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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4) - 신의 무덤 앞에서 그의 망각을 기도하는 근대의 무신론자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4) - 신의 무덤 앞에서 그의 망각을 기도하는 근대의 무신론자
  • 안치용 | ESG 연구소장
  • 승인 2021.06.3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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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의 세계설명은 단순했다. 신(神)으로 모든 걸 설명했다. 세계관은 ‘신 대 피조물’이란 구도를 바탕으로 형성됐다. 이 구도는 이항대립이 아니라 신 안의 세계, 신 안의 피조물이란 커다란 전제하에서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든 편의적 발상이었다. 굳이 이항대립이라고 한다면 신 안에서, 그리고 신 앞에서 신을 우러르는 제의의 형식으로서 이항대립이었다.

이런 세계설명에 서구 관점이 강하게 반영됐다고 지적할 수 있고 그 지적에 타당한 측면이 있지만, ‘신’을 기독교의 신을 넘어서 포괄적 신성 혹은 신적인 것으로 상정한다면 이 구도가 근대 이전 인류에게 공통적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근대 이전에 지구의 한쪽에서 강력하게 작동한 기독교적 세계관이 근대 이후에 자본주의와 합체하며 세계 전역에서 힘을 발휘한 특별한 유형의 세계관이란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면 기독교의 세계관은 신과 인간의 이항대립을 인간과 세계의 이항대립으로 전치한다. ‘신 대 인간’은 ‘인간 대 세계’로 펼쳐지다가 아무런 근거없이 결합해 ‘신→인간→세계’라는 예상치 못한 위계화를 구현한다. 이해를 위한 편의적 이항대립은 찬탈을 위한 실체적 이항대립으로 변조된다. 마찬가지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면 동양의 세계관이 ‘신 대 인간’ 혹은 ‘자연 대 인간’으로 병립하고, ‘자연=신 대 인간’에 머물며 분수를 지켜 마침내 기독교적 참칭을 모면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마고 데이’ 이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해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구약성서, 창세기 1장 26~28절

 

성서의 창세기에서 표명된 기독교의 인간관은 신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다.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최고 피조물이란 인식은 인간에게 근거 없는 우월감을 부여했다. 기독교 형성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친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이 자연의 정복자이자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망상을 심어줬다. 기후위기 등 근대 이후의 위기와 관련해, 자본주의와 합체한 기독교 세계관의 책임을 추궁할 때 흔히 제시하는 논거다. 성서해석이 옳았는지는 이 자리에서 논의하지 않는다. 

문제는 세계와 인간이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의 우위를 ‘입증’한 논거가 사실상 소멸한 근대 이후에서야 근대인으로 명명된 인간이 세계에 대한 우위를 본격적으로 주장하고 실행했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1971년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불태환 선언 이후 달러화의 지위에서 그 유비를 발견할 수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로 불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통화체제에서 달러화의 우월적 지위는 다른 통화와 달리 달러만이 금으로 태환될 수 있다는 데에서 확보됐는데, 닉슨의 불태환 선언으로 우월적 지위의 근거가 허물어진다. 그러나 이후 전개과정에서 드러났듯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는 더 강력해졌다. 금으로 바꾸지 못하게 된 달러가 여전히, 나아가 더 강력하게 국제통화를 지배한 현상은 신 없는 신성의 활용이란 서구 근대의 풍경과 흡사하다.

금 태환에서 해방된 달러화가 때로 폭주했듯, 신 없는 신성의 활용은 세계에 대한 근대인의 폭력적 지배와 남용으로 이어졌다. 근대 이전에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세계 내에서 혹은 세계에 대해 자신 존재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신의 뜻에 부합하느냐였고, 따라서 그 방법이 메신저를 통하든, 다른 매개를 통하든 신의 뜻은 확인돼야 했다. 신이 자신의 뜻을 선포, 해명 혹은 전달하는 통로를 어쨌든 인간세상에 만들어줬을 것이란 가정이 전(前)근대 세계관의 근간으로 전제됐다. 이 가정은 가정이긴 했지만 존재론적으로 매우 절박한 가정이어서 흔히 공리(公理)로 받아들여졌다.

근대인은 ‘절박하게 가정된’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통로에 무심했다. 또는 외면했다. 나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채로 아예 통로가 있는 곳으로 간주된 곳을 묻어버리고, 그곳이 어디였는지에 관한 흔적을 마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관련자를 모두 묻어버렸듯 지워버린다. 진시황과 근대인의 차이는 전자가 실재하는 자신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접근통로를 차단했다면 후자는 (무덤의) 실재 여부와 무관하게, 또 통로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려는 어떤 의사 없이,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독일 쾰른을 융단폭격한 영국 공군처럼 그 일대를 초토화했다는 데에 있다. 신과 교통하는 통로의 이런 방식의 소멸은 근대인에게 이중의 효과를 거둔다. 그것은 신의 소멸로 이어져 피조물인 인간이 단독체로서 자기 책임과 자기 존엄 아래 세계와 맞서는 막막한 상황을 초래했고, 동시에 초토화로 신의 부재 자체를 검증할 수 없게 됐다는 아이러니를 산출했다. 

