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안철수는 상징되지 않는다
안철수는 상징되지 않는다
  • 서동진
  • 승인 2011.10.10 19:10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철수 현상’이 말 그대로 번쩍하고 지나갔다. 한국 정치에 무언가 심상찮은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전조인 양 갖은 법석이 벌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그런 일도 있었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는 세간의 건망증은 허탈함마저 느끼게 한다. 물론 꾸준히 안철수 현상을 들먹이는 호사가들이 있지만, 그것은 정작 자신의 정치적 속셈을 치장하기 위한 양념 정도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안철수 현상에서 나타났듯이…’ 운운하는 이야기는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안철수 현상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양태로 바뀌어 지속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안철수의 ‘아름다운 양보’로 야권 후보 자리를 꿰찬 박원순 변호사에게 관심이 옮겨갔기 때문에, 그 현상에 담긴 의미는 이제 다른 인물을 통해 현상한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이는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출마가 거의 확실하고 나아가 당선까지 예약해놓은 듯 간주되는 한나라당의 박근혜를 대신할 인물을 학수고대하던 이들에게, 누군가 거창하게 말했듯이 안철수라는 폭발력 강한 ‘잠룡’의 부상은 쾌재를 부를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박근혜의 ‘대항마’가 나오기를 절박하게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 야당에 의한 정권 교체라는 것에 시큰둥하고, 설령 원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회 체계를 얼마나 바꾸어낼지에 더 큰 관심을 두는 이들도 있다. 그들에게 안철수 현상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그런 축에 속한다. 이런 전제에서 안철수 현상에 대해 몇 가지 곱씹어보고 싶다.

명사의 정치? 모범적 신자유주의자?

안철수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 듯하다. 하나는 안철수 현상을 정치의 쇠퇴라고 보는 시선이다. 안철수 현상은 본래의 정치, 즉 ‘대표의 정치’라고 할 만한 것을 위축시키고 ‘명사(名士)의 정치’로 정치를 뒷걸음질치게 했다는 견해다. 그들은 민주주의적 정치가 제도화되기 위해 정당정치 같은 제도화된 정치의 메커니즘을 정상화하고, 또 그것이 제대로 작동되게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소통의 정치’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답답한 공론일 뿐이다. 이들은 대표를 자처한다는 그 정치세력, 대표적으로 ‘정당이 과연 누구를 대표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들은 대표돼야 할 자들과 소통하는 데 무력하고, 결국 국민은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껴 자신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정치적 지도자를 선택하려 한다는 것이다. 저널리즘적으로 표현하면, ‘사람들은 정치권을 불신한다’. 그런 처지에 정치를 다시 정치권으로 돌려보내자는 것은 답이 아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좇을 때 안철수 현상은 대표의 정치가 처한 불임 상태에서 벗어나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정치의 진보일 따름이다. 따라서 안철수 현상을 반색하며 지지하는 이들은 대표의 정치가 직면한 한계를 우회적으로 고발한다. 그러나 소통을 증대시킴으로써 대표의 정치가 극복된다고 손쉽게 가정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안철수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이들이 쏟아내는 주장은 그 주인공인 안철수의 정체에 쏠려 있다. 이들의 생각은 간단하다. 그가 모범적인 신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을 지탱해주던 몰락하는 옛 기득권 세력들은 더 이상 인기가 없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나 극우지식인단체, 깡패조직을 연상시키고 ‘알바생’을 동원해야 고작 운신하는 사이비 시민단체들은, 우파에게도 매력이 없다. 그들이 내놓는 주장은 저속하고 유치한 ‘이데올로기적 잡탕’이다. 이들은 그저 막연한 반공-반북주의, 진보정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알레르기, 새로운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공포 등이 뒤섞인 단말마적 주장만 쏟아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그악하리만치 전투적 자세를 보여주는 이유는 이런 이데올로그들이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에서 가장 위태로운 처지에 몰린 룸펜적 계층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정작 지배세력은 이들과 섞이지도 교감하지도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체제를 쥐락펴락하는 지배집단은 아주 유연하고 세련되며 우아하다. 기업지배를 놓고 ‘가문의 전쟁’을 벌이는 재벌은 ‘긍정의 힘을 믿자고,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허풍을 치고, 몇몇 학생이 시장만능주의적 학교 구조조정에 반대했다고 형사고발을 서슴지 않는 학교의 법인을 운영하는 기업은 ‘사람이 미래’라며 콧등을 시큰하게 하는 너스레를 떨 수 있다. 지배집단은 전방위적 미디어 캠페인을 통해 언제든지 한국 사회의 좋은 가치를 선점할 수 있다. 나아가 안철수 현상과 그 뒤를 이은 박원순 열풍은 모두 지배집단에 해가 될 게 없다.

