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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정태춘 평전, <아치의 노래-정태춘>
영화로 보는 정태춘 평전, <아치의 노래-정태춘>
  • 서성희 | 영화평론가
  • 승인 2022.05.3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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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 정태춘의 뜨거운 삶을 담은 음악영화

정태춘은 싱어송라이터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탁월한 성취를 남긴 예술가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그의 음악 인생 40년을 녹여낸 다큐멘터리 음악영화다. 영화는 그의 작품세계를 아우르는 28곡을 중심으로 유망한 대중가수에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미화하지 않고, 의미를 강요하지도 않고, 음악에 드라마를 잘 얹혀”(1) 놓았다. 영화는 2019년 40주년 콘서트 실황과 과거 영상 자료들을 통해 영화관에 앉아 마치 콘서트를 보는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1980~90년대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세대에게 정태춘은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동안 그 시대, 그 정서를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는 느낌도 든다. 영화는 한 시대, 한 개인의 역사를 그대로 담은 듯한 정서를 환기시키면서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을 소환한다. ‘정태춘’이라는 완고한 예술가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몇 번의 변곡점을 거치는 그의 삶이 그린 궤적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거칠게 나눠, 서정성 넘치는 노래를 만들었던 시기와 정치성이 담긴 노래를 부르던 두 시기를 모두 이해해야만, 비로소 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불온한 서정성

그는 겨울엔 황량하게 마른 들판이 펼쳐지고 그 들판 멀리로부터 맵찬 서해 갯벌 바람이 들이치는, 나무 한 그루 없는 동네로 묘사된 평택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첫 노래는 그 시골 풍경과 그 시골 정서로부터 시작한다. 그에게 노래는 자신이 본 풍경을 그리는 ‘그림’이거나 자신의 마음을 담는 ‘일기’였을지 모른다. 그러다 군에 있을 때 사랑 노래를 만들라는 레코드사 사장의 말을 듣고 <촛불>과 몇 곡을 더 만들며 1978년, 가수가 된다.

1978년 6월에 제대한 후, <시인의 마을>을 타이틀곡으로 앨범을 내면서 정부의 사전 심의를 받아야 했다. 심의하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부분을 모두 개작하라는 통보가 내려왔다. 심의 당국은 정태춘이 서정성 짙은 노래를 만들던 데뷔 때부터 그가 쓴 가사의 “부정적인 내용”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놀랍게도 당시 심의를 했던 공영윤리위원회에서 그의 독창적인 서정성이 잉태하고 있는 은밀한 불온성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정태춘은 그런 것들에 아무 관심도 없었고, 심지어 레코드사 사장이 다 고쳐서 심의를 통과시켰다. 당시 정태춘은 너무나 자유롭고 몽환적인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을 뿐이었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고,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서 회사에서 하자는 대로 녹음하고 방송에 나가다 보니 노래는 빅히트를 치고 얼떨결에, 단번에 유명 가수가 됐다고 회고한다.(2) 

그런데 이후, 마음껏 선곡할 수 있었던 2집과 국악을 접목한 3집이 연달아 상업적으로 실패하면서 힘든 시기를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대중과 대화하고 노래를 전하러 직접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기획을 한다. 1985년 1월부터 1987년 10월까지 <정태춘 박은옥의 얘기 노래 마당>이라는 타이틀로 전국 순회공연을 한다. 이 과정에서 혼자만의 고민이 아닌, 대중과 나눌 고민과 의식과 어법이 필요했다. 공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이제 진짜 어른, 시민으로 제대로 눈을 뜨는 과정이었다. 산골의 맑은 시내도 결국 강으로 흘러가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도 변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사춘기 때보다 더 큰 변화를 겪어야 했던 시기다.

 

실존적 정치성

 

1집 <시인의 마을>은 시작부터 그야말로 대박이 났고, ‘떠나가는 배’와 함께 마침내 작가주의적 언더그라운드 포크 가수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정태춘은 시대의 변혁에 동참해 민중가수로 거듭나기까지, 여러 의미 있는 변곡점을 지난다. 1988년 초, 그는 노동운동 등에 “자신이 유효하게 쓰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했고, 정태춘 노래극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공연을 시작했다. 그간의 변화와 더욱 다듬어진 문제의식을 담은 노래극이었다. 공연팀 단독으로 공연하다가 ‘전교조’를 만나게 됐다. 당시 대학가에는 민중문화 운동이 한창 시작되고 있었고, 그가 수많은 대학의 ‘대동제’에 초대됐던 시기이기도 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투쟁부터 1993년 음반 사전 검열제도 철폐 운동, 2006년 평택 미군 기지 확장 반대 운동,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까지 그는 개인의 문제를 역사적 배경과 구조의 문제로 보면서부터 진보적 예술가로서 목적의식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일부러 방향을 튼 것도 아니고 의식의 변화와 인식의 확장으로,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그는 가장 래디컬 한 ‘운동권 가수’가 됐다. 