검증할 수 없다면 침묵하는 것이 예의였을까. 침묵 대신 누군가는 버림받았다고, 또 누군가는 죽었다고, 나아가 죽였다고,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또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게 된다. 근대인이 성취한 신의 부재 국면은 부재 검증의 불능 때문에 역설적으로 신의 편재를 초대하는 것으로 귀결하기도 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문학에서 자연주의는 그 귀결 양상의 하나다.

아무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성서의 구절은 신의 형상을 닮은 대리인이라는 불가결한 조건을 없앤 채로 근대에 작동하게 된다. 금태환이 가능한 달러화가 금과 무관한 달러화로 바뀐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태다. 닉슨의 불태환 선언은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집트의 파라오 아크나톤(B.C. 1379~B.C. 1362)의 행태와 닮았다. 닉슨이 한 일이 아크나톤과 다르다면, 개혁이라는 적극적인 행위라기보다는, 태환 위협에서 탈출하고픈 소극적 회피 행위였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크나톤이 그랬듯, 닉슨은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바뀌는 극적 풍경을 연출한 역사적 인물이었다. 자본주의의 물신(物神)이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바뀌는 풍경은 이것에 응당 그 이상의 문명사적 의의가 있지만, 물신성을 일단 모종의 신성으로 간주한다면 자본주의의 신성을 정립하려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가장 주목할 만한 근대인이란 평가를 닉슨에게 부여할 수 있다. 물신성의 관점에서, 닉슨은 그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분명 우상파괴자다. 물신성의 관점에서, 닉슨은 그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지만 더 없이 신실했다. 전체로서 근대인은 닉슨만큼 진취적이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저 불가결한 조건절을 삭제한 기이한 문장을 중얼중얼 늘어놓을 뿐이다. 신에 대해서는 계약위반이었고 세계에 대해서는 사기행위였다. 반면 닉슨은 여기에서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뎌 근대의 지평을 확장한 사람이다.

‘신의 형상을 닮은 대리인’이란 규정은 그 자체로 여러 불쾌감을 초래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서구 세계관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유일한 안전장치다. 신탁자의 뜻을 피신탁자가 제대로 이행했는가 하는 대리인 문제는 그래도 건강한 논의에 해당한다. 이른바 ‘착한 청지기(Steward)’ 논의가 대리인 문제다. 사악한 자본주의를 바로잡기 위해 기관투자가에게 ‘착한 청지기’를 요구한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분투이듯이, 서구가치의 맥락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대리인이란 자리를 지켜내려는 노력은 여전히 요긴하다. 신을 신이라 부르든 신탁자라 부르든, 사물들의 지능으로 부르든, 다른 무엇으로 부르든.

대리인을 그만둔 근대인이 근대에서 행한 일은 참칭이며, 결과는 신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뜻밖에 신의 교체였다. 교체된 신은 예상대로 불태환된 달러 같은 신이었다. 기독교의 신 야웨는 이제 세계신 맘몬으로 교체된다. 서구가치의 체계에서 신의 형상은 대리인의 수탁자 의무를 구성했지만, 맘몬교도가 된 근대인은 탐욕의 이데아를 맘몬과 공유하며 결국 스스로 맘몬이면서 맘몬교도인, 망칙한 신인(神人)일체의 세계를 열게 된다. 그런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보다 포유류로 환원되고 만다. 이제 자연주의가 말할 공간이 열린다. 

 

거울을 보는 신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동일하게 세계와 맞서게 된다. 이곳에서 최초의 원인 같은 것은 없다. 결과가 있으면 어떻게든 원인은 찾아지며 생명체는 세계의 반영이다. 자연주의 용어로 생명체는 세계의 인쇄물일 따름이다. 이것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선포에 필적할 만한 존엄을 제공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연주의 세계관에서도, 인간이 세계와 맞서고 세계로부터 인쇄되는 방식은 다른 생명체와 다르게 제시된다.

