려고 자살을 선택했고, 시벨은 살려고 자살을 선택했다. 자히트는 사랑하던 여자가 죽어서 더 이상 생에 대한 미련이 없고, 자기파괴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 자살은 고통의 해소. 반면 시벨은 완고한 집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 도망가는 방법의 하나가 자살이다. 그녀는 진짜 죽으려고 한 게 아니라, 자살 소동을 통해 집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자히트는 죽으려다 시벨을 통해 오히려 삶을 얻게 된다. 시벨 역시 자히트를 통해 삶을 얻게 된다. 하지만 운명은 그들을 함께 살지 못하게 한다. 그들의 여정은 독일에서 터키 이스탄불로 여행하는 구조를 갖는다. 그 여정의 의미는 특이한 결말을 도출한다. 독일에서 적응하려던 시벨은 결국 이스탄불로 간다. 자히트도 시벨을 따라 이스탄불로 간다. 하지만 그는 다시 독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언젠가 시벨에게 터키의 고향에 가서 살자고 말한 적이 있다. 자히트는 혼자 고향으로 간다. 시벨도 독일로 가지 못하고, 자히트도 독일로 가지 못한다. 시벨이 가지 못하는 이유는 터키남자를 얻었기 때문이다. 자히트가 가지 못하는 이유는 독일에 애인이 없기 때문이다. 전 애인은 죽었고, 현재 애인은 다른 남자에게 갔다.

독일은 터키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자유분방한 삶이 가능해야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처럼 보인다. 아니면 억지로 사는 삶일 테니까. 남의 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건 사람을 사랑하거나 자유를 허용하는 두 가지 경우 외엔 없다.

 

 

글·정재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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