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9월호 구매하기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5) - ‘불쾌한 골짜기’에서 모더니즘을 구출할 수 있을까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5) - ‘불쾌한 골짜기’에서 모더니즘을 구출할 수 있을까
  • 안치용 | ESG 연구소장
  • 승인 2021.08.31 18: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5

2020년 5월 17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C서울과 광주FC의 경기는, 과장하면 나중에 문명사적 사건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1대0 서울의 승리로 끝난 이 경기가 화제가 된 이유는 경기 때문이 아니라 관중 때문이었다.

코로나19의 초기 국면에서 방역 모범국으로 불린 한국은 무관중 중계방송 방식으로 스포츠 리그를 가동해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무관중’으로 진행된 이날 경기에서 FC서울은 관중석에다 마네킹을 설치했다. 색다른 이벤트를 기획한답시고 배치한, 서울 유니폼을 입은 리얼돌 관중의 일부가 실제 리얼돌로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국내외 언론은 리얼돌 관중 마케팅이 부적절했다고 일제히 비판했다.

 

FC서울 리얼돌 관중

비판은 리얼돌 관중의 선정성에 집중됐고, 덧붙여 리얼돌 마네킹이 공포와 혐오를 야기한다는 정신분석학을 차용한 비판이 있었다. 인간은 인간을 닮은 존재를 보면 호감을 느끼지만 사본의 닮음 정도가 원본에 아주 근접하면 오히려 불쾌함을 느끼게 된다는 심리 반응, 즉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현상을 일으킨다는 게 후자 비판의 이론 근거였다. 구단의 마케팅에 관한 고언이란 견지에서 보면, ‘불쾌한 골짜기’가 사회적으로 친근한 문제제기인 선정성과는 약간 동떨어진 지적이긴 했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불쾌한 골짜기’는 인간이 로봇 등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볼 때, 그것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더 많은 호감을 느끼게 되지만 유사성이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호감도가 하락한다는, 즉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이론이다. 1970년 일본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가 소개한 개념이다. 여기서 ‘불쾌(Uncanny)’는 독일의 정신과 의사 에른스트 옌치가 1906년에 제시한 ‘Das Unheimliche’의 영어번역이다. 이 ‘불쾌’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게 맞는지, 아니면 살아 있지 않아 보이는 존재가 사실은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는 데에서 비롯한 감정이다. 가장 비근한 예로 좀비를 떠올리면 되겠다.

‘골짜기(Valley)’는 호감도와 닮음 정도를 변수로 한 그래프 모양 때문에 생겼다. 모리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래프 상의 곡선은 크게 3개 국면으로 구성된다. 인간은 로봇이 인간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을수록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비슷한 정도가 특정 수준에 치솟으면 인간의 감정에 거부감이 생기면서 호감도가 하락해 곡선 또한 상승에서 하강으로 돌아선다. ‘Uncanny’ 혹은 ‘Das Unheimliche’가 개입하기 시작한다. 하강곡선은 ‘비슷한 정도’가 훨씬 더 강해진 또 다른 특정 수준에 이르면 하강을 멈추고 다시 상승한다. 이렇게 급하강 후 급상승한 호감도 구간은 그래프 상의 곡선에서 깊은 V자 모양을 하게 돼 ‘골짜기’를 형성한다. ‘불쾌’와 ‘골짜기’를 결합한 ‘불쾌한 골짜기’의 성립이다.

