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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이상하고 색다른(queer) 소설과 연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양근애의 문화톡톡] 이상하고 색다른(queer) 소설과 연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1.07.1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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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소설과 너머의 예술

퀴어(queer)의 사전적 의미는 이상한, 야릇한, 색다른, 괴이쩍은 등이지만 19세기 말부터 성적 소수자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푸코의 『성의 역사』에 잘 설명되어 있듯, 동성 간 성행위는 언제나 존재했지만 근대 이후 과학담론과 의학담론에 의해 ‘동성애’라는 하나의 ‘종(種)’으로 ‘탄생’한 것이다. ‘정상’이라는 규범적인 상태를 이탈하는, 그래서 해석되지 않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퀴어(Queer)라고 불린 사람들은 남들과는 다른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이 말을 전유해서 쓴다. 퀴어는 더 이상 성적 소수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규범적, 관습적 정체성을 교란하거나 다양한 성적 가능성을 아우르거나 그밖에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관한 이분법적인 틀을 문제 삼고 그로 인해 기울어진 보편성에 의문을 던지는 일련의 행위들을 ‘퀴어링’이라 할 수 있다.

박상영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2017)는 이상하고 야릇하고 색다르고 흥미롭다. 소설 내용을 이렇게 소개해본다. 영화를 만들 돈을 벌기 위해 자이툰 부대에 자원한 게이인 ‘나’. 그는 자이툰 부대에서 ‘왕샤’를 만난다. ‘나’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 때문에 고통받는, ‘그런’ 인물은 아니다.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훌륭한 예술가가 되고 싶은 ‘그런’ 인물도 아니다. ‘나’는 퀴어영화를 자임하면서 퀴어의 삶을 불행과 비극으로 묘사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나’는 ‘퀴어’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렇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왜인지 ‘퀴어’하지 않은 것 같다. 무용가로 살아왔던 ‘왕샤’는 ‘나’의 ‘보편적인’ 실패담 속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춘다.

최근 몇 년 동안 퀴어 소설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할 만큼 활성화 되어 있고 박상영은 이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작가다. 퀴어 정체성을 당연하게 밀고 나가는 소설 속 주인공은 언제나 ‘나’인 까닭에 자기 지시성과 자기 반영성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독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서 영화감독으로 등장하는 ‘나’와 『대도시의 사랑법』(2019)에 등장하는 퀴어소설가 ‘나’의 자의식을 작가 박상영의 자의식과 겹쳐 읽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퀴어소설 속 ‘나’를 작가나 내포 작가로 읽어낼 때의 쾌감은 소수자로서 경험하는 일상과 연애의 실패담, 그로 인해 발생하는 퀴어 주체의 수행성이 곧 현실 세계의 분투와 같이 생생하게 그려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소설 속에서 경쾌하고 유려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임이 분명하지만, 이성애자 중심의 왜곡된 시선에서 포착되지 않는 퀴어의 일상이 ‘진짜’라는 감각은 중요하다. 당사자성을 강조할 때 거둘 수 있는 미학적 효과는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사진1-[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출처: 국립극단
사진1-[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출처: 국립극단

지난 4월,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연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박상영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각색이란 원작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원작을 뛰어넘으려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쟁적인 오마주이다. 연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상하고 색다르다. 소설의 언어와 연극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 원작 연극에서 인물과 화자, 대사와 내레이션을 구분하고 드라마와 서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곤혹은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1인칭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을 그대로 옮겨올 때 무대에서 발생하는 ‘문장의 순간’은 관객의 해석 작용을 지연시킨다.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사건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현재지만 화자의 내레이션은 사후적이며 메타적 응시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잉여적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1인칭 화자, 즉 서사적 화자를 드라마적 인물로 변환하는 것이 좋은 각색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공동체 혹은 집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나’와 이를 현시하는 ‘1인칭’을 당사자성에 한정하지 않으면서 보편의 문제로 가져오는 방식이 관건이다. “1인칭으로 쓰인 원작에서의 주인공 ‘나’를 ‘그’로 변환하지 않”(김연재, 「각색작가의 글」,『SETUP202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프로그램북)은 각색자의 선택은 그런 점에서 유효하다. 연극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의 ‘나’는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해설자가 아니라 자기 응시의 발화를 통해 극적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로 존재한다.

