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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라진 클리닝 요정이 보낸 편지: <파이란> 송해성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사라진 클리닝 요정이 보낸 편지: <파이란> 송해성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2.07.18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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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래가 불러온 파이란

 

어둠과 함께 파도가 몰려오는 가운데 바다 속으로 송서래(탕웨이)가 사라지고, 장해준(박해일)이 안개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헤매는 장면으로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2022)은 끝난다. 엔딩 크레딧에 울려 퍼지는 테마곡 ‘안개’를 들으며, 불현 듯 송해성의 <파이란>(2001)의 엔딩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다. 안개가 걷힌 바닷가에 카메라를 바라보며 웃고 서있는 청순한 여자, 파이란(장백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래가 사라지면서 그녀의 “그림자 하나”처럼 불러온 오래전 외롭게 홀로 사라졌던 파이란은 다시 자신을 찾아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나타난 그녀의 유령처럼 보였다. 유령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헤어질 결심>의 시점에서 <파이란>의 다시 보기를 시도해본다.

 

파이란과 서래의 공통점은 장백지와 탕웨이, 모두 홍콩 출신 중국 여배우가 캐스팅되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20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한국에 온 중국이주여성, 조선족 이주여성이라는 사실이다. 20세기말에 들어와 부양가족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 주체적으로 이주하는 여성들이 많아진 “이주의 여성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된 시점에 한국에 입국한 이주여성들이다. 이처럼 이주여성노동자가 늘어나는 추세는 “전지구적 자본 축적과 노동의 유연화”를 실천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여성들로 하여금 경제적, 사회적 생존을 위해 다른 나라로 이주하도록 만든 현상, 즉 “신자유주의와 젠더와의 밀접한 관계”를 반영한 현상이다. 세탁부와 간병인으로 일한 파이란과 서래 역시 이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로 글로벌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생존회로”의 말단에 위치한 젠더화된 하위계층의 소수 이주여성노동자이다.

 

2. 이주여성의 재현과 소수-되기

 

글로벌화 시대 한국영화의 성과와 전망을 가늠하는데 중요한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는 이주여성 재현의 방법과 평가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한국영화 또한 헐리웃영화가 해온 오리엔탈리즘적 이미지들을 반영한 정형화된 유형들로 아시아 여성을 재현하는 것을 반복 모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파이란과 서래 또한 서구적 환타지 인물로 상냥하고, 순종적인, 연약한 ‘동양 나비’, 기만적이며, 신비하고 강한 드래건 레이디, 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육체적으로는 타락한 여자라는 정형화된 유형으로 재현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헐리웃영화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모방하는 일종의 ‘아시아적 오리엔탈리즘’을 반복함으로써 서구적 오리엔탈리즘을 정당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국영화는 들뢰즈(Gilles Deleuze)의 소수 재현 방식으로 이주여성에 대한 재현을 시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소수는 다수의 시스템에서 주체로서가 아니라 “억압받고, 속임을 당하고, 지배를 당하고”, “맹목적이고 또는 무의식적”으로 거기에 존재하고 있을 뿐, 결국 사라진 것, 즉 없는 것이 되는 것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한다. 파이란과 서래를 등장시킨 한국영화는 바로 이러한 소수로서의 조건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이주여성을 재현함으로써, 다수의 시스템에서 이들은 사라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최근 한국영화는 이주여성을 단순히 정형화된 유형과 수동적인 피해자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는 모험가”의 면모를 갖춘 여성으로 재현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헤어질 결심>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특히 이주여성의 “경계를 횡단하는 초국가적 이동성”을 탈주, 즉 소수-되기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긍정적 특성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소수는 역사와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노마드(nomad)로 어떤 고정된 경계를 세우지 않고 이동하는 집단이다. 따라서 소수-되기란 권력과 지배에 대한 도전 그 자체이다. 파이란 보다는 서래가 이러한 소수-되기를 통해 주체로서의 해방을 실천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파이란 또한 서래의 등장을 예견하게 하는 앞서간 인물로, 두 여자 모두 소수 스펙트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3. 한국적 느와르 또는 조폭영화 <파이란>

일본 아사다 지로(Asada Jiro)의 단편 소설 <러브레터>(“Love Letter”, 1998)를 원작으로 한<파이란>은 최민식과 장백지 주연의 한중 합작영화이자, “가장 고상한 여성영화”로 평가받는 막스 오퓔스(Max Ophuls)의 헐리웃 멜로드라마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Letter from an Unknown Woman, 1948)와 공통점이 많은 영화로 초국가적 문화 혼종성을 잘 구현한 대표적인 한국각색영화이기도 하다.