 

케임브리지대 연구 결과

2019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연구에서 인간의 ‘불쾌한 골짜기’ 반응에 관한 실험결과를 볼 수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독일 아헨공대 휴먼테크놀로지센터와 공동연구를 통해 “뇌의 전두엽에 위치한 시각피질의 활성화 정도를 통해 불쾌한 골짜기를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2019년 7월 1일 국제학술지 <신경과학>에 발표했다.(“Neural Mechanisms for Accepting and Rejecting Artificial Social Partners in the Uncanny Valley”, <Journal of Neuroscience>)

요약하면 실험참가자 21명을 대상으로 실제 사람, 마네킹, 안드로이드(사람과 구분이 어려운 인조인간),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산업용 기계로봇 등의 이미지를 보여주며 질문을 던졌고 그 반응을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해 뇌의 어떤 영역이 활성화되는지 확인했다. 연구진은 “실험 결과 참가자들에게서 공통으로 전형적인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나타났다”고 밝혔다(그 밖의 연구에 대한 설명은 ‘불쾌한 골짜기’ 용어 설명의 반복이므로 생략한다).

2011년 미국의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세이진 교수 연구팀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 연구팀은 세 가지 대상에 대한 반응을 20명의 실험 참가자 뇌 작용을 통해 살폈다. 첫 번째 대상은 실제 사람, 두 번째는 실제 사람과 아주 흡사한 인간형 로봇, 세 번째는 내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로봇이었고 각각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영상을 보여줬다. 참가자들의 뇌를 MRI로 촬영한 결과, 첫 번째와 세 번째 사례에 대해서는 뇌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인간형 로봇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영상을 볼 때는 시각 중추와 감정 중추를 연결하는 연결부에서 격렬한 반감을 보이며 다른 두 사례와 다르게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2009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연구팀이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불쾌’가 골짜기 밖에 숨어 있다면? 

아직 ‘불쾌한 골짜기’는 가설이다. 인간 심리 반응에 관한 전혀 새로운 이론이기 때문에 더 많은 실험과 검증이 필요하다. 성립 가능한 하나의 가설이라고 전제하고 논의를 이어가자면, 유사성 구현 정도의 특정 국면에서 ‘불쾌한 골짜기’를 생성하는 인간 심리는, 심리학이 아니라 인문학 견지에서 일종의 정체성 반응이라고 판단한다. 주체가 대상에게 동일률에 의거해 감성적 반응을 수행할 때, 현저한 차별성을 전제한 채 많은 동일성을 확인한다면 호감은 주체의 확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데카르트 용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면 ‘연장’이다. 그러나 차별성이 미미한 가운데 대상에게서 현저하게 많은 동일성만을 확인한다면 주체의 혼란(또는 분열)을 야기할 수 있어 정체성 사수를 위한 방어기제가 작동할 수 있다고 본다. 데카르트 용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면 ‘사유’라고 하겠다. 주체의 ‘연장’이 저지되고 주체의 침해가 우려되는, ‘분명 다르지만 같아 보이는’ 상황에서 즉자적으로 수행되는 ‘사유’. 이 ‘사유’의 국면이 ‘불쾌한 골짜기’라는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인체에 외부물질이 침입했을 때 면역세포가 작동하여 인체를 보호하며 고름을 만들어낸 것과 비슷한 풍경이지 싶다. 

골짜기에서 탈출하는 곡선은 시체 혹은 좀비라는 바닥에서 시작한다. 이 곡선이 상승해 호감도가 올라가게 하는 대상은 지각 주체에게, ‘불쾌한 골짜기’의 용어로 인간과 유사성을 확인시키면 되지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 주체에게 (인간과) 유사성 인식을 작동시킨다면 대상이 꼭 실제 인간이어야 할 까닭이 없다는 이 국면은 아직 인간세상에 등장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말하면, 주체가 판단하기에 대상에게서 차별성이 식별되지 않을 때 호감도가 다시 높아진다는 주장은 엄정하게 말해 절대 검증할 수 없으므로 ‘불쾌한 골짜기’의 현실 곡선은 그저 U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검증불가는 대상에게서 차별성이 없다는 것인지, 차별성이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의미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며 골짜기에서 탈출하는 V자 국면이 도래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에서 인조인간 클라라에서 우리는 인조인간이 아닌 인간 관점의 ‘탈출’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전혀 새로운 존재론과 인식론이 필요한 미증유의 문제이다.