소설의 ‘나’가 연극의 ‘나’가 된다는 것은 원작 독자의 상상을 구현하면서 동시에 배반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작업이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그 모험을 주저하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왕샤, 미자, 그리고 자이툰 부대원들과 오감독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무대 위에 종횡무진 시키고 관객을 그들과 한 공간에 놓는다. 120분이 흘러가는 동안, 원작에서 후경화 된 인물들이 생생해졌고 소설 속의 각기 다른 시공간이 한 장소에서 되살아났다. 이와 같은 연출은 극장을 무한히 변주되고 확장될 수 있는 1인칭‘들’의 세계로 만든다. 무대 위에서 인물이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는 순간, 또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하고 고백하는 순간, 그 인물은 개별적인 ‘나’이면서 보편적인 인간이 깃들어 있는 실존적인 ‘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에서 ‘나’의 영화를 함께 만들고 영화를 출품할 수 있게 도와주는 미자라는 인물이 연극을 통해 노련한 직장인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점이 흥미로웠다. 연극이 끝난 후 프로그램북에 나온 QR코드로 미자 중심의 스핀오프물 “최연소 과장도 퇴사하고 싶습니다”를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일하는 여성’ 미자의 일상이 잘 그려져 있다.

 

사진2-[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출처: 국립극단
사진2-[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출처: 국립극단

실패의 완성, 너머의 삶

길기도 하고 무슨 의미인지 언뜻 와닿지 않는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자. ‘알려지지 않은’은 ‘예술가’에도 해당하고 ‘눈물’에도 해당하는 중의성을 의도한 것일까. ‘자이툰 파스타’는 또 무슨 파스타일까. 단숨에 읽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소설의 경쾌한 슬픔처럼, 또 끝까지 보고 난 후에 남은 잔상으로 극장을 쉬이 빠져나올 수 없었던 연극처럼, 제목이 암시하는 바는 이야기를 다 보고 난 후에야 와닿는다. ‘순도 100%의 퀴어 영화’, ‘세상에 없는 퀴어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자이툰 부대에 간 ‘나’는 거기서 번 돈으로 영화를 만들지만, 일곱 명의 관객과 함께 자신의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성적 소수자의 고통’을 강조하고 ‘보통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지점’이 있는, 그리하여 ‘성소수자를 심하게 대상화하고 신파 코드로 점철된’ ‘패션 게이’ 오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진짜 퀴어영화를 만들겠다는 욕망과 자부심으로 살아온 ‘나’였다. 그러나 ‘나’가 만든 <알려지지 않은 보편의 사랑>은 주인공이 게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색도 가치도 없는 영화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실패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실패이고, 그런 의미에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은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난 표현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났다면 실패한 퀴어 예술가의 자기 연민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이 소설/연극을 도약시키는 것은 뜻밖에도 자이툰 파병의 경험과 거기서 만난 ‘왕샤’다. 소설 속 자이툰 부대의 주둔지 아르빌의 풍경이 극장으로 옮겨오면서, 무대의 한 벽을 차지하고 있는 벽화와 군복을 입은 자이툰 부대 병사의 모습 등 존재감과 무게감이 커졌다. 소설에서는 ‘왕샤’와의 일이 ‘나’의 퀴어 정체성을 스스로 드러내고 어떻게 퀴어성을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면, 연극에서는 자이툰 부대라는 장소가 현시되고 그곳에서의 생활이 어떤 의미였는지 보다 분명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서양화 전공C, 산업디자인 전공 A, 애니메이션 전공 B 등 인물의 캐릭터가 명확해지고 이성애자인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왕샤에게만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나’가 부각 된다. 남성 동성 사회의 체계를 가장 잘 대표하는 군대 서사와 퀴어 서사가 병치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하고 ‘벽화부대’의 조직과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왕샤가 ‘현대무용’을 전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군대와 무관할 것 같은 예술적 요소와의 충돌이 드러나기도 한다. 가령, 반복되는 벽화 작업으로 아이디어가 고갈되자 포켓몬 캐릭터를 카피하는 그림을 그리자는 제안에 대해 “우리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발휘하지 않을 거면 도대체 이 고생을 하면서 벽화를 그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라고 반대하는 왕샤의 대사는 개별적 존재의 ‘오리지널리티’를 생각하게 만든다.