 

<파이란>은 이주여성 파이란을 제목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남자 강재가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내러티브를 다루고 있다. 파이란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멜로드라마의 세계를 어두운 도시의 밤거리를 담아내는 필름느와르의 세계에 “조응”시켜 “특별한 효과”를 창출한 “한국적 느와르” 또는 “조폭영화”로 분류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1990년대 후반기 한국영화의 흐름을 형성한 “필름느와르 스타일과 (조직)폭력을 소재로 한 갱스터 장르를 기본으로 하면서 멜로드라마 및 청춘영화와의 접합”을 통해 탄생한 조폭영화의 시대를 일단락하는 영화로 간주된다.

그러나 조폭영화 장르는 단순히 필름느와르와 멜로드라마의 접합에 의해 탄생한 “변주”라기 보다는, 남성과 남성성에 관한 남성영화인 필름느와르가 여성영화인 멜로드라마를 “전유”하여 만들어진 남성영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폭영화의 탄생은 1960년대 청춘영화가 멜로드라마를 전유하여 “청춘멜로드라마” 또는 “남성멜로드라마”로 탄생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청춘멜로드라마와 조폭영화는 여성영화를 전유하여 만든 남성영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청춘스타 신성일이 주로 주연을 맡았던 1960년대 청춘멜로드라마 영화는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강요한 가부장적 남성성 멘탈리티를 극복하지 못한 무력한 남자의 “비가”를 다룸에 있어서 늘 비련의 여자를 등장시킨다. 그녀는 근대화 과정이 탄생시킨 “새로운 불촉천민계급”에 속한 “미혼모나 접대부, 댄서, 마담 등의 화류계 여성”으로 정형화된 “타락한 여자”로 재현된다. 이 타락한 여자는 남성 주인공이 좌절과 상실의 결말을 맞이하는 과정이 자아내는 슬픔과 비애가 페이소스의 주 원천이 되는 청춘멜로드라마에서 결코 여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단지 남성 비가의 페이소스를 더욱 강렬하게 유발시키는 역할을 맡을 뿐이다. 그녀가 당대 한국영화계와 관객의 사랑을 받았던 것은 비련의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남자 주인공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퍼주었고 그 사랑으로 인해 타락한 여자, 또는 죽는, 사라지는 여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구원하기 위해 순정적인 사랑을 받치고 사라지는 타자의 역할을 떠맡았기 때문에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1990년대 조폭영화는 IMF 외환위기 및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시스템의 위기를 몰고 온 글로벌화 프로젝트가 탄생시킨 장르이다. 이러한 장르에 속한 <파이란>의 내러티브는 자본주의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냉혹한 갱스터 세계의 ‘검은’(noir) 도시 공간에서 살아가는 무력한 건달 강재가 파이란을 통해 “멜로드라마적인 진정성”을 무기로 비정한 세계에 대한 응전을 시도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조폭영화의 세계는 청춘멜로드라마의 세계와는 달리 남자만의 동성사회적인(homosocial)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여자는 남자들 사이의 비정한 경쟁 관계만을 만들어주고 사라지는 매개자, 또는 트로피 와이프 정도로 그 역할이 축소되거나 아니면 트로피, 즉 “쟁취의 대상으로서의 입지”마저도 잃어버리게 된다. 강재 같은 조폭 세계의 낙오자에게는 이제 청춘멜로드라마의 타락한 여자는 쟁취할 수 없는 트로피로 낙오자의 남성적 에고를 위협하고 손상시키는 여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루저로서 강재의 상실과 좌절의 페이소스를 유발하고 치유하는 타자화된 여자의 역할 또한 필요하다. 이제 파이란처럼 글로벌화 시대의 젠더화된 하위계층, 즉 “글로벌화의 하녀”로 불리는 이주여성이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4. 느와르 세계에서 파이란의 존재 이유

 