안철수는 기업가적 정신을 대표하는 벤처 자본가였다. 그는 혈연·학연·지연 등의 정실과 부패에 오염되지 않은 인물이다. 자신의 열정과 재능, 빈틈없는 자기관리를 통해 꿈을 실현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특권과 담을 쌓은 ‘쿨한 인물’처럼 보인다. ‘노동자’라는 거북한 말보다는 ‘인적자본가’라는 말이 자신에게 더 유용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잘 아는 지배집단에 안철수는 그런 인적자본의 이념을 체현하는 화신이다. 귀 따갑게 ‘고용 창출, 복지 증대, 세금 증대’를 외치는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울 획기적인 대안, 희망을 가진 시민들의 자기 돌봄의 기획이라는 박원순표 시민운동은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니 ‘협치’(Governance)니 하는 이름으로 수십 년간 나팔을 불어댄 신자유주의 강단 지식인의 공허한 말보다 수천 배 더 쓸모 있고 완벽하게 그 정신을 구현하는 대안이다. 어느 은행의 철면피한 광고처럼 퇴직한 중년의 사내가 재래시장에서 짜장면 집을 창업해 수타면 몇 번 더 쳐 자신의 꿈을 키우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희망찾기 시민운동’은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이라는 저 유명한 신자유주의적인, 금융화된 빈곤 구제안 못지않은 명성을 얻어 언젠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에서 찬사를 들을 날이 있을지 모른다.

지배집단에 해가 될 게 없는

▲ 교외 주택(1998). <한겨레> 자료 사진.
박원순은 물론, 그를 자신의 멘토로 추어올리던 안철수야말로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대대적으로 생산해내려는 인간의 모습을 축약한 아이콘이 아닐까? 안철수와 박원순이라는 인물에 쏠린 관심이 바로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가장 잘 의인화한다는 점에서 비롯됐다면? 안철수 현상은 박정희 정권 이래 보수세력이 의존해온 보나파르티즘적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기획으로 볼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아무도 대표하지 않음으로써 지배집단을 대표하는 것이 보나파르티즘이라면, 한국에서 말하는 ‘보수’ 혹은 ‘수구’란 바로 보나파르티즘의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보수나 수구는 평등을 향한 변화를 가로막고 억압할 때는 이롭지만 또 다른 변화, 즉 자본에 유리한 끊임없는 변화인 영원한 구조조정, 혁신이라는 변화에는 걸림돌이다. 더욱이 1987년 민주화 이후 평등을 향한 총체적 변화, 즉 다른 체제로의 이행은 희박해진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지배집단은 자신의 가치와 이념에 의존하는 정치집단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안철수는 그런 변화를 마침내 개시하는 인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대표의 정치가 위기에 처했다며 그것은 곧 정치의 쇠퇴를 알려줄 뿐이라고 개탄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대표’를 문제 삼는다. 안철수 현상을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화신이 출현하고 지지를 받는 과정이라 비판함으로써 지배집단이 스스로 지배집단으로서 자신을 대표하는 과정으로 비판하는 이들 역시 ‘대표’를 문제 삼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표의 정치가 안철수 현상과 그에 대한 견해를 진단하는 열쇳말이리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대표의 문제인가 소통의 문제인가

