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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숙의 문화톡톡] <왕십리 김종분> ― 김귀정 열사의 숭고한 희생과 김종분 할머니의 초탈한 삶
[서곡숙의 문화톡톡] <왕십리 김종분> ― 김귀정 열사의 숭고한 희생과 김종분 할머니의 초탈한 삶
  • 서곡숙(문화평론가)
  • 승인 2022.11.1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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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당시장 터주대감이자 현역 김종분 할머니


매일 보던 인물을 영화에서 본다면? 어느 날 공사장 벽 위에 붙여진 다큐멘터리영화 <왕십리 김종분>의 포스터를 보는 순간 낯익은 얼굴인데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신기하게도 포스터의 주인공인 김종분 할머니가 거기 노점상에 앉아 있었다. 김진열 감독의 <왕십리 김종분>(2021)은 50년 넘게 노점상을 해온, 왕십리역 11번 출구 터주대감이자 현역인 팔순의 김종분 할머니의 삶을 담아낸다.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려고 시작한 일이고 지금은 자식이 장성했지만 김종분 할머니는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있다. 매일 옥수수를 삶고 가래떡을 굽고 깻잎을 개는 김종분 할머니는 30년 전 길 위에서 딸을 잃었지만 더 많은 자식들을 얻었다.

 

 

2. 막가파 인생: 돈에 연연하지 않는 긍정적 인생관
 

<김종분 할머니>의 전반부는 김종분 할머니의 ‘막가파 인생’을 통해 돈에 연연하지 않는 긍정적 인생관을 보여준다. 김종분 할머니는 노점상, 파출부, 장사 등 고달픈 인생을 살았지만, 항상 편하게 살고 있고 호강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긍정적 인생관을 보여준다. “이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나 편하게만 편하게 살면 되지. 내가 집을 살 거야 땅을 살 거야? 누가 밥을 해 달래? 밥 사먹으면 돼. 막가파 인생.” 김종분 할머니는 노점상을 하면서도 돈 꿔주기, 외상값 달기, 밥 사주기 등 사람들에게 베풀고 살아가며 돈에 초탈하다. 그녀는 “밥 먹고 가”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며 “난 돈이 필요 없어. 내 수중에 돈만 안 떨어지면 돼.”라고 말한다. 김종분 할머니는 이웃인 노명연(꽃장사), 임정화(야채), 장석래(우리슈퍼), 김종분(대장)과 식사, 대화, 화투를 함께 하며 친구같은 사이를 유지한다. 김종분 할머니는 호강하고 편한 막가파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하며, 밥 사주기, 외상값 꿔주기 등 돈에 연연하지 않으며, 이웃 노점상들과 친구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대적인 행복에 만족해한다.

 

<김종분 할머니>의 전반부 스타일은 카메라 움직임, 미장센 등을 통해 인물에 대한 객관적 관찰에서 주관적 감정이입으로 나아간다. 카메라가 ‘행당시장’이라는 간판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노점상에 앉아 있는 김종분 할머니가 보임으로써 배경에서 중심인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왕십리 노점에 앉아 있는 김종분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앞모습으로, 멀리에서 가까이 다가가며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다. 노점상 할머니 4명이 다같이 걷고, 버스를 타고 가는 모습을 경쾌한 음악과 함께 보여주면서 유대감을 보여준다. 영상 사진의 ‘보여주기’와 김종분·지인들의 ‘말하기’를 결합시키는 편집은 김종분 할머니의 인생을 다각도로 들여다보게 한다.

 

 

3. 공권력의 폭력: 가난한 환경과 끊임없는 노동의 고통
 

<왕십리 김종분>의 중반부는 가난한 환경과 끊임없는 노동의 고통을 보여주면서 반전을 제시한다. 이 영화는 김귀정 열사의 공적 인식 변화와 어머니 김종분의 사적 인식 변화를 보여준다. 공적으로 김종분의 둘째딸 김귀정 열사는 도시 빈민층으로서 등록금을 위한 노동으로 힘든 삶을 살며, 지배 이데올로기와 공권력에 대해 분노하며, 동아리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시위 강제진압으로 사망한다. 귀정은 자신의 계급에 대한 자각, 계급 차별에 대한 인식 등 현실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귀정은 가난한 환경과 끊임없는 노동에 대한 괴로움을 느끼며, 가난을 숙명으로 여기라는 지배자 이데올로기와 공권력에 대해 분노하며, 모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투쟁하고자 한다. 사적으로 귀정은 과외교사, 공장 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등록금을 마련하는 착한 딸이자 학교에서도 항상 미소를 짓는 여학생이었다. 엄마와 귀정이 한 집에서 각각 파출부와 과외교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평범한 노점상으로 살던 어머니 김종분은 딸 귀정의 죽음으로 “나라를 위해 젊은이들이 이렇게 힘써준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습니다.”이라는 현실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며 열사의 어머니로 살아가게 된다.