‘골짜기에서 탈출하는 V자’의 우상향 국면의 판단에서는 단일 주체의 관점이 유지되어야 하기에, 상대가 실제 인간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인조인간이어서 주체가 그를 그저 인간이라고 판단해 호감을 보인다면 그것은 주체의 관점에서 인간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야지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한 (호감) 반응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위에서 조망하는 실험자만 ‘골짜기’가 생긴 것을 알 수 있을 뿐 실험실의 인간은 골짜기를 전혀 지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골짜기인가 실재하지 않는 골짜기인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제기한 문제의식과 동일하다.

장차 인간 앞에 아마 실제로 등장할 ‘골짜기’와 ‘V자’의 우상향 국면은 과도적 현상으로, 소설 『클라라와 태양』에 나오듯 주인공 클라라를 포함한 인조인간(의 등급)이 인간의 지각에 의해 확인될 수 있을 때까지만 존속할 터다. 그 이후에 현실 속의 인간은 인조인간과 ‘진짜’ 인간을 사실상 구별할 수 없을 것이기에, 자신의 추락을 야기할 함정(또 다른 골짜기?)을 일상적으로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인간에게 그 함정을 만들고 깊이를 정하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역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어서 머릿속에서만 곤혹스럽다. 만일 인간에게 그 함정을 만들고 깊이를 정하는 일을 인간이 아닌 존재가 하게 된다면, 그때는 곤혹을 운위할 단계를 넘어 모더니즘 문명의 완전한 종말을 걱정해야 할 텐데, 그것을 한가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Unheimlich 또는 Uncanny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의 ‘언캐니(Uncanny)’는 정신분석학이나 비평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를 설명하며 종종 동원되는 ‘언캐니’는 흔히 친밀한 대상으로부터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공포 감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에른스트 옌치의 운하임리히(Unheimlich)를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발전시켜 유명하게 만들었다. 운하임리히(Unheimlich)의 ‘Heim’은 영어로 ‘Home’에 해당하기에 ‘아늑하지 않은, 낯선’이란 뜻의 ‘언홈리(Unhomely)’로 영역할 수 있지만, 프로이트의 의도를 감안해 ‘이상한, 기이한’이라는 뜻의 언캐니(Uncanny)가 영역으로 일반적으로 선호된다.

언캐니는 데자부, 심령 등과 같은 인지적 불확실성의 산물인데, 언캐니를 더 잘 이해하려면 언캐니에 해당하는 독일어 ‘운하임리히(Unheimlich)’ 속의 ‘하임리히(Heimlich)’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하임리히에 해당하는 영어는 ‘Homely’여서 의미상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풍긴다. 동시에 하임리히는 Homely에 들어있지 않은 ‘은폐된, 공공의 시야에서 가려진’이란 의미를 지녀, 운하임리히(Unheimlich)로 바뀌면서 영어 단어 언캐니의 의미, 즉 친밀한 대상으로부터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공포로 연결된다.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외부로부터 은폐된 ‘나’의 공간이 갑자기 커튼이 걷어 올려지며 햇볕이 꽉 차게 들어오면서 환하게 드러났을 때 모든 ‘나’의 공간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어떤 ‘나’의 공간에선 언캐니가 분출하지 않을까.

프로이트에게 언캐니는 감춰지거나 억압된 욕망의 무의식적 발현이다. 대표적인 예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 수 있는데 초자아(Super ego)에 억눌린 금지된 욕망은 반복된 강박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다양한 형태의 기이한 느낌으로 연결된다. 언캐니에서 초자아의 긴 그림자와 이드(Id)의 스멀거리는 준동을 엿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언캐니라는 개념에는 무의식을 의식화하려는 그의 근대성의 기획이 투영된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의식화할 수 없는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은 논리상 좌초를 예정했고, 유일하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의식을 임의로 구분지어 명패를 붙이는 정도에 그치게 된다. 명패에는 그 안에 무엇이 적혔든, 텅 빈 기표 신세를 모면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것은 근대성의 조명 아래 기표로 대접받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두 눈을 뽑아버린 채 커튼이 두껍게 내려진 응접실에서 홀로 TV를 보던 오이디푸스가, 커튼이 걷히는 순간 더는 바보상자를 시청할 수 없는 늙은 맹인 노인임이 밝혀지지만 그래도 그는 TV시청을 멈추지 않는다. 