멜로, 로맨스, 드라마, 서스펜스, 미스터리, 느와르라는 박찬욱 특유의 복합 장르 영화 <헤어질 결심>과 20여년 의 시차를 둔 조폭영화 <파이란>의 서래와 파이란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서래는 밀입국한 자신을 감별해내서 합법적인 체류가 가능하도록 도와준, 그러나 소유욕이 강하고 폭력적인 출입국 공무원 남편을 치밀한 계획으로 살해를 했다. 수사에 혼선을 가져와 자부심이 강하고 반듯한 형사 해준을 “붕괴”시킨 그녀는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고 묻는 해준에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반문할 정도로 당당하고 적극적인 여자이다. 반면에 파이란은 돈을 받고 위장결혼을 해준 그러나 서로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친절한” 삼류 건달 이강재(최민식)에게 죽고 나서야 전해진 편지에서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습니까?”라는 허락을 구할 정도로 소극적이며 순종적인 여자이다. 서래는 해준과의 사랑, 그와의 헤어질 결심에 있어서 타락한 여자의 역할을, 두 남편을 살인하거나 살해되도록 유도함에 있어서 팜므 파탈의 역할을 또한 능동적으로 수행한다. 반면에 파이란은 자신의 존재조차도 잊고 있는 강재의 사진을 보며 그를 사랑하게 되고, 죽기 직전에서야 편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그에게 알리고, 죽은 뒤에야 강재의 멜로드라마적 환타지 속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파이란은 서래와 같은 타락한 여자 또는 팜므 파탈은 아니며, 청춘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타락한 여자도 아니다. 1960년대 청춘멜로드라마의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을 전유한 조폭영화 <파이란>에서 파이란은 청춘멜로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을 구원하는 타락한 여자보다 더 전통적인 순수와 가치를 보존하고 있는 과거의 세계에서 소환되어 온 빨래 빠는 순박한 시골 처녀의 이미지로 재현된다. 즉 그녀는 “한국의 ‘과거’, 즉 산업화 이전의 이미지를 보존하고 있는 곳”인 중국에서 온 “‘젠더화된 과거’의 표상”을 만들어내는 여자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존재의 이유는 강재에게 멜로드라마적 과거 세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그의 좌절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타자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있다. 따라서 그녀는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 뒤 홀연히 사라지는 “클리닝 요정”(Cleaning Fairy, 글로벌화의 하녀들의 인력을 이용하고 있는 홍콩과 호주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클리닝 서비스 업체가 상호로도 사용하고 있음)과 같은 환타지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5. 파이란과 강재의 이야기

“느와르와 멜로드라마 사이”에서 좌절하는 남자의 이야기, 즉 느와르 세계에서 멜로드라마적 인식과 상상력으로 대응하는 무력한 남자의 좌절을 그린 조폭영화 <파이란>의 구조는 이중구조로, 특히 파이란의 죽음부터 시작해서는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놓는 시간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공간도 영화의 시작부터 각각 파이란과 강재의 공간으로 이분화하여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스쳐 지나가거나 슬쩍 본 적은 있어도 서로 대면하여 만난 적은 없다. 이와 같이 이중구조로 <파이란>이 구성된 것은 느와르의 세계와 멜로드라마의 세계 사이의 절연된 간극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파이란>은 파이란이 공항에 도착해서 이민국을 통과하는 짧은 첫 시퀀스로 시작하여 1년이라는 시간 간격을 두고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강재가 오락실에서 행패를 부리는 두 번째 시퀀스로 이어진다. 첫 시퀀스에서 <헤어질 결심>의 서래 첫 남편을 연상시키는 겁먹고 불안해 보이는 중국여성 파이란을 내려다보는 이민국 직원의 시선부터 시작해서 <파이란>은 전반적으로 한국 사회에 팽배해있는 “인종, 젠더, 계급 등의 인식 범주가 어떠한 방식으로 문화적 헤게모니를 생산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첫 시퀀스로 이주여성에 대한 아시아적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의 반영과 비판을 동시에 시사하면서 <파이란>은 시작된다.

 

이중구조의 <파이란>에서 강재와 파이란을 연결해주는 장치는 위장결혼이다. 이 결혼은 강재가 순전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별 생각 없이 한 것이지만, 위기에 처한 파이란에게는 ‘친절한’ 구원의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죽은 파이란의 부름을 받아 그녀의 공간인 시골 바닷가 마을로 가게 된 강재는 남겨진 화장한 재와 편지의 형태로 그녀를 만나게 된다. 사라진 클리닝 요정이 남긴 편지는 그의 멜로드라마적 상상을 불러일으켜, 과거로 돌아가 순정적인 사랑을 받쳐온 파이란을 조우하도록 유도한다.

병으로 죽어가면서 힘든 세탁일을 하며 자신을 다시 구조해줄 강재를 기다려 왔던 파이란의 이야기는 “로맨스와 구원이라는 동화 주제”를 다루는 멋진 주인공 왕자와 결혼하여 구원을 받는 비천한 노동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순진한 젊은 여자, 즉 신데렐라 이야기 패턴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파이란은 신데렐라가 아니고, 그녀의 이야기는 이 영화의 주요 내러티브도 아니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강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파이란의 이야기는 강재 구하기의 관점에서 다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파이란과 강재의 이야기는 <신데렐라>보다는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 패턴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쁜 마법에 걸려 건달, 야수가 된 강재가 파이란의 소원을 들어주고 얻게 된 그녀의 순수한 사랑의 마법으로 다시 한순간에 왕자로 되돌아오는, 즉 구원받은 왕자가 되는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중국에서 날아온 클리닝 요정 파이란의 순정적인 사랑은, 더러운 빨래를 순식간에 깨끗하게 빨아주는 요정의 마법처럼, 강재를 구원자와 구원된 자의 역전된 역할을 모두 할 수 있는 동화 속 왕자로 깨끗하게 변화시켜준다. 그러나 그 변화는 동화 속에서만, 즉 강재가 파이란의 공간에서 발견한 멜로드라마적 환타지의 세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파이란의 순수한 사랑의 마법은 그의 느와르 세계의 공간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강재에게 “멜로드라마적인 진정성”을 불러일으켜 그로 하여금 조직의 보스와 맺은 계약을 파기하고 과거의 향수와 순수를 간직한 공간, 고향으로 내려가 순박한 삶을 살 결심을 하도록 만든 그 마법은 느와르의 세계에서는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갈 뿐이다.

