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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초인(超人)을 넘어선 범인(凡人)의 환경 이야기: 영화 <그레타 툰베리>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초인(超人)을 넘어선 범인(凡人)의 환경 이야기: 영화 <그레타 툰베리>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1.07.3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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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레타 툰베리>

우리 시대에서 ‘환경’이 ‘변화’라는 이름을 만나게 되면 늘 누락되고 마는 감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포심’이다. 요즘 환경변화가 거의 최종적으로 부각시키려 하는 의미는 ‘멸종’(滅種)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말이다. 그러면 왜 환경변화가 주는 멸종이라는 의미에 ‘공포심’은 누락되고 마는가?

 

유력한 이유가 하나 있다. 직접적인 ‘나’의 일임에도 마치 남의 일인 양 느끼게 해주는 이상한 안도감 같은 것이 강하게 스미기 때문이라는 것. 어찌보면 탄소 배출량 운운하면서 기후변화 문제를 마치 흥정할 수 있는 이슈처럼 다루려 하는 어이없는 시도들 역시 모두 공포감을 누락시키는 아주 이상한 이 안도감 때문이리라. 그 어느 나라의 정치경제 각료, 수장이라 해도 멸종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마치 남의 일인 양 환경 문제를 대하는 태도들을 보면 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보니 심지어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을 지경이다. 어쩌면 탄소배출권 이슈는 멸종의 공포를 감추기 위한 일종의 ‘가림막’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면 이쯤에서 이런 질문하나를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남 얘기할 것 없이, 나는 ‘환경’ 문제를 직접적인 내 공포심의 문제로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하지만 환경문제에서 만큼은 이런 질문을 접했을 때 여전히 우리, 아니 인간은 한 없이 경박해질 뿐이다.

 

초인(超人)을 넘어선 범인(凡人)

그 경박함을 일깨워주는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다. 영화 <그레타 툰베리>. 이 영화는 환경문제를 진정 '내 공포심'의 문제로 여기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레타 툰베리의 메시지가 그 어떤 이슈보다도 더 몸에 와닿는 이유는 단순히 보자면 그것 하나 때문이다. 환경 문제를 진정으로, 아니 온 몸을 다해 자신의 공포로 온전히 체감하고 있다는 것.

 

그레타 툰베리가 스웨덴 국회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도입부의 에피소드는 그런 공포심에 관하여 한 가지를 넌지시 말한다. 우리 모두는 평범한 인간이지만 환경 문제 앞에서는 그 공포심을 극복하려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앓고 있다는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증후군은 그녀의 '공포심'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전에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만약에 아스퍼거 증후군과 같은 증상이 영화에서 연출 된다면 어떤 장면으로 나타날까? 머지않아 나는 그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맨 오브 스틸>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어린 클라크 켄트가 갑자기 겪게 되는 감각의 증폭증상에서였다. 현실에서는 CDC(질병통제관리국)에서 규정하는 증상일 뿐이지만, 영화에서 볼 때 그런 증상이 ‘초능력’의 전조증상이라는 건 뜻하는 바가 커보였다.

 

맨 오브 스틸 중 한 장면
영화 '맨 오브 스틸' 중 한 장면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녀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은 장애라기보다 그 공포심에 반응하여 환경에 더욱 진심으로 다가가려는 초능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그레타 툰베리>에서 강조하는 그녀의 활동은 슈퍼 히어로의 현실 버전으로 느끼기에 충분하다. 지구를 지킨다는 의미에서는 다를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 변화로 인한 멸종의 위험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남의 일로 여길 뿐, 직접적으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레타 툰베리가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상황은 더 의미심장해진다. 그녀의 그 증후군은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둔감해질수록 더욱 더 예민하고 강력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초능력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환경을 향한 주권성의 회복

이 관계가 의미 있는 이유는 이렇다. 환경운동가로의 그녀는 어떤 조건이나 이득없이 오로지 자연을 향해 그렇게 반응할 뿐이라는 것. 우리는 이 경우에 ‘주권성’이라는 표현을 쓴다. 간단히 말해서 주권성이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어떠한 조건 없이, 순전히 나의 결단만으로, 오히려 갚을 수 없을 만큼 베풀기만 하는 행동을 말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키워드는 ‘환경’이 아니라 환경을 향한 나의 ‘주권성’이라고 해야 옳다.

 

이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은 정치, 과학, 법률, 종교적 견해에 따라 그 결과를 달리한다. 그러나 환경 문제만큼은 그런 조건에 조금도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건 어느 종(種)도 예외 없이 해당되는 ‘멸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멸종은 반드시 '나의 공포'여야 한다. 그레타 툰베리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공감'이 아니라 그 공포심에 대한 '절감'(切感)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보면 그레타 툰베리와 이 영화의 감독이 말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해진다. ‘멸종은 직접적인 내 공포의 문제’이고 그 문장 속에 들어 있는 ‘나’의 자리에는 남이 아니라 진짜 ‘내’가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그레타 툰베리는 환경으로부터의 공포심을 절감하게 되면 곧 자연이 돼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무동력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모습은 이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이건 일종의 용기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다시금 보아야 할 것은 공포심을 극복하여 자연이 되려는 용기, 그 자체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 용기를 발휘해야 할 시기를 이미 놓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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