국제 무용 콩쿠르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떨어진 왕샤 역시 실패한 예술가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후에야 자이툰 부대에 와서 끝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아르빌에서 ‘나’와의 관계 직후 자신의 퀴어 정체성를 부인했던 왕샤는 어느새 이성애자를 한껏 조롱하는 자가 되어 나타났다. 노래방 마이크를 훔쳐 나왔다가 결국 마이크를 잃어버리는 소동을 겪는 에피소드에서, 다 죽고 다 망해버렸다고 엉엉 우는 왕샤에게 ‘나’는 “그런 건 망했다고 하는 게 아냐. 망한 게 아니라 완성된 거야.”라고 말한다. 실패를 완성하고 또 반복하는 일. 연극은 무대와 객석을 가로질러 달리는 ‘나’와 유채영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왕샤의 모습을 오래 비춤으로써 실패의 완성을 통해 계속되는 삶을 그려낸다. 소설에서 상상했던 역동성이 살아났고 무대 위 인간의 ‘현존’을 통해 삶의 다양한 양태들이 선명하게 구현되었다.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로 끝이 나지만, 연극의 마지막은 ‘나’와 왕샤의 재회 장면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장면을 에필로그 삼아 마무리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자각이 실패의 완성을 경유하여 특별한 존재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퀴어의 삶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그리하여 퀴어를 포함하여 고민하고 방황하는 우리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다는 의미와 연결될 것이다. 나아가 연극의 결말은 예술가로서의 실패가 퀴어로서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 누군가 한 사람에게 제대로 말을 걸어주는 예술이라면 그것은 실패 ‘너머’의 완성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끝난다.

 

사진3-[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출처: 국립극단
사진3-[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출처: 국립극단

흥미로운 것은 360° 회전의자에 앉은 극장 안 관객들이 인물의 동선에 따라 시선과 몸을 함께 이동할 때, 연극 속 인물들이 극중 현실에 존재하면서도 마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보일 때의 미적 효과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캐릭터를 잘 그려내면서도 퀴어성을 대표하거나 대의하지 않는 권겸민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왕샤 역을 맡은 권정훈 배우와 다른 방식으로 연기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연기법을 비롯하여 피지컬이나 말투, 행위 등, 두 인물의 차이가 전면화 되면서 전형적인 묘사로 환원되어온 재현의 관습을 넘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퀴어 정체성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정상성’의 이분법이나 젠더 이분법을 폐기하고 우리들 속에 있는 퀴어, 우리 안에 있는 퀴어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 현실 너머를 응시하고 자기 정체성을 갱신하고자 하는 연극의 욕망과 더 자유롭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국립극단의 ‘SETUP 202’의 기획으로 마련된 공연이다. 이 기획은 새로운 방식으로 동시대 담론을 확장하기 위한 실험을 지원하는 것이다. 아직 가시화 되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가 서계동의 ‘빨간지붕’ 아래 모여들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공연과이론> 2021년 봄호에 실린 필자의 원고 “너머의 연극, 혹은 예술(가)를 위하여-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을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글 · 양근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극 창작에 참여하고 있다. 2016년 방송평론상을 수상했다. 기억과 역사의 길항 및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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