<파이란>의 엔딩은 느와르적 공간인 강재의 공간과 파이란의 편지를 대신해서 친구이자 후배 조직원 경수(공형진)가 찍었던 비디오로 재생되는 파이란의 공간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대조되는 교차편집의 방식으로 이 영화의 이중 구조를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마지막 시퀀스로 끝난다. 도시의 전형적인 느와르적 주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저분한 방에서 조직을 배신한 대가로 살해를 당해 죽어가는 강재와 그의 눈물어린 시선이 머무는 비디오 속 시골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청순하고 깨끗한 흰옷을 입은 파이란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차편집에 의한 시각화된 대조는 느와르와 멜로드라마의 사이에서 좌절하며 죽음을 맞이한 강재에 대한 페이소스를 극대화시켜주는 효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재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비디오로 재생되는 파이란의 모습이 컬러에서 흑백으로 퇴색하는 효과로 처리된 엔딩 장면은 느와르 세계에서 남성 주인공의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과 그것에 의한 해결은 “과거지향적인 향수”였음을 강조함으로써 느와르 세계와 멜로드라마 세계의 단절을 다시 부각시키는 결말로 해석될 수 있다. 전근대적인 과거를 보존하고 있는 중국에서 이주해온 파이란은 청춘멜로드라마의 타락한 여자처럼 강재에게 자신의 불행으로 더 큰 불행과 좌절감을 겪게 해주지도 않는다. 강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몰래 그를 일방적으로 사랑했던 파이란은 그의 ‘우렁각시’가 되는 대신에, 죽어가는 강재를 두고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의 동화 세계로 다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서래의 시선처럼 강렬하지 않지만 서래가 소환한 카메라를 수줍게 바라보는 파이란의 시선에서 우리는 그녀에 대한 또 다른 스토리-텔링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6. 소수영화를 지향하며

최근 <헤어질 결심>의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이 입증하듯이, 글로벌화 시대 한국영화의 성과는 소수로서 이주여성의 존재와 역할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다수”(majority)”와 “소수”(minority)의 개념은 권력과 지배의 상태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즉 소수는 다수에 의하여 소수인 것이다. 소수는 다수에 의하여 확립된 기준 척도에 따라 소수가 되는 것이다.

사실 소수로서 이주여성을 다수의 시스템 속으로 통합시킨다는 것은, 파이란과 서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폭력과 압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소수를 다수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즉 이들과 이들을 억압 또는 통합하려는 세계 사이에는 “분열”과 “불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다수의 권력의 메커니즘과 시스템은 그러한 진실을 은폐하기 때문에, 다수의 시스템에 기반을 둔 헐리웃 영화는 이러한 불편한 진실을 발견하여 밝혀낼 수가 없다.

20여년의 시차를 두고 재현된 <파이란>과 <헤어질 결심>의 파이란과 서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수의 시스템 속으로 통합될 수 있는 아시아 여성의 정형화된 유형의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영화 모두 이들이 소수로서의 조건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사라진 존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다수의 시스템에 기반을 둔 헐리웃영화와는 달리, 이 두 영화 모두 다수의 시스템이 은폐해온 진실, 소수로서의 조건으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소수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발견하여 드러낸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영화는 들뢰즈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매체로 간주한 현대영화가 지향해야할 소수영화, 즉 사라지기를 강요당한 소수에게 말을 거는 “현대정치영화”를 창조할 수 있는 강력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헤어질 결심>이 개봉한 이 시점에서 <파이란>의 다시 보기 시도는 이 영화가 소수영화를 지향하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시발점을 제공했다는 사실의 발견과 함께 한국영화의 미래를 새롭게 전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젠더와 문화』(11권1호, 2018)에 실린 “한국 영화에서 사라진 이주여성 찾기”(7-39)의 내용 중 <파이란>을 다룬 부분을 <헤어질 결심>의 개봉 시점에서 <파이란>에 대한 다시 보기로 전면 수정하여 쓴 글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정문영
영화평론가,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텍스트들을 상호텍스트(intertext)와 팔림세스트(palimpsest)로 읽는 각색연구가 주요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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