 

의식의 흐름과 대화불능

『소리와 분노』(윌리엄 포크너), 『사물들』(조르주 페렉), 『화산 아래서』(맬컴 라우리) 등의 소설은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된다. 이 책들에서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 공통으로 발견된다. 의식의 흐름 기법은 1910~20년대 버지니아 울프나 제임스 조이스 등이 시도했을 때만 해도 첨단문학 기법이었으나 요즘에는 일상용어로 쓰일 정도로 심상한 (문학) 기법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에서는 통상 광인으로 분류되지 않는 사람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상식적이다. 『소리와 분노』의 1장이 난해한 것이, 광인인 벤지의 의식의 흐름을 기술했기 때문이다. 광인의 의식의 흐름은 전혀 ‘의식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텍스트로 완결될 수 없고, 소설

『소리와 분노』가 그러하듯 광인이 아닌 다른 이들의 의식의 흐름을 통해서 보완되어 독해를 가능케 한다. 

『소리와 분노』의 제명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나오는 구절 “그것은 백치의 이야기로서 음향과 분노에 차 있고 아무 뜻도 없다”에서 따온 것인데 제목에서 포크너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차용하면 그것은 언캐니다. 언캐니한 세상을 언캐니한 형식으로 풀어냈다. 또한 포크너는 언캐니하게도 아무 뜻도 없는 것에서 뜻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소설 내러티브에서 1인칭 시점이 하나의 1인칭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라면 사실상 1인칭인 『댈러웨이 부인』과 같은 전형적인 모더니즘 소설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은, 다양한 1인칭을 직조해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각자의 시점이 모여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이므로 이때의 내러티브 방식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앵글로는 한 방향의 얼굴만을 볼 수 있기에 예컨대 두 개의 앵글이 각자 포착한 얼굴을 합쳐서 하나인 양 전체로 파악하는 것이 모더니즘 글쓰기의 의식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전체라고 부른다고 하여도 그 전체는 분할을 내포한 전체이다. 회화에서는 파블로 피카소에서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다. 

『화산 아래서』 역시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는데, 알코올중독자의 의식의 흐름을 포착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화산 아래서』가 사실상 광인인 알코올중독자의 의식의 흐름을 담았다는 점에서 『소리와 분노』와 접점을 갖는다. 

『화산 아래서』의 또 다른 특징은 대화가 대화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통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부질없는 말걸기를 볼 수 있을 따름이다. 큰따옴표가 존재하지만 항상 작은따옴표로 전락한다. 의식의 흐름 기법상 전락은 불가피했을까. 모더니즘 글쓰기의 본원적 특징으로 볼 수 있을까. 

‘대화’는 대체로 3인칭 관찰자 시점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가능하다. 1인칭 시점의 서술에서 대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화산 아래서』의 대화불능은 상호적인 의식의 흐름 또는 의식의 흐름으로 편입하는 방식일 수 있으며 객관적 현실을 주관적으로 어떻게든 정리하고 종합하려고 애쓰는 형식일 수 있기에 흥미롭다. 물론 정리와 종합이 실제론 회피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소설이 되는 것일까. 심지어 “눈을 가리고 야생마 같은 차를 몰면서 종종 길을 찾아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 

 

모더니즘과 모더니티, 포스트 모더니즘

모더니즘(Modernism)은 근대주의, 현대성으로 번역되고 모더니티(Modernity)는 보통 근대성으로 번역된다. 두 개념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모더니티는 계몽주의 이래 인류가 서구를 중심으로 이성에 권능을 부여하며 신을 변방으로 추방하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면서 과학기술 문명을 축으로 발전시킨 인간의 총제적인 인식과 사회시스템이다. 

