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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시대의 고발』이 세상에 나온 이유
『청년의 죽음, 시대의 고발』이 세상에 나온 이유
  • 김유라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기자
  • 승인 2021.06.3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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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권 여야에서 ‘청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30대 중반의 청년남성’을 당 대표로 내세운 국민의힘은 이를 ‘세대교체’라고 명명하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청와대도 질세라 25세의 대학휴학생을 청년비서관으로 발탁했고, 하버드대 학사 출신의 야당 대표를 의식이라도 한 듯 하버드대 석사 출신 40대 변호사를 정무비서관으로 임명하는 촌극을 벌였다.

물론 젊은 정치인의 자생이 거의 불가능한 현 상황에서, 이런 ‘띄워주기’식 행보가 어느 정도 이해된다. 경쟁처럼 번진 청년 내세우기가 본연의 목적을 잃은 채 보여주기식으로 끝나버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청년’을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직 사회의 피라미드 하부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학생으로, 말단사원이나 비정규직으로, 혹은 사회적 약자로 머물러 있는 청년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청년 대부분은 정치권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청년’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 부조리와 모순을 온몸으로 겪으며 벼랑으로 내몰리는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여야 정치권의 청년정책은 공허하기만 하다.

지난달 9일 광주에서는 건물붕괴 사고로 고등학교 2학년생 김모 군이 죽었다. 5월에는 청년 이 부사관이 성폭력과 군대의 진실은폐 때문에 자살했다. 또 4월에는 평택항에서 컨테이너 작업을 하던 23세 청년 이선호가 300kg 철판에 깔려 죽었다. 청년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묵직한 자성의 목소리를 촉구한다. 목숨보다 비용을 중시하는 무한경쟁의 사회, 폐쇄적 구조 속에서 썩을 대로 썩은 군 문화…. 사회의 뚫린 구멍에 누군가는 빠져 죽어야만 했던 것이고, 그때 그 시간 거기에 있던 청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사가 빚진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다

14명의 청년이 눈물로 쓴『 청년의 죽음, 시대의 고발』(내일을여는책, 2021)은 청년의 ‘이유 있는 죽음’에 주목한다. 이 책은 격변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변곡점이 됐던 청년의 죽음을 29가지 주제(인물 또는 사건)로 분류해 기록한다. 책의 초반부는 일제강점기의 시인 윤동주로 시작해 민주화 운동을 이끈 김주열과 이한열, 노동운동가 전태일 등을 거쳐 격동의 시대를 지난다. 이들 죽음을 재조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 죽음들로 일궈진 토양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한민국은 윤동주 시인이 지키고자 한 민족정신에 기반해 (분단의 아픔이 있긴 하지만) 재건됐다. 윤동주는 시를 통해 독립운동을 했다고 평가받곤 하지만, 이 책은 일본 판사 앞에서 당당히 조선 독립을 주창한 그의 저항적 면모에 주목했다. 그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이 일제 아래의 삶에 저항하고 희생했기에 우리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수 있다.

민주화 열사와 노동운동가들의 죽음도 결이 같다. 독재와 자본의 억압에서 해방되기 위한 청년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우리가 누리는 지금의 민주주의가 가능했을까?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강의 기적은 수출 주도 정책아래 저임금 구조 속 가혹한 노동력 착취 및 과로사의 결과물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선거철에 투표를 하고 노동 후 휴식하는 기본적인 일상마저 죽음으로 일궈낸 셈이다.

이렇게 재조명된 청년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이 사회가 수많은 청년의 죽음을 밟고 조금씩 발전해왔음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역사 위에 터전을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청년의 죽음에 빚을 졌다. 이 책은 그런 죽음들에 대한 깊은 애도이다.

 

시대의 고발, 망각은 곧 반복이다

 

책의 전반부가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거대담론을 주로 다뤘다면 후반부로 향할수록 사안은 복잡해진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구의역 김군 사건, 세월호 참사, 트랜스젠더 변희수 하사의 죽음과 청년 자살…. 자본주의 고도화와 가치의 변이로 이들 죽음의 책임은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혹은 이들 죽음을 둘러싼 이견이 팽팽하게 대립해 크게 이슈만 될 뿐, 사회적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런 죽음들을 치열하게 기록해낸 것은, 이 죽음이 그저 죽음으로 끝나고 잊힌다면 비슷한 희생이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최악의 예시가 있다. 바로 일터에서의 죽음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죽음의 외주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통상 원청업체는 위험한 3D 업무를 하청업체에 위탁한다. 하청을 받는 업체는 입찰단가를 낮추기 위해 안전비용을 절감한다. 이런 식의 하청 외주 단계가 늘어날수록,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노동자가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된다. 책에 실린 청년 황승원과 구의역 김군도 이런 불합리하고 잔혹한 시스템 속에서 죽었다.

 

2011년 7월 2일 황승원이 죽었다.

황승원과 동료 작업자 3명은 냉동기의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냉매 가스를 빼내는 작업을 하다가 가스가 유출되면서 참변을 당했다. 방독면 등 제대로 된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채였다.

(…)

황승원이 죽은 지 5년 후인

2016년 5월 28일,

또 다른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군이 죽었다.

김군은 들어오는 열차와 차단벽 사이에 끼여 숨졌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그러나 책임자는 묘연했고, 외주를 맡긴 원청들은 책임을 피해갔다.

-『청년의 죽음, 시대의 고발』중

 

그리고 올해, 23세 청년 이선호가 죽었다.

그의 죽음은 10년 전 황승원, 5년 전 구의역 김군의 죽음과 꼭 닮았다. 그들은 모두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였고, 사고 당시 현장에는 기본적인 안전장치조차 없었다. 사회가 황승원을 잊지 않았더라면, 이선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다시 한 번 깨닫고야 만다. 죽음을 잊으면 또 다시 죽는다. 그대로 두면 누군가 죽는다.

때문에 우리는 이 죽음들을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한다. 또 빚진 마음으로 밟고 나아가야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윤동주와 이한열, 그리고 숱한 다른 청년들의 희생을 밟고 조금씩 전진해왔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기록은, 무엇보다 기록 이후를 위한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변희수 하사’와 ‘청년 자살’에 관한 글이 눈에 띈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혹은 인정)와 제도적 뒷받침이 부재해 성소수자가 죽어가고 있다. 또 가혹한 현실 앞에 무력해진 청년들이 극단적 선택으로 몰리고 있다. 이미 산적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로, 여러 논리가 개입된 복잡한 사회문제들이 최근 등장했다.

기존의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어 시대는 다시 청년을 부른다. 청년들이 기록해 세상에 던졌으니, 사회는 해결할 역량을 갖춰나가길 바란다. 또 서두르기를. 어떤 청년들이 국회와 청와대를 누비는 동안 지금도 어떤 청년들은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글·김유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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