첫 번째의 비판, 즉 정치를 정상화하기 위해 안철수 현상을 경계하자는 자유주의적 비판에 관해 생각해보자. 이런 비판은 한두 번 되풀이된 이야기가 아니므로 그리 낯설지 않다. 특히 안철수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들이 지난 수십 년간 선거철을 즈음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때마다 ‘새로운 리더십’ 운운하는 소동은 ‘미디어 정치’ 혹은 ‘팬덤 정치’를 개탄하는, 역시 똑같이 반복되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 비판은 정당정치에 대한 신뢰를 복원하고 정치적 판단과 결정을 효과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잊지 않고 되풀이했다. 대표의 정치 자체를 무시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정치의 대표적 형식인 정당정치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단히 기각하는 초자유주의적 대안은 무시하자. 그들은 주권과 대표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며, 권력은 사회적 관계를 조정하고 규율하는 힘의 관계 그 자체이므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저항을 도모해 현재의 신자유주의에서 기꺼이 벗어날 수 있다고 강변한다. 그런 발언은 더없이 화려하고 매력적이지만 윤리적 호소력을 빼면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이런 식의 주장은 화폐라는 초월적 추상을 무시하고 우리 자신의 경제적 교환을 조직하자고 강변하는 식으로 비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돈은 그저 약속을 담은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하다고 손쉽게 조롱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지폐 한 장에 깃든 추상적인 약속 혹은 지금 이야기하는 맥락에서의 표현대로라면 대표의 논리가 바로 세상을 움직이고 지배한다.

그렇다면 안철수 현상을 대표의 문제로 놓고 현실정치를 다시 정상화하자는 유의 주장을 되새김질해볼 이유가 있다. 이런 주장은 안철수 현상을 ‘대표의 위기’로 진단한다. 사람들은 기존 정당에서 자신들이 대표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때, 바로 자신을 제대로 대변해주고 나아가 제대로 된 대표를 보증하는 행위, 즉 소통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진단은 당연히 그와 짝을 이루는 해법을 제안한다. 대표가 위기를 겪고 있다면 제대로 대표하기 위한 방책을 찾아내서 실행하면 된다. 따라서 ‘국민과 소통하는 정당’이라는 해법을 놓고 많은 아이디어가 돌출한다. 국민배심원, 당원선거, 국민경선 운운의 절차부터 시작해 갖은 대안이 도입되고 실행됐다. 그렇다고 대표의 위기가 해결될 리 없다. 이미 대표의 논리 자체가 변형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표는 여론조사와 다름없는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투표라는 정치적 행위는 여론조사라는 미디어적 이벤트보다 나을 것도 없고 다를 것도 없게 되었다. 투표라는 대표하기의 실천이 가정하는 그 대표되는 주체가 인민이거나 시민이라면, 여론조사라는 행위가 가정하는 의견의 주체도 역시 인민이나 시민일까. 제정신이라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대표라는 데 있지 않고 대표돼야 할 주체 자체가 정치의 지평선 위에 없다는 것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일부 공화주의자들은 사람들이 갈수록 정치에 무관심해짐으로써 민주주의에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거꾸로 수많은 이슈와 쟁점을 중심으로 정치가 조직되는 현상, 즉 정치가 너무 많아졌다고 끈질기게 개탄해왔다. 그들은 대표돼야 할 주체는 각양각색의 이해관심에 따라 잘게 분화되고 또 시시때때로 이합집산하는 소비자-시민으로 바뀌어버렸다고 우려한다. ‘불량 자동차 리콜을 위한 시민모임’이나 ‘오수처리장 유치에 반대하는 시민모임’에서의 ‘시민’이 공화주의자들이 이상화해온 그 시민과 같은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이란 수없이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정치적 문제로서 구성하고, 또 그렇게 형성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보편적인 주체다. 구체적인 생활의 문제를 겪는 개인과 주권적인 시민이 다른 사람일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사회학적 현실 속의 개인과 정치적 공동체에 속한 개인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주권적 대표라는 원리를 통해 작동하는 민주주의에는 항상 고유한 한계가 있다. 대표의 정치로서 민주주의, 즉 선거-대의제 정부는 그것이 ‘약속한 만큼 제대로 대표하는가’ 하는 물음에 끈덕지게 시달리게 돼 있다. 그리고 대표의 정치로서 민주주의는 자신을 보완하고 교정하기 위한 다양한 권력을 생산해왔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인 피에르 로장발롱은 이를 대표로서 민주주의의 필수적 부수물로 ‘대항민주주의’(Counter-democracy)라고 불렀다. 그는 대항민주주의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로서 △감독(Oversight) △예방(Preventive) △판단(Judgement)의 권력을 든다. 그리고 대항민주주의가 대표의 민주주의를 압도하게 될 때, 정치는 ‘몰정치적인 것’(the Unpolitical)으로 전락해버린다고 말한다.