반면 모더니즘은 특정한 시대에 나타난 하나의 태도다. 벨에포크(Belle époque)가 끝나고 1차 대전이 시작될 무렵 주창된 다다이즘이나 무의식의 발견을 통해 20세기의 시작을 알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처럼 모더니즘은 기존의 것을 일종의 되치기를 하려는 ‘새로운’ 태도다. 따라서 아무리 비관적인 모더니즘이라 하여도 기저에 진취성과 긍정이 깔려있으며 무엇보다 주체를 신뢰한다. 동시에 아무리 새로운 태도라고 주장하여도 모더니즘은 항상 기존의 것을 되치기한다. 새로움을 표방하지만, 헌 것을 새롭게 한다는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더니즘은 새 술을 담은 부대는 아니다.

일종의 태도로 모더니즘을 바라볼 때 포스트모더니즘과 구분하지 않을 수 없는데 모더니즘과 모더니티만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자주 혼동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에 있던 가장 최신의 것을 넘어서려는 태도다. 일견 ‘되치기’의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비슷해 보이나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할 수 없는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근간이 되는, 주체 혹은 자아의 해체가 모더니즘에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은 근대성의 확장을 이끈 것이지 포스트모더니즘처럼 해체를 전제한 태도가 아니었다. 

20세기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무의식을 근대성의 한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지 그동안 근대성의 영역을 지배했던 이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과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이 현상적으로 비슷해 보일지라도 각각 주체ㆍ자아 영역의 확장과 해체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사실과 허구의 구분과 경계를 넘어서기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서 드러나는 ‘사실과 허구의 구분과 경계 넘어서기’는 과학과 마술의 혼용과 연결된다. 객관적 진술로서 추월이나 넘어서기는 선행하는 것이나 경계를 필요로 한다. 모더니즘이 새로운 태도이지만 기존의 것을 ‘되치기’함으로써 ‘기존’의 저주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을 떠올리자. 경계 없는 넘어서기(초월, 추월)는 불가능하다. 

 

소실점을 일상적 경계 너머로 멀어지게 하기

앙드레 브르통의 『라자』는 초현실주의 소설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관한 문제를 담은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 모더니즘 글쓰기가 드러나는 부분은 소실점이다. 소실점은 회화나 설계도 등에서 투시해  물체의 연장선을 그었을 때 선과 선이 만나는 점으로 원근법을 쓸 때 존재한다. 

회화에서든 문학에서든 원근법이 없는 상태는 곧 물체나 인물의 크기가 그 가치의 크기와 비례해 절대적 크기를 가지는 상태다. 원근법이 작동한다는 것은 시점이 작동한다는 의미다. 보는 하나의 눈이 있다는 뜻으로, 얼핏 과학적이며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전체를 하나의 시선만으로 보는 것이므로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다. 원근법의 작동은 세계관에 명백한 한계를 부여한다. ‘소실점을 일상적 경계 너머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소실점을 없애지 않고 존재하게 하면서 일상의 경계 내에선 보이지 않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시선과 하나의 소실점에 따라 정렬된 현실이다. 

원근법에 대한 이해는 서구에 대한 이해와 일치한다. 원근법은 철저하게 특정한 시점을 전제하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서구인의 시선에 원근법을 채택해 흑인과 이슬람 사람을 대상화한 방식의 대표적인 예로 오리엔탈리즘을 들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에서 목도했듯 원근법에는 바라보는 존재를 대상화하고 배제하며 그들의 가치를 소각할 강한 경멸이 담겼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이슬람 화가들은 원근법을 열망한다. 그 열망은 태초에 주어진 조화로운 세계, 전지적 시점을 모두가 공유하는 세계가 무너지는 과정과 연관된다. 