나무는 세계 안에서 세계와 맞서며, 무엇보다 중력에 맞서며 단독자로 존재한다. 세계의 인쇄물로 주어지면, 인쇄된 상태에서 세계와 대립하고 소통하며 주어진 존재를 주어진 만큼 실현한다. 단독자로서 세계와 1대1로 맞서는 구조는 거의 모든 동식물에 공통으로 주어진다. 주변의 혹은 원격의 같은 종의 동식물이나 훨씬 더 많은 다른 종의 동식물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간섭하지만, 개체의 차원에서 존재자로 존재할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

개미나 꿀벌은 군집생태를 통해 존재를 실현한다. 단독자로 세계와 대면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군집으로 세계에 맞선다. 개별적으로 세계에 대응하지만 주로 유기체의 일부로 대응에 참여한다. 개체는 무의미하고 전체의 부품으로 유의미해진다. 군락 없는 나무는 그래도 나무이지만, 군집 없는 개미나 꿀벌은 엄밀하게 말해 개미나 꿀벌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군집생태의 존재와 단독자의 존재를 동시에 나타낸다. 사상사에서 사회유기체설 대표자로 표기되는 허버트 스펜서가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라고 할 때의 ‘사회’는 실질적으로 개미의 ‘군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무나 사자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이 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고 믿는 사람도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펜서가 말한 인간은 자본주의를 체화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이자 근대인이다. 서구가치 체계에서 전(前)근대인은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아니었기에 그런 이유로 그는 아마 삶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무와 사자처럼 삶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사자나 나무와 달리 신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다”는 설명은 온전히 근대인에게만 해당한다. 

그렇다고 근대인 이전에 사회적 존재가 성립하지 않은 건 아니다. 널리 알려진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말은 ‘폴리스적 존재’를 풀어쓴 것이다. 인간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존재, 즉 ‘폴리스적 존재’로 군집생태를 이룬다. 더불어 단독자로도 세계와 맞선다. 

‘폴리스적 존재’이자 동시에 나무와 같은 단독자인 인간존재의 특성은 생명체 중에서 유일무이하다. 언제부터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인간은 인간 타자와 삶을 공유함으로써 인간이다. 또한 개미와 벌과 달리 ‘폴리스적 존재’로 군집할 때에도 단독자다. 군집에서 인간은 다른 단독자와 부대끼며 존재를 확인한다. 더불어 자신이 소속된 군집 자체도 타자로 인식하며 맞선다. 자신이 소속되지 않은 다른 군집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타자와 대면, 타자의 포위는 군집생태를 감내하는 ‘폴리스적 존재’일 때만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지만, 군집에서 벗어난 존재로서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은 총체로서 세계를 타자로 대면한다. 이런 다접면 존재는 인간의 유적 특성이다. 

신의 보증이 없어도 인간은 충분히 다른 생명체를 압도하는 차이를 만들어냈다. 물론 이 차이가 동시에 인간 스스로를 압도하고 압박하는 상황은 끊임없이 신의 보증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다접면 존재, 복합타자 대응 존재로서 인간의 특성은 시간이라는 새 요소를 참작하면 더 복잡해진다. 사회유기체설의 주장과 무관하게 우리는 직관적으로 사회가 유기체임을 안다. 사회 혹은 지금까지 사용한 용어인 군집, ‘폴리스’라 해도 좋고, 아무튼 개인이 속한 군집이 유기체인지 아닌지를 단순무식하게 검증하는 방법은, n명의 개인으로 구성된 군집의 값이 n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전체가 ‘n+α’라면(‘n-α’도?) 그 사회는 유기체일 확률이 높다. 사회계약을 논하고 최초의 인간을 이야기한 계몽주의 이전부터 사회는 유기체였다. 그 말은 사회에 속한 개인과 무관하게 사회는 독자적인 진화 경로를 걸었다는 뜻으로, 스펜서보다는 오히려 카를 마르크스의 생산양식이란 개념에서 사회유기체설이 간명하게 확인된다. ‘생산양식=생산력+생산관계’라는 설명은 인간 혹은 개인과 무관하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서 사회의 특성을 입증한다.

사회의 독자적인 시원과 발전, 진화와 관련해 어떤 단계의 사회에 태어나는가 혹은 던져지는가는 인간조건의 태반을 규정한다. 사회 시계열의 현재 단면은 현재에 이르는 많은 사회 시계열의 단면이 축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폴리스적 존재’로 인간을 규정하는 ‘폴리스’는 사회적 시간의 축적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따라서 ‘폴리스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적분된 존재임을 의미하게 된다. 

빅뱅 이후 138억 년째 팽창중인 우리 우주에서 태양이란 미미한 별을 바라보며 1초도 밀당을 멈추지 않는, 지표면의 나무와 다를 것이 하나 없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며 특정한 인간 역사의 시간에 태어난 ‘나’는, 그러므로 신적 설명을 배제해도 매우 신성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천체물리학자가 결국은 신을 논하게 된다는,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가 근대인의 숙명과 닮았다고 한다면 허황한 이야기일까.

