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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자존감 지키기를 사치라 부르는 이들에게 – 영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자존감 지키기를 사치라 부르는 이들에게 – 영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3.03.20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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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에게 어떠한 것도 거슬리는 일이 없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기 때문에. 나에겐 완벽하게 상반되는 두 가지 이유이지만(그리고 대체로 후자를 택한 쪽이겠지만), 다른 이의 눈을 거치면 이 상황은 강제로 공존 가능한 것이 되어 버린다. 누군가는 나의 적절한 상태를 포기라고 부를지도 모를 테니까. 그래서 생각없이 편안한 것뿐이라고 폄하할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이라 해도 이 사회는 정기적이고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이들을 미래를 포기한 이로 만드는데 능하다. 어떻게 그 상황이 괜찮을 수 있느냐는 시선은 쉽게 나의 편안함에 죄책감을 부여하고 불안을 안긴다. 자존감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에게 원래 돈 버는 게 그런 일이라고,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한다. 더운 낮에는 더운 만큼, 추운 밤에는 추운 만큼 스스로를 지키며 흘러가려는 이들의 고뇌는 무시 당하기 십상이다.

영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아마도 이러한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정희(원향라 분)와 영태(박송열 분)는 함께 살며 가정을 꾸리고 있다. 영화 속 그들의 일상을 떠올렸을 때 ‘가정을 꾸렸다’는 표현은 여러모로 의아할 수 있다. 간간이 지나가듯 비치는 결혼 사진과 정희 엄마의 생신에 함께 참석하는 모습은 적어도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게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회사를 다니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대해 서로의 탓을 하지도 않는다. 또 아이를 키우지 않으며 낮과 밤에 상관없이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적어도 가정을 꾸렸다는 성인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방만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들은 삼겹살을 먹으며 전세금이 오를지도 모를 상황을 지나치듯 언급하고, 가족의 행사에 빈손으로 참석하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운 일임을 알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바꾸는 것으로 이어가지는 않는다. 두 사람이 자주 누워있거나 자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이기적이라는 생각과 답답함을 먼저 자아낼지도 모른다.

 

 

정희가 초등학교의 특별 활동 수업에 지원서를 낸다는 점에서, 영태가 영상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빌려줄 수 있는 카메라까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학력과 경력 등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들의 모습은 더욱더 이해 불가해한 것으로 자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어떤 일을 해왔는지 미처 다 나열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일들을 했고 단 하루라도 일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어딘가 이용당한다는 인상을 주는 이의 연락에도 그들은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어색한 만남을 이어갔으며, 이후에 혹시라도 지속적인 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매우 실낱같은 가능성에 먼 길을 달려가는 것도 기꺼워 했다. 그들은 카메라 빌려주고 받은 5만 원, 싫은 소리를 듣긴 했지만 수업이라는 노동 후 받은 8만 원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조금 더 ‘적극적인’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듯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것을 감수하더라도 일단 사람답게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은 아닐까. 이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처럼 가정을 꾸리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는 점에서 매우 견고한 이 사회의 프레임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 대해 매우 원초적인 답을 내놓았고, 그것을 실천했다. 그들은 돈 몇 푼에 담긴 치사함을, 즉 이 몇 만 원이 무엇을 앗아갈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이들이었다. 자존감을 지키며 돈을 벌기 어렵다는 말, 이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데에 충분했다. 그들은 적어도 돈이 필수라기보단 선택의 문제라는 것, 그러니까 이 선택은 돈을 쥐고 함부로 구는 그 모든 것을 수용하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들이 한심해 보일지라도, 또 누군가에겐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사람다움을, 그래서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적어도 지금 당장 돈이 쪼들리더라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조금 더 틀었던 보일러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 대출 이자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때 이자를 내고 조금 남은 돈으로 스무디와 포장 회 한 접시 즐기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의 일상을 채워갔다. 누군가는 쉽게 사치라고 불렀을, 생각없이 돈을 쓴다고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을 그 소비는 그들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겐 자존감을 갉아대는 돈을 자신의 의지대로, 또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지 않는 선에서 소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적어도 돈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물론 그들을 흔드는 상황은 끊임없이 생겨났고, 쉽게 화를 내지 않는 그들에게 사람들은 그리고 세상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그들의 선택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려 들었다. 영태는 카메라를 빌려 간 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정희의 말에 그 형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며,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던 이였다. 정희 역시 아무리 쪼들린다 해도 적어도 빌렸던 돈을 그 무엇보다 먼저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실행하던 이였다. 이들은 세상에서 고립되지 않으려 했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내비치는 가능성을 믿으며 삶을 영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말은 공치사에 가까웠고 믿음을 위기로 돌리는 쪽으로 쉽게 움직였다. 영태에게 간절하게 카메라를 빌려 갔던 형은 기한이 지나도 카메라를 돌려주지 않고 전화를 받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이 너무 급해 카메라를 팔았다며 변명을 늘어 놓는다. 정희의 동기는 대출을 받을 것이라는 정희의 말에 갚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사채업자를 소개시켜 준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려는 그들의 결심은 이렇게 위험한 것으로 돌아오면서 그들의 자존감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상황에서 돈이 주는 달콤함을 생각했을 때 내가 불편하다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에겐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결국 모든 상황이 나를 해치는 것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먼저 생각했다는 의미였을 테다. 형에게 너무도 화가 반 협박처럼 자신의 카메라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온 영태는 일정 금액을 형에게 돌려주었다. 자신의 엄마한테 찾아온 사채업자의 태도에 어쩔 줄 모르던 정희는 결국 이를 갚아준 엄마에게 빚을 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돌아오더라도 결국에는 돈이 주는 달콤함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그들의 모습은 사채를 ‘파란나비론’ 이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누구도 해주지 않을 것을 우리가 해준다는 그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를 일이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이 나라에서 적어도 돈 보다 앞서 지킬 것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누군가에겐 구질구질할 수도 있는, 또 누군가에겐 걱정 없는 일상일 수도 있는 세계가 어떠하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후자를 긍정하는 것, 그리고 영태의 마지막 선택이 이해가 가는 것, 과연 이상한 일일까?

 

 

사실 과거의 영화들을 떠올렸을 때 이러한 성격의 주인공들을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가 과거의 영화들에서 삭제한 한 가지는 바로 ‘꿈’이라는 목표였다. 즉 이 작품은 무엇이 되기 위해 현재의 경제적 상황을 감수하던 여타의 영화들과는 다른 선상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배우이던, 가수이던 목표가 있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견뎌내야 하고 결국 목표를 달성하면 없어져야 할 시련으로 자리한다. 이 상황에 놓여 있다면 나의 현재는 부정해야 할 어떤 것이 될 확률이 높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인물들이 엄청난, 아니 작은 목표라도 지니지 않는 것은 이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그들은 그저 하루라도 일할 수 있는 지금을, 자신을 깎아 먹지 않는 선에서의 현재를 지키고자 한다. 이는 굳이 엄청난 무엇을 향하지 않더라도 그저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고 싶어하는 바람을 담았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다. 사실 나를 탓하지 않고 오늘 하루를 보낸 것,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 아닌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2022)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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