 

<왕십리 김종분>의 중반부는 편집을 통해서 후덕한 김종분 할머니의 끔찍한 과거가 드러나면서 반전을 보여준다. 전반부에서 팔순 노점상 김종분 할머니가 과거와 현재의 개인적 삶을 보여주다가, 중반부에서 갑자기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제시되어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김종분 할머니가 과거 사진을 보여주는데 문익환 목사의 사진이 나오고 ‘그 날이 오면’이라는 운동가요가 나온다. 관객은 비로소 후덕해 보이고 편안해 보이는 김종분 할머니의 미소 뒤에 과거의 끔찍한 슬픔과 고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편집을 통해 인터뷰에서는 가족·동기들이 김귀정 열사가 착한 딸이자 미소 짓는 여대생이었다는 인터뷰를 하고, 일기에서는 김귀정 열사가 가난한 환경, 힘겨운 알바, 공권력의 폭력에 대한 투쟁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비를 이룬다.

 

 

4. 꽃다운 죽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왕십리 김종분>의 후반부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떠난 김귀정 열사와 김종분 할머니의 뜨거운 맹세를 보여준다. 김정분 할머니는 김귀정 열사의 죽음 이후 길바닥에서 자기, 입 굳게 다물기, 주먹으로 가슴을 치기 등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 슬픔을 속으로 감춘다. 그녀는 낮에는 강한 어머니로 살지만 밤에는 한스러운 어머니로 사는 등 공적 강인함과 내적 고통의 대비를 보여준다. 그녀가 왕십리 노점상을 고집하는 이유는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공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녀는 30년 전에 돈을 꿔가서 갚은 사람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권하고, 물건을 팔다가 아쉬우면 그냥 주고 외상도 자주 주고 밥 사주겠다는 말도 자주 하는 등 돈에 초탈한 삶을 살아간다. 그녀는 “내가 일 해주니까 욕은 안 먹잖아. 일 열심히 했다고.”라고 밝히며 성실한 삶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그녀는 집 잃기, 돈 빼앗기기, 작은 딸의 죽음 등 과거의 고통스러운 삶에도 불구하고, 잘 살고 있는 큰딸·며느리, 쪽방에서 편하게 살기, 작은딸 덕분에 팔도 구경하기 등 현재의 편안한 삶에 감사해 한다. 김종분 할머니는 굴곡지고 힘겨운 인생에도 불구하고 계속 편하게 살고 있다는 긍정적 가치관을 보여준다.

 

<왕십리 김종분>의 후반부 스타일은 클로즈업, 편집, 시선, 대비를 통해 강조, 연결, 비판,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김귀정 열사의 29주기 추모제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시, 황석영 개사, 김종률 작곡)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라는 노래를 함께 부른다. 이때 무덤의 테두리에 놓인 흰 국화꽃을 클로즈업하면서 열사의 죽음에 대해 추모한다. 성균관대학교의 겨울 교정을 보여주는 장면, 김종분 할머니가 혼자 무덤에 쓰다듬다가 오열하는 장면, 광화문 너머 보이는 청와대 장면을 연결하는 편집은 공권력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꽃다운 청춘을 기리고 있다. “작은딸이 있어서 팔도로 다 구경하고. 작은딸 덕분에 유가협 가족들 다 만나고. 대학교 안 가본 대학이 없고.” 카메라는 이러한 긍정적인 말에 이어 눈 내리는 골목길을 혼자 쓸쓸히 걸어가며 멀어지는 김종분 할머니의 뒷모습을 통해 숨겨진 내적 고통을 드러낸다.

 

 

5. 김종분 할머니: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왕십리 김종분>은 딸, 아들, 손녀와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여주인공 김종분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본다. 이 영화는 과거의 사진·인터뷰와 현재의 영상 재현을 교대로 제시하며 김종분 할머니의 힘겨운 삶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김종분 할머니는 과거의 고달픈 삶과 비교하며 현재의 편안한 삶을 강조하면서 낙관적 인생관을 보여준다. 우디 앨런은 ‘인생은 행복한 삶과 비참한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삶과 끔찍한 삶이 있으며, 현재 삶이 비참한 삶이면 행복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후덕한 인상의 김종분 할머니는 자신과 타인의 삶을 비교하지 않으며,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왕십리 김종분>에서는 가슴에 묻은 고통스러운 슬픔이 있을지라도 삶은 계속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 · 서곡숙
문화평론가, 영화학박사. 현재 청주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서울영상진흥위원회 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이사, 한국영화교육학회 부회장, 계간지 『크리티크 M』 편집위원장,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종상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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