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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그들의 삶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들의 것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 다큐 < 미싱타는 여자들>
[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그들의 삶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들의 것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 다큐 < 미싱타는 여자들>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2.01.1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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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그의 얼굴을 화폭에 남긴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화가는 그가 어떤 선과 어울리게 살아왔는지, 어떤 색과 같이 살아왔는지, 그리고 오롯이 홀로 하나의 화폭을 차지하는 것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 등을 알았을 때에야 한 사람을 그림으로 담아낼 용기가 그리고 이유가 생기지 않을까. 다큐 <미싱타는 여자들>이 인물들의 이야기와 초상화로의 이행으로 처음과 끝을 잡은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개별 인물들에게 전적으로 카메라를 할애하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명확하게 이야기되지 않은, 혹은 과잉 이미지로 소비되는 1970년대 청계천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이 굳건한 결심에서 시작된다.

다큐 <미싱타는 여자들>은 우리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1970년대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일해온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을 중심으로 당시의 노동과 노조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간다. 12, 13살에 ‘시다 해 본 적 있냐’는 질문과 얼떨결에 튀어나온 ‘네’라는 대답으로 공장에 ‘취직’이 되거나, 못 사는 집이 아니었는데도 여자는 공부할 필요 없다는 아버지의 완고함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공장을 선택한 것 등 그들이 일을 시작한 경로나 이유 어디에서도 그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나름의 사정들로 일을 시작했지만 동일하게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동일하게 힘든 공간으로, 동일하게 어떤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는 청계천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떤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 와 공간, 그리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고통’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고통’에 방점을 찍은 것은 이 상황이 현재까지 유효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청계천 피복 공장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은 전태일 열사이다. 청계천 피복 공장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왜 노동법이 있었음에도 지켜지지 않았는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전태일과 그와 뜻을 함께한 이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리고 결국 좌절 속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등은 오랫동안 1970년대의 서두에 놓이면서 당대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설명해왔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역사의 서술은 어딘가 이상하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대학생들의 각성, 그로 인해 더욱 강력하게 불붙은 반독재 운동으로 경로를 틀면서 전태일 이후의 노동자들은 정작 서술에서 지워왔기 때문이다. 반독재 투쟁과 연결되지 않은 사건들은 역사 페이지에 자리 잡을 수 없었고, 설사 몇몇 사건이 변곡점으로 설정된다 해도 반독재 투쟁과의 연결은 필수적이었다. 즉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에도 ‘정말 죽을 것 같아서’ 목소리를 낸 노동자들의 투쟁은 역사의 중심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졸려서 뛰쳐나왔다 마치 기계처럼 되돌아가고, 견딜 수 없을 만큼 불편하지만 자리가 좁아 무릎을 꿇고 일해야 하며, 명절이면 아예 철야로 공장의 미싱 앞에 짐을 부려놓고 일할 각오를 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된다. 노동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은행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한자를 알려주고, 통장에 돈을 넣고 빼는 일을 숙제로 내주는 평화교실에 가서야 태어나서 자신의 본명을 처음으로 써봤다는 이의 진술만으로도 그들의 역사에 주목할 이유는 충분하다. 다큐 <미싱타는 여자들>이 주목하는 것, 그리고 방식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거대 담론 속에 묻혀 있던 그들의 기억을 개별적으로 소환해 낸다. 당시의 ‘어린’ ‘여성’ ‘노동자’에 대해 명확하게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노조라는 것을 알고 또 참여하게 된 것은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서였다. 또 그곳에선 함께 밥을 먹고, 잠깐이라도 함께 놀러 갈 수 있고, 서로를 안타까워하며 서로에게 미안해 했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승리를 맛봤던 순간은 10시에 시작하는 평화교실에 갈 수 있는 8시 퇴근이 가능해졌던 때, 내가 아는 이들이 불법으로 야근시키는 공장의 차단기를 내리고 다니던 때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노동 운동의 의미를 찾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성취감을 맛보고 있었다. 너무 어려 유치장에 넣기 위해 경찰들이 주민번호의 생년월일을 조작해야 했던 소녀들이 노조에 뛰어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자신이 놓인 노동의 공간을 바꾸고 싶다는 것, 나는 이렇게 일했지만 그 다음에는 이러면 안 되지 않겠느냐는 안타까움이 중심에 놓여 있었다.

<미싱타는 여자들>이 성취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작품은 그들의 연대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것 자체로 어떠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공장에서의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커질 때 당대 정치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전혀 배치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당시 같은 유치장에서 대학생 언니들은 화장실도 보내주고 요구사항을 들어주면서도 자신들에겐 툭하면 욕설이 날아오고 접견은 커녕 화장실도 못 가게 하고 심지어 열흘 넘게 속옷도 갈아입을 수 없게 했던 차별, 그 억울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역사적 서술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를 건져내고 있었다. 젊은, 아니 어린 시절 그들이 함께 했던 사진들 속 이야기는 이렇게 막을 올렸다. 굳이 그들을 제2의 전태일이라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노동과 노동자로서의 담론으로 충분히 그 뒤를 이어가고 있다.

 

다큐의 첫 장면, 신순애와 이숙희, 임미경은 들판에 놓인 세 대의 미싱과 그 앞에 놓인 천 들을 보며 어떤 일감이 더 어려울지 쉬울지를 가늠하며 농담을 한다. 그리고 익숙하게 발판을 밟아 자신의 이름을 천에 기우며 잠시 과거를 회상한다. 화장실 한 번 갈래도 미싱을 넘고 몸을 접어야 했던 좁은 공간에 대한 기억, 그리고 이렇게 좋은 환경이었다면 일도 저절로 됐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담아서. 이렇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할 준비가 되어 있던 이들에게, 그리고 열심히 한 이들에게 무엇이 남아 있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자신들의 교실을 지키기 위해 옥상으로 뛰어 올라간 이들, 모두가 알고 부를 노래가 없어 선택했다는 애국가는 그들 앞에서 죄스러워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서 ‘당연한 것처럼’ 경로를 틀어버린 많은 서술들이 그들의 기억에 정당한 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점 역시 기한을 넘기지 않아야 할 과제일 것이다.

 

<미싱타는 여자들>(2022.1.20 개봉)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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