전문가와 여론조사에 위임된 정치

이는 물론 역설이다. 대표하는 권력이 얼마나 충실히 자신을 대표하는지 감독하고 보장하며 판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와 절차, 행위가 거꾸로 대표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기 때문이다. 로장발롱이 대항민주주의에 내재한 위험이 바로 몰정치적 정치로의 전환이라고 말할 때 염두에 둔 것도 이 점일 것이다. 인민과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주체가 서 있는 자리는 실은 이런저런 구체적인 문제들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자신을 대표하는 이들을 찾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안에서 정의되고 제안되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그때 자신을 대표하게 될 인물은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전문가일 뿐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자유주의자들에게 정치란 능력주의 원리를 통해 전문가들에게 위임하는 것을 뜻한다”고 했을 때, 그가 말한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적나라하게 실현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인민이나 시민으로서 자신을 대표한다는 것은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에서 바로 도출되지 않는다. 인민 혹은 시민으로 자신을 대표한다는 것은 다양한 문제를 초래하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상징화하는 일을 가리킨다. 그에 따라 우리는 구체적으로 현실적 문제를 총체화된 세계의 산물로서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이 공화주의자가 말하는 인민의 주권으로서 민주주의 혹은 대표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론조사는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세계를 상징적으로 총체화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효가 다한 것처럼 보이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당파로 분할된 현대 자본주의 정치의 역사적인 궤적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수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정책의 묶음 사이의 대결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두 정치는 서로의 특색으로 가득 찬 정책들의 계열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이는 차라리 모든 사회문제에 대한 각각의 정책을 망라하는 두 싱크탱크 사이의 대결로 현대 정치를 회고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는 이들도 적어도 ‘그때에는 이데올로기가 횡행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적어도 그때의 정치란 말 그대로 사회문제를 집단적으로 상징화하는 두 개의 시도 혹은 기획들 사이에 펼쳐지는 갈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언제부터인가 정치란 사회문제만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신자유주의적 전환에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이들이 공화주의자라는 점은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이제 정치란 사라지고 오직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치, 정치 이후의 정치만이 횡행한다고 개탄한다. 이런 생각은 공화주의자들의 것만은 아니다. 적대적 사회관계가 정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치의 보편적 주체를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권적인 시민이나 인민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을 말한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상징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입장에 설 때, 현재 펼쳐지는 보편적 복지 논쟁 같은 것은 성에 차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한 정책으로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고, 지금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상징화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대표를 소멸하는 소통의 역설

이를테면 30년 전 군부독재를 무너뜨리자고 했을 때, 군부독재란 일종의 총체적 상징화라고 할 수 있다. 군부독재는 거의 모든 종류의 불평등과 부자유를 초래하는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떤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원인이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원인은 우리가 살아가는 경험적 현실 속에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대상을 가리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낳는 원인의 원인, 달리 말하면 낱낱의 원인들 사이에 놓인 차이를 넘어 그것을 동일하게 묶어주는 원인들 사이의 관계를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표의 위기는 더 많은 소통을 통해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에게 더 다가서려고 더 많은 소통을 위해 미니홈피에 열심히 글을 올리고, 트위터에 글을 올리고, 페이스북 방문자들을 관리하는 것은 정치의 목적을 검색엔진의 검색어 1위에 오르는 것에 두는 것과 같은 짓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소통을 통해 만회된 효과적인 대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외려 대표 자체의 소멸을 볼 따름이다. 대표라는 것이 이미 대표되기를 기대하는 이들의 의견을 종합함으로써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표되는 자들을 인민 혹은 시민으로서 만들어내는 실천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대표로부터 실감나는 소통으로 나아가자는 주장은 대표의 정치를 향상시키기는커녕 대표 자체를 위기에 몰아넣을 위험이 다분하다. 무엇보다 그것은 대표돼야 할 현실 자체를 상징화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런 착오는 안철수 현상을 신자유주의 정치적 리더십의 출현으로 경계하자는, 짐짓 진보적인 주장에서도 엿보인다.

