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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여, 정당 밖에서 급진화하라
진보여, 정당 밖에서 급진화하라
  • 홍성일
  • 승인 2011.11.11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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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월가를 뒤흔든 ‘1%에 맞서는 99%의 저항’, 월가 점령 시위를 찾은 진보적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99%의 부를 1% 투기 금융자본이 탈취하는 데 대한 저항을 공산주의라고,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낙인하는 자들에게 맞서, 지제크는 자본주의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었음을 폭로한다. 세계경제를 떠받치는 중국의 역동성은 민주주의를 억압함으로써 달성되었고, 1% 월가의 ‘이너서클’(소수 핵심 권력층)과 탐욕적 금융자본은 99%의 민중에 의한 지배, 데모크라시(민주주의)를 역행한다. 현재 상황에서 지제크는 “반자본주의 운동이야말로 민중에 의한 지배, 민중이 주인이 되는 정치, 민주주의를 재고안하는 동력이다”라고 주장한다.

반자본주의 통한 민주주의 재고안

‘반자본주의를 통한 민주주의의 재고안’이라는 문제틀로 오늘의 한국정치를 바라본다면 우리의 상황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있다. 이 문제틀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새로이 민주주의를 구상해야 하는지, 오늘 우리 진보의 화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혹자는 물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후퇴한 민주주의의 역습이 아니냐고. 이명박 정권의 억압적 일방통행이 한계에 이르러 동의를 구하기보다는 통고하고, 통고의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 검경의 물리적 수단에 의존하는 이 정권의 반민주성을 드러내고 있다.그런 와중에 드디어 범야권 결집이 가시화되어 서울시장을 재탈환한 지금, 민주주의의 회복이 눈앞에 있지 않으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아니 이것으로는 민주주의가 충분히 달성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이번 새 서울시장 선출에 큰 열쇠를 쥔 안철수 교수의 박원순 후보에 대한 지지 편지를 보자. 그는 “이번 시장선거는 부자 대 서민, 노인 대 젊은이, 강남과 강북의 대결이 아니고,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은 더더욱 아니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가 규정하는 이번 선거는 “시민이 주인이 되는 길이며, 원칙이 편법과 특권을 이기는 길이며, 상식이 비상식을 이기는 길”이다. 안 교수의 편지에 반자본주의는 없다. 오히려 그는 계급의 문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무화함으로써 진보의 가장 큰 무기인 반자본주의의 날까지 무디게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안 교수의 이번 선거에 대한 정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안 교수가 선거 일반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그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원하는,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전승된 환경 아래에서 역사를 만들어간다”고 말했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과거로부터 이미 존재하고 전승돼온 환경이었다. 안 교수의 편지에서 이는 ‘상식’으로 표현되었다. 상식이란 고래로부터 전승되어 옳다고 믿어온 지식, 신념, 가치이다. 상식은 언제나 과거와의 연속선상에서 생각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상식이 비상식을 이긴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보수화를 의미한다. 이미 보수적인 우리 사회가 보수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생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진보의 변화에는 민감하면서 보수의 변화에는 둔감하다. 진보가 변화한다면 보수는 왜 변화할 수 없겠는가? 안 교수가 제기한 상식과 비상식의 전선은 실은 어떤 상식, 어떤 보수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지와 맞닿는다. 안 교수가 비상식의 범주에 넣은 말들에서 우리는 그가 거부하려는 일련의 부정적 보수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시민이 주인 되지 못하고 편법과 특권이 원칙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수구적 보수주의’라 지칭해왔다. 따라서 안 교수가 주도적으로 의미부여하고, 그를 따라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표를 던진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민주주의의 회복이라기보다는 수구적 보수주의에서 합리적 보수주의로의 이행으로 보아야 한다. 이번 선거 결과는 합리적 보수주의자가 보수 진영에서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합리적 보수로 이행한 시장 선거

‘야권단일화’, ‘야권통합’, ‘야권연대’가 지상과제로 대두하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이상의 선거 결과가 함축하는 바는 크다. 마이클 무어는 그의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러브스토리>(2009)에서 1인1표의 투표야말로 모든 거대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에서 공개된 거대 다국적 금융자본 시티그룹의 극비 투자 보고서에 따르면, 평등투표는 1%가 독점한 경제권력을 위협하는 99%의 정치권력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1%의 경제권력이 99%의 정치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자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며, 이는 오늘날 많은 이들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상식은 시스템의 점진적 개선에는 열려 있을지언정 급진적 개혁은 거부한다. 이는 현 시스템 아래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주의자의 기대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더욱이 다수의 표심을 사로잡아야 하는 투표는 우리를 묶는 일뿐만 아니라 저들도 우리 안으로 포괄해야 하는 설득을 필요로 한다. 급진성은 우리, 저들, 그리고 판단을 유보하는 이들까지 설득하기 위해 순치돼야 하고 상식적으로 윤색돼야 한다. 마이클 무어는 이를 두 마리 늑대와 한 마리 양이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희극적 상황에 비유한다. 양이 늑대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다른 한 마리의 늑대를 양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불가능한 정치성을 발휘해야 한다. 이와 같은 한계 속에서 야권단일화, 야권통합, 야권연대에 참여하는 진보의 정체성이 올곧게 유지될 것이라는 기대는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일이다.

