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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왜 유희를 인정하지 않는가?
비평은 왜 유희를 인정하지 않는가?
  • 송아름 l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 승인 2021.12.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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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된 비평의 속도에 대해

“미디어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라는 것은, 마치 슬로건처럼 익숙한 문구가 됐다. 서사·매체·관람의 영역과 관계되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의 변화는 그만큼 새롭고도 놀라운,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전통적인 영역에서조차 그 방향을 예측하기 힘든 수용자의 관람 태도나 방식은 미디어의 변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바뀌며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디어에 대한 수용자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갑작스럽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국경까지도 이렇게 빠르고 쉽게 넘나들 수 있게 됐다는 점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심적인 이질감 혹은 경계가 물리적인 장벽보다 훨씬 견고하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문화와 인종을 다룬 작품에 대한, 전례 없는 유연함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면서 그만큼의 ‘해석’을 쏟아냈다.

‘현상’ 이후 따라붙는 수많은 ‘해석’은 물론 비평의 몫이다. 이 특별한 현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과연 무엇이 그런 현상을 만들어낸 것인지에 대한 진단은 비평의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종종 “뭐 그렇게까지 볼 것 있느냐”라는 ‘초과’와, “왜 이 부분밖에 보지 않느냐”라는 ‘미달’이 비평의 역할에 의심을 보내지만, 갑작스러운 현상에 대한 의미화는 아직 유효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젠 비평에 대한 다른 고민들, 가령 미디어의 변화에 따라갈 만큼 속도를 올리고 있는가, 적절한 비평의 속도는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할 듯하다. 비평이 전제하는 ‘의미화’는 이 엄청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채, 지극히 전통적인 독법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평이 변화의 속도를 무작정 따라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틀에 갇혀 현 상황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가 아직까지 비평 깊은 곳에 내재돼 있다는 점이다. 현상과 해석 사이의 괴리. 이는 현재의 비평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초과나 미달 즉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현상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느냐의 문제. 이는 곧 해석이 현재의 시각으로 현상을 바라보고 있느냐와 연결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시선은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올 한 해 가장 주목받았던 작품 <오징어게임>에서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 이 괴리는 비평의 지연이 무엇에서 기인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오징어게임>은 갑작스런 관심에 대한 내부적 의아함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영역에서 튀어나온 외부의 신선함에 대한 환호가 뒤섞이면서 말 그대로 담론이 폭발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거의 모든 매체에서 이 현상을 다루면서 내놓은 ‘공통된’ ‘해석’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이는 <오징어게임>의 실제 현상을 담아내지 못한 채 비평이 원하는 것으로 의미화하는, 비평의 고질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징어게임> 포스터

<오징어게임>을 향해 쏟아지는 관심에 대부분의 비평들이 내세운 이유는 이 작품이 담고 있다는 사회적 의미였다. 이미 많은 이들이 내면화할 정도로 만연한 빈부의 격차, 코로나 국면 이후 더욱 심각해질 것이 확실한 계급과 계층의 간극과 충돌 등은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끈 <오징어게임>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틀이었다. 즉 전 세계인이 이 작품에 환호를 보내는 이유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 그러니까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한다고 믿는 문제의식이 이 작품에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인기는 많은 이들이 고통받는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한편으로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수용 혹은 분노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현상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 어딘가 찜찜하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평생 ‘부’의 영역에 속하지 못할 확률이 높은 다수의 관객들이 정말 <오징어게임>의 문제의식에 동의하여 환호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작품 내부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즐기면서까지 말이다. 이 명백한 괴리는 관객들이 보여준 현상을 비평이 전혀 담지 못한, 아니 담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엄밀하게 따져보자. <오징어게임>이 정말 ‘빈부의 차’를 치열하게 그려낸 작품인가? 이 게임 자체가 더 이상 재미있는 것을 찾지 못한 부자들의 놀이판이었다는 점에서, 빈부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작품의 초기 설정일 뿐 해당 문제의식이 작품의 전체를 관통한다고는 보기 힘들다. 만약 이 작품이 빈부의 차이에 대해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작품 속 게임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현재 빈부의 차이라는 것이 얼마나 내밀하며 얼마나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인 지가 가시화 됐어야 했을 것이다. 가령 갑작스레 공정을 내세우기보다는 게임의 내부에서도 사소한 자본의 차이를 측정해 불이익을 주거나, 신분상승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이긴 자에게 상금을 주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빈부의 차이’라는 문제를 지극히 소재주의적 프레임으로만 활용할 뿐이다. 기훈의 노조 이야기와 일남의 일탈은 스치듯 지나간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시작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에서 집중한 것은, 간결한 게임에서 오는 재미와 인물들의 의상이나 공간의 현란한 색상의 배치였다. 그리고 관객들은 정확히 이 지점을 관통하며 작품을 즐겼다. 그들은 작품에 등장한 게임을 직접 해보기 위해 게임의 룰을 찾고 달고나를 만들었으며, 작품 속 등장인물과 동일한 의상을 입고 즐거워했다. 이것이 <오징어게임>을 둘러싼 현상이었고, 인기의 실체였다. 그렇다면 이 유례없는 인기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유희로 소비되기에 매우 유용한, 그러니까 남녀노소, 인종과 문화를 가리지 않고 특별한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배치했으며, 그것이 관객에게 마치 작품 내부에 속하는 것 같은 희열을 주기 적합했다는 결론일 것이다. 이 작품은 서사적 해석을 넘어 유희로서 작품을 즐길 수 있는 매우 큰 시사점을 던지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닌 유희의 가능성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았다. 아니, “언급될 수 없었다”라는 말이 더욱 정확할지 모른다. 빈부의 차이라는 문제와 인기의 어울리지 않는 연결은 비평 내부의 의미화에 대한 무의식을 드러낸다. 소재를 중심으로 끌어온 비약은 세계적 환호의 기저에, 거대한 사회문제에 대한 공감과 그것에서 비롯된 호응과 같이, ‘가치’ 있는 문제가 내재해야 한다는 인식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어떤 작품이 가치있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서사적으로 깊고도 중요한 사회적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현상’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해석’이었던 것이다. 전 세계적인 환호는 우리가 신음하는 현실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진단, 이를 넘어 그래야한다는 착각이 바로 이 중심에 있다. 이런 틀 속에서 유희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될 수 없다. 무엇을 보고 단지 즐긴다는 것, 이 행위는 비평의 관점에서 ‘가치’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유희만으로도 작품의 가치는 충분하다. 유희 그 자체가 화합이든, 2차 창작이든, 패러디이든, 놀이이든 무수한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현상과 해석을 동시에 내재한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그저 즐거움만으로 가치는 넘친다. 게다가 이미 수용자들이 이를 당연하게 즐기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제작에서부터 어떻게 소비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짧은 콘텐츠의 증가나 배속을 높이며 빠르게 많은 작품을 감상하려는 수용자들의 관람 방식은 서사적 의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잉여의 담론이 구성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킨다. 이런 현상을 과연 유희를 인정하지 않는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분명 미디어도 관객도 변화하고 있지만, 비평은 그럴싸한 가치와 의미의 무게를 등에 업고 스스로의 속도뿐 아니라 존재론에 대한 고민 역시 지연시키고 있다. 현상이 너무나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이를 어색하지 않게, 그리고 분명하게 수용할 수 있는 해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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