김대중 정권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았던 차세대 정치 지도자를 꼽자면 단연 문국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재난을 피해 ‘고용’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비책이 있는 인물처럼 보였다. 그가 경영하던 사업장에서 실행되던 새로운 경영 기법은 곧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말하던 유연안정성이니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이니 지식경영이니 하는 온갖 사탕발림의 말들을 완벽히 실현하는 듯 보였다. 그러니 이런 만능특효약을 가진 이에게 구애하지 않을 정치세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국현과 안철수, 박원순 같은 이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기존 정치세력이 문국현을 자신의 들러리로 삼으려 했던 것과 달리, 안철수 같은 이는 자신을 스스로 정치적으로 세력화하려 한다. 모범적 신자유주의자들로 보자면 이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 속에서의 안철수는 아마 다른 인물일 것이다. 그것은 안철수라는 인물이 살아온 이력과 그가 제시하는 정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즉 그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따져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특성일 것이다. 알다시피 문제는 안철수가 아니라 ‘안철수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서 신자유주의적인 것은 그의 개인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표현되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고이다. 아마 문국현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모순을 제어할 수 있는 획기적인 엔지니어였을지 모른다. 그는 전 정권의 훌륭한 컨설턴트로서 구실을 했다.

그러나 안철수 현상에서 나타나는 안철수는 다른 인물일 것이다. 안철수 현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대표의 정치라는 민주주의적 원리를 더 이상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다. 안철수 현상에서 충격이랄 게 있다면 그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의 정치를 위해 마련된 오랜 제도적 유산인 정당이 없어도 얼마든지 정치를 잘할 수 있다. 조직과 자금? 그런 것이 정당이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를 대신할 만한 것은 있다. 조직? 시민사회의 네트워크와 무엇보다 소셜 미디어(Social Media)가 있다. 자금? 그야 정치 펀드를 조직하면 된다. 자신을 지지한 자들에게서 펀드를 모아 선거 뒤 얼마간의 이자나 배당금을 붙여 되돌려주면 된다. 따라서 안철수 현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대표의 정치로서 정당이 가진 많은 제도적 장치로서의 특성은 신자유주의적 테크닉을 통해 얼마든지 청산하고 해소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된다. 그렇다면 대표로서의 정치를 구체화하는 것으로서의 정당은? 당연히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면 안철수 현상에서는 대표해야 할 것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표한다는 것이 이미 주어진 의견들을 대표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자신을 대표한다고 인지하는 대표되는 대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라면, 즉 시민 혹은 인민이라는 것을 창조하는 일이라면 말이다.

원자만 남고 클리나멘은 사라진 시대

안철수 현상이, 신자유주의적 지배세력이 마침내 자신을 대표할 수 있게 변화하는 과정이라 말하는 것은 착오다. 유럽과 미국에서의 악명 높은 ‘제3의 길’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신자유주의적 정치란 바로 그 대표의 정치를 표류시키는 과정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무엇인지를 상징화할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한다. 상징화되지 않는 세계는 대표할 수 있는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자연적 사실처럼 주어진 현실의 부산한 움직임만 있을 뿐이다. 금융시장의 지수와 신용등급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물가를 안정화하는 것이 정권의 최대 목표가 되고, 테러나 폭력과의 투쟁이 사회적 안전을 지키기 위해 정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면, 우리는 정치가 고사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말했듯이, 사물들의 세계는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폭력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원자들만으로는 세계를 만들어낼 수 없다. 세계가 있으려면 최소의 ‘편의’(偏倚), 즉  클리나멘(Clinamen)이 도입되어야 한다. 역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개인들과 사실들로 이뤄진 사회란 없다. 여기에도 그 최소의 편의, 즉 ‘폭력’이 도입돼야 한다. 그 편의를 도입하는 폭력이 정치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폭력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에 대한 상상을 산산조각내는 폭력을 가리킨다. 안철수 현상은 그 최소의 편의를 제거한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징후일 것이다. 슬픈 일이다.

_____________________

/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문화평론가. 저서로 <록, 젊음의 반란>(1998), <디자인 멜랑콜리아>(2009),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2009) 등이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서동진
서동진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