그러나 거기 진보의 자리는 없다

투표와 국정 운영은 언제나 상식을 둘러싼 싸움, 보수의 틀 안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투표나 국정 운영과 같은 제도정치는 보수의 틀 안에서 수를 계산하는 무대이며, 그 안에 들어서는 순간 보수의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탈바꿈해야 한다. 원론적으로 보면 이것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합리적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가운데 이 무대의 전면에 서는 것을 환영하기까지 한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설득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돼야 하며, 그 안에서 사회는 점진적이나마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여기에 진보의 자리가 없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를 ‘민주주의’라 칭하고, ‘진보’라 포장하며, 자신의 보수적 정체성을 탈색하는 가운데 진보의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진보적 의제를 보수적 의제로 치환한다.

<한진중공업 담 넘기>, 2011-김경호

그렇다면 이는 ‘진보는 제도정치로부터 어떤 지분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지제크의 말을 비틀어 답하면, 진보는 이제 제도정치와 이별을 고해야 할 때이다. 투표를 통한 국가권력의 획득을 민주주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여기지 않을 때 진보는 더 큰 활력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는 이가 원내에 진입하고, 그 안에서 다수의 국민에게 진보적 가치를 설득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알리며 이를 제도로서 구현하는 일은 소중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을 수행하는 그는 진보주의자라기보다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수구 보수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고 진보의 상상력을 상식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반면 진보는 더욱 모험적이어야 한다. 진보는 기존 상식 바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보수주의자들이 자신의 보수적 언어로 진보의 가치를 시혜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들 자신이 진보의 언어로 진보의 가치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강제하는 이들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는 언제나 상대적이며 스캔들 메이커다. 진보는 자신의 가능성이 상식으로 보수화되는 동시에 이로부터 자리를 떠나 새로운 진보의 가능성을 발굴하는 형식이다. 진보가 어떤 의미에서 이상적이라면, 그것은 진보가 ‘장소-없음’(유토피아)의 본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전적으로 비현실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제도정치 바깥으로 시야를 돌리면 진보의 역동성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지고 있다.

‘희망버스’는 어떻게 현실에서 진보가 소임을 다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중대한 사건이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던 희망버스를 수차례 조직해내고, 이를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 고용 불안정의 문제로 상식화했으며, 그를 통해 제도정치는 마침내 국회 안으로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 문제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홍익대 앞의 두리반, 명동의 마리에서 펼쳐진 진보의 연대는 거대 건설자본의 일방적 횡포에 생채기를 남겼다. 한-미 FTA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진보의 반FTA운동은 1%에 맞서는 99%의 운동으로 진화 중이다. 국내에서만 이와 같은 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월가의 점령 시위, 중동·북아프리카에서 계속되는 재스민 혁명, 그리스·스페인·프랑스 등지에서 대규모로 벌어지는 ‘분노의 시위’는 바깥에서 제도정치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있다. 지금까지는 진보의 가치를 조직화하고 그 중심에 섰던 당이 1차적으로는 제도정치 전체 판의 보수성으로 인해, 2차적으로는 정당 자체의 더딘 의사결정 과정으로 인해 진보적 가치를 구현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SNS는 장소가 없는 가운데에서도 진보의 가치를 전 사회적으로 확장시킬 소통망을 제공했으며, 장소-없음에 걸맞은 기동성을 진보에 부여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는 비로소 유토피아의 본성에 맞는 새로운 진보의 가능성을 물색하게 되었다.
 되풀이하여 강조하건대, 진보는 상식을 거슬러 새로운 상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안정성의 거부를 숙명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진보의 불안정성은 진보가 제도정치의 안정성을 벗어나 시민사회와 소통하며, 사회적 약자의 불안정성에 민감하게 공명하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두 불안정성은 동일하지 않다. 진보의 불안정성이 능동적이었다면, 사회적 약자의 불안정성은 주체가 어찌할 수 없도록 강제된 수동적 불안정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는 구조의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특히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를 양산하는 중심 기제이다. 물론 모든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자본주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성, 환경, 인종, 세대 등의 문제 또한 중요하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다른 모든 사회적 문제와 긴밀하게 얽히는 교차로라는 의미에서 보편적이고 편재한 진보의 개입 현장이다.

분노는 제도 바깥에서 조직된다

비자본주의적으로 보이는 여타의 모든 문제조차 그 이면에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보다 더 많은 특권을, 더 많은 분배의 몫을 가져가는 자본주의적 모순이 놓여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반자본주의 운동은 민주주의의 문제와 직결된다. 민중에 의한 지배, 민중이 주인이 되는 정치인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양적 정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약자가 소수일지라도, 이들 소수 또한 다수와 동일한 권리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며, 그럼으로써 보편적 민중에 의한 지배가 가능하도록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질적 정치이다. 진보가 발굴해야 하는 새로운 가능성은 이로부터 출발한다. 단지 상식 바깥을 사유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가능성이 진보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와 같다면 자본이야말로 이윤을 얻기 위해 어떠한 상식도 거슬러왔던 진정한 진보라 하겠다.

오늘날 진보의 소임은 반자본주의의 기치 아래 다른 사회적 문제와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굴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도약시키는 것이다. 두 가지 길이 있다. 진보주의자가 제도정치에 진입해 합리적 보수주의자로서 점진적 사회변화를 이끌어내는 길과, 제도정치 바깥에서 진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반자본주의의 급진적 가능성을 확산하는 길이다. 양 갈래 길 모두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보가 진보인 채로 남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다.


글. 홍성일 (문화연구자)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글로벌 시대 미디어 문화의 다양성>(공저), <PD 저널리즘>(공저)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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