무엇보다 정태춘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이끌어낸 뮤지션이다. 법이기에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사전 검열을 거부하고, 5년간의 긴 법정 투쟁 끝에 음반 사전검열제 철폐를 성취해냈다. 그로 인해 우리 대중가요사의 첫 시작부터 60여 년간 지속됐던 가요에 대한 정부의 ‘검열’이 사라졌다. 그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로 사회참여에 적극 동참한 예술가이며 그가 걸어온 여정은 한국 현대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영화는 거창한 대의나 설명 보다 시대를 함께 아파하고 시대와 함께 한 정태춘의 여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시대는 변화하고 있었고, 그에 발맞춰 음반 시장도 변하고 있었다. 불온한 서정성에 시대가 보내는 반동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급격한 변화가 우리 시대에 일어났다. “내가 젊디젊은 열정을 공적 양심에 따라 거침없이 쏟아부을 수 있는 변혁의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과 그런 시대가 어느 세대에게나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그러나 그 변혁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다는 것, 그 열기도 결국은 다시 식어간다는 것.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남아있었다.”(3) 그는 고립돼 갔고, 그럴수록 더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더 깊은 사색을 위해 떠나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영화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늘 함께했던 실천적 지식인의 삶을 그렸듯,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던 시기의 삶도 진솔하게 기록한다. 

 

다시/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될 것

정태춘은 가수다. 하지만 그냥 가수가 아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아픈 이들의 동지가 돼 함께 그 세월을 견디기도 하고, 때로는 선두에 서서 세찬 바람에 맞서 험난한 길을 개척하기도 한, 행동하는 철학자이자 음유시인이다. 음유시인은 현실에서 문제의식을 곧잘 발견하는 사람이다. 시란 일상을 관찰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자연, 혹은 현실에서도 시인은 ‘왜’라는 문제의식을 가진다. 정태춘은 늘 억울한 사람들의 편에 서 있었고, 끊임없이 노래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사람들의 취향은 바뀌었다. 그는 절망했다. <아치의 노래>의 잉꼬처럼, 조그만 새장 안에 있지만 푸른 창공, 장엄한 호수 그 깊은 숲을 꿈꾸며 끝없이 그 세상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랫소리는 새장 주위로만 뱅뱅 돌았다. 이후 십여 년간 그는 노래를 만들지 않았다. 한 시절, 혁명가 같던 기개는 인간에 관한 깊은 성찰로 바뀌었다.(4) 신문이나 방송도 보지 않았다. 시사 문제에 관심을 끊었다. 그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을 구독하며, 프랑스 지식인들과 함께 세상을 주유하며 살았다.(5) 정태춘은 누구일까? 그는 자신과 세상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고, 평생을 갈등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학평론가 오민석의 말처럼, 여느 실존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출발부터 이미 관계와 공동체와 광장을 향해 있었다. 그의 실존은 이미 타자들과의 관계와 연합을 향해 있었다. 타자와의 관계와 공감이 약해지자, 그는 투덜거리고 물러섰다. 아니 더 정확히는 새로운 상황에 대해 새로운 열정을 가진 인간이 반드시 나타난다는 믿음으로 물러섰다. 이제 영화는 그의 음악을 기다려온 팬들과 음유시인 정태춘의 귀환을 바라는 인터뷰가 담긴 장면들로 화답한다. 

한 가수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가 드물었던 만큼, 이 영화의 의미는 크다. 방대한 분량이었을 40년의 아카이브 기록 자료들을 정리하고 선별해, 영화로 한 인물의 평전을 이토록 우아하게 그려낼 수 있는 이유는, 그 인물이 걸어온 길의 우아함과도 떼놓을 수 없다. 영화는 기록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고, 40년 정태춘 음악사를 담아 음악과 함께 시대의 기억과 개인의 기억을 소환해 깊은 정서적 울림을 준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과 함께 한다면, “고단하고 행복했다”라는 40년 음악 인생의 처연하리만큼 우아했던 여정과 함께 할 수 있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영화학박사.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 덧붙이는 글 : 그는 영화 개봉을 준비할 즈음 밥 딜런과 레너드 코언의 평전을 읽으며 노래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마치 바닷물이 수증기로 순연해지듯 이젠 진지한 이야기도 시대적 책무도 모두 잊고, 그의 깊은 내면에서 길어 올린 울림이 있는 노래를 쓰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1) <한겨레>와의 인터뷰 중, ‘친구한테 이야기하듯이 ‘다시’ 만들려고 해, 정태춘의 노래를‘, 2022년 5월 10일.
(2) 구체적인 시기나 과정은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고영재, 2022)와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책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정태춘, 2019)에 많이 의존한다. 
(3) 정태춘 노래 에세이,『마을로 가는 시내버스』, ㈜천년의 시작, 2019, 168쪽.
(4) 그의 책에서 시인 백무산을 묘사할 때 썼던 문장인데, 그에게도 적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에 인용해본다. 
(5) <한겨레21>과의 인터뷰 중, ‘내 속에서 더 이상 노래가 나오지 않아’, 2009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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