 

분열의 연쇄에 직면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사회적 존재로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오대산이든 은행나무공원이든 모처의 나무처럼 세계와 대면한다. 나무처럼 세계와 대면해야 한다는 조건은 지구나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에게는 자신만이 짊어져야 하는 독특한 굴레로 작용한다. 나무처럼 지구처럼 세계와 대면한다는 말은 인간이 포유류로 세계 안에서 세계와 맞서야 한다는 뜻인데, 나무·지구와 달리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자연적 조건, 즉 포유류의 조건에 불편을 느끼고 때로 혐오하며 극단적으로 포유류이기를 그만 두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의미로서 인간이란 용어엔 포유류란 조건이 빠져있다. 현실적 의미로서 인간이란 말은, 한정된 의미로서 인간과 한정된 의미의 인간이 기피하는 포유류의 특성이 한꺼번에 들어있는 이중적 존재를 뜻한다. 이 이중성은 평온하게 공존하기도 하지만 적잖게 갈등하고 적대한다. 이 곤란을 익숙한 말로 분열이라고 할 밖에. 분열에서 곤란을 겪는 흔한 사례를 사랑에서 종종 보게 된다. 포유류로 서로 사랑하고 인간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때로 사랑에 관여하는 포유류와 인간의 속성이 서로 충돌한다.

분열은 인간과 포유류의 상충이 발생할 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존재에게 주어진 타자와의 많은 접면이 대체로 분열이 일어나는 장소라고 할 때 접면이 과거보다 많이 늘어난 근대인이 더 많은 분열에 직면하는 상황은 당연해 보인다.

문학에서 자연주의를 관철하려 한다면 포유류인 인간보다는 분열된 인간을 그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인쇄물로서 인간을 형상화하는 데에 그것이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분열된 인간에 앞서 분열하는 인간이 있다고 믿는다면, 인간이 수동적으로 분열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각성이든 작용이든 분열된 상태의 어느 순간에 주체의 분열함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어느 순간 자연주의가 저절로 무력해지게 된다. 다만 자연주의가 실제로 무력해질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일이 허망한 논의인 게, 인간 주체의 어떤 능동적 움직임을 확인 또는 검증할 방법이 인간에게 없다. 신에 닿을 통로를 묻어버려 신의 부재증명 자체를 묻어버린 근대인은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거나 비(非)존재를 확인할 능력도 망실했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존재를 입증하는 대신 존재를 욕망한다. 욕망은 존재로 치환된다. 또한 근대인은 비존재를 확인하는 대신 회피한다. 존재는 존재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로 욕망함으로써 존재하며, 비존재는 확인가능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묵살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도발하고 호소하고 유혹하는 사람의 은밀한 욕망 앞에 몸을 기울이는 사물들의 지능”

 

장 지오노의 소설『 폴란드의 풍차』에서는 운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애매하거나 심오한 설명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과 인간조건, 인간존재를 논의했고, 그 논의의 저변에 분열이 자리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나 지오노의 운명에 관한 언명이나 진일보한 통찰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폴란드의 풍차』에서 ‘신이 망각한 사람’이 되기를 염원하지만, 결국 신의 기억으로부터 도주하는 데 실패한 인간군상이 나온다. ‘신이 망각한 사람’이 되기를 염원한 것이 실패한 사태는, 따지고 보면 신의 형형한 기억 때문이 아니라 거짓 염원과 도주실패 욕망의 교차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 폴란드의 풍차』가 자연주의 문학에서 말하는 인쇄물로 인간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쇄불능 혹은 인쇄물의 해독불능 상태를 이야기한다. “사물들의 지능”이 “사실은 도발하고 호소하고 유혹하는” 사람의 욕망 앞으로 몸을 기울인다고 할 때 인간은 신의 망각을 염원한다기보다 신의 망각을 염원한다고 믿기를 염원한다고 해야 한다. 묻어버린 신의 무덤 앞에서 그의 망각을 희구하는 존재론은 어떤 무신론에 맞닿을까. 

다시 사랑을 말하자면, 인간이 교미하는 존재가 아닌 섹스하는 존재라는 설명은 인간만의 유적 특성을 부각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존재 자체를 해명하는 데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섹스한다고 말하며 실제로 교미한다고 해도 실망할 이유는 없다. 교미가 아닌 섹스라고 해서, 뭐 대단한 무엇이 되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저 교미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고통받게 된다. 섹스든 교미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한다고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미할 때 만일 그것을 말해야 한다면 교미 대신 신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더 나아가 교미 대신 신의 이름을 말해도 좋겠다. 그러려면 먼저 사랑을 해야 하고 신의 이름을 묻기를 욕망해야겠다. 누구에게 물을지는, 어떤 인간이 될지를 어떻게 결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순환논법이 되겠지만 그 결심이 분열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 주체의 전 존재를 건 사투인지, 그저 신의 인쇄물의 오자에 불과한지가 끝내 판별되지 않는다는 게 이 논의의 최종적 무익함이다. 뒷방에서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는 신에게 묻기 어려운 게, 방은 있는 듯하지만 방문은 없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 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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