1인칭 시점은 아무리 많이 모여도 전지적 시점이 될 수 없다. 끊임없이 1인칭 시점을 확대함으로써 세계를 확대하는 것, 다시 말해 세계 밖의 시선으로 세계를 포획해 그 포획된 시선을 종합해 세계를 해명하는 서구 세계관의 방법론은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이런 원근법적 세계관과 그 실체인 모더니즘 근대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진 지는 오래다. 그러므로 세계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변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 말을 비틀면, 복수 1인칭과 전지적 시점 세계관과 조화해 세계를 제대로 해석하고, 나아가 변혁해야 한다. 

 

의식은 마르크스, 무의식은 프로이트로 대표된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에 기반한다. 인간의 유적 특성으로 이성이 거론되고 개별인간에겐 이성적이란 표현을 쓴다. 따라서 비(非)이성은 개별적이고, 비이성의 대표선수가 감성이다.

이성과 의식이 만나는 가장 큰 접점은 사실주의다. 모더니즘도 이성과 의식이 만나는 접점 위에 있다고 판단한다. 모더니즘의 태생상 그곳을 떠나서 존재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낭만주의는 의식과 비이성이 조우하는 영역에 위치한다. 개별자의 해방과 자유, 초월 등의 욕망이 결합한 사조다. 초현실주의는 비이성과 의식이 만나는 지점과 비이성과 무의식이 만나는 지점 모두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초현실주의가 더는 유효하지 않은 사조이자 방법론이라는 간접 증명이 될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구두(口頭), 기술(記述), 기타 온갖 방법으로 사고의 참된 작용을 표현하려고 하는 순수한 심적 오토마티슴이다. 이성에 의한 일체의 통제 없이, 또한 미학적, 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관 없이 행해지는 사고의 진실을 기록한 것이다.”는 브르통의 말은 얼마나 허황한가.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이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의식 외의 영역을 이성을 통해 해명하려는 시도이므로 비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이다. ‘Uncanny’의 출발점은 ‘Canny’다.

 

1인칭

『소리와 분노』에서는 시제의 혼용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런 시제의 혼용은 흔히 찾아볼 수 있으며 시제가 뒤섞인다는 것은 관점이 섞인다는 것과 비슷하다. 혼란스럽지만 혼란을 통해 현실의 통상적 맥락에서 잡아내지 못할 확고한 메시지의 질서를 실현한다. 질서의 혼란보다 혼란의 질서가 모더니즘과 더 친하다. 『소리와 분노』에서는 철저하게 1인칭을 쓰면서 1인칭 세 개를 동원해 하나의 1인칭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해 진술의 입체성을 구현한다. 전술한 모더니즘 양식이다. 

세 개의 1인칭이 음각의 형태를 취한 것이 이 소설의 독특한 구조이자 탁월한 형식미다. 다시 말해 『소리와 분노』에서는 말해야 할 대상을 직접 말하지 않고 주변 인물 세 사람의 시선을 통해 그 대상을 조명하는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한다. 이런 음각 방식은 주체와 자아가 배제된 것처럼 보이지만 역으로 주체가 선명해지는 효과를 거둔다. 나아가 마지막에 등장하는 전지적 시점 덕분에 사태가 더 명확하게 규명된다. 『소리와 분노』는 세 개의 1인칭 시점을 통해 입체적으로 세계와 캐릭터를 해석하고 있으며 전지적 시점의 부과를 통한 전면적이고 새로운 구성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첨단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

1인칭 시점은 항상 부분적 해석에 불과하므로 아무리 많은 1인칭을 동원하더라도 총체적 진실과 세계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전지적 시점이 갖는 총체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소리와 분노』에서는 마지막에 전지적 시점을 부과함으로써 그런 한계로부터 비상한다. 모더니즘 형식에 사실주의 효과. 이런 조합은 모더니즘이 근대성의 포획에서 탈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나는 누구인가? ”예외적으로 이번에만 격언을 끌어들여 말하자면, 사실상 이런 질문은 모두 왜 내가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아는 것으로 귀착되는 문제가 아닐까?

- 『나자』 앙드레 브르통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