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따뜻하고 서늘하게 침투한 권력의 광기-<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김희경의 시네마 크리티크]따뜻하고 서늘하게 침투한 권력의 광기-<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 김희경(영화평론가)
  • 승인 2023.03.20 10: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stop motion animation)은 다중적인 특성을 갖는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각 캐릭터와 소품을 수작업으로 만든 뒤, 한 프레임마다 조금씩 변화를 주며 촬영한다. 제작 시간이 오래 소요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발전 초기에만 주로 활용됐다. 컴퓨터 기술이 발전한 이후엔 2D, 3D 애니메이션으로 대체됐다. 하지만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을 갖추고 있어 일부 감독들과 애호가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꼭 따뜻하고 정감 어린 느낌을 준다고만 얘기할 수는 없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들을 보다 보면 양가적인 기분을 느끼게 된다. 작품 속 크리처들은 현실에 있는 대상들을 본따 만들어진 만큼 익숙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결코 실재하진 않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질적이면서도 기괴하게 느껴진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양가성을 탁월하게 활용한 작품이다. 델 토로 감독의 인장과도 같은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이야기는 이 작품에도 예외없이 적용됐다. 그런데 전작들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다. 20세기에 멈춰버린 시계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소재가 20세기에 머물렀던 제작 방식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만나 새롭게 작동하는 느낌을 준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가진 감성과 온기를 품고 있으면서도, 델 토로 감독 작품 특유의 서늘함과 암울함이 깊숙이 침투하는 식이다. 여기에 동화적 상상력까지 결합돼, 거대 권력의 광기가 한층 더 짙고 기이하게 그려진다.

델 토로 감독 영화들이 가진 매력은 동일한 소재를 서로 다른 장르와 형식을 통해 얼마나,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중 <셰이프 오브 워터> <판의 미로>는 판타지 영화를 통해서도 전쟁과 파시즘의 비극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음을 증명해낸 작품이다.

그런 델 토로 감독이 새롭게 꺼내든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전 동화로 인식되고 있는 카를로 콜로디의 소설 <피노키오>(1883)였다. 전쟁, 파시즘 등과는 가장 멀리 있다고 할 수 있는 장르에 도달한 다음, 극과 극의 이야기를 연결하고 결합한 것이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피노키오란 존재에도 양가적 특성을 고스란히 구현했다. 이 작품에서 피노키오는 마냥 귀엽고 매끄럽게 그려지지 않았다. 다소 거친 울퉁불퉁한 질감을 가진 존재로 표현됐다.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의 움직임은 묘한 불안감을 선사한다. 그중에서도 그가 권력의 강요에 의해 행하는 인위적인 움직임들은 자주 삐걱대고 흔들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곧장 온몸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물론, 급기야 일부 부위들은 쉽게 잘리고 손상되기도 한다. 특히 그 불안은 피노키오가 서커스단의 꼭두각시가 되어 무대에 오르거나 군인처럼 훈련을 받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크리처이지만 인간과 비슷하고, 아이라고도 하기 어렵지만 아이처럼 연약하게 그려졌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 작품에선 피노키오란 존재의 탄생 자체도 권력의 비극과 참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목수 제페토는 어느 날 아들 카를로를 포탄으로 잃게 된다. 슬픔에 빠져 있던 제페토는 카를로의 무덤 곁에서 자라난 나무를 잘라 피노키오를 만든다. 피노키오는 푸른 요정의 도움으로 생명력을 얻게 되지만, 그 생명력은 끊임없이 권력으로부터 억압된다. 파시스트 경례를 하는 성당 신부, 그에게 거짓말을 하며 노예 계약을 맺는 서커스 단장 등 사회 곳곳엔 권력의 어둠이 자리하고 있으며 호시탐탐 빈틈을 노린다.

그렇다고 델 토로 감독은 권력의 형태를 꼭 전쟁과 파시즘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이 늘 커다랗고 명확하며 구체적인 모습을 띠는 것은 아닌 점을 부각시킨다. 그 권력의 또 다른 모습은 피노키오를 창조한 인물이자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제페토를 통해 그려진다.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향한 뜨거운 부성애를 가진 인물이지만, 그 이면엔 피노키오를 카를로 처럼 만들고 싶어하고 자신이 통제하고 싶어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 작품에서 부성애는 파시즘과 결합해 더 극단적인 형태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시장 포데스타는 자신의 아들 캔들윅에게도 전쟁을 위해 복종하고 희생하는 군인이 되길 강요한다.

엇나간 부성애에도 피노키오는 제페토를 위한 맹목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잃고 나서야 그 사랑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깨달으며 변화한다. 델 토로 감독은 이 과정을 통해 작품에 애니메이션이 가진 온기를 결합한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 곳곳엔 서늘함이 배어 있다. 포데스타는 캔들윅과 함께 있던 훈련 장소에서 포탄을 맞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캔들윅은 죽은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자신과 우정을 나눈 피노키오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그를 찾는 모습이 그려질 뿐이다. 나쁜 것이라고 부정당하기만 했던 피노키오의 거짓말도 제페토와 주변 캐릭터들의 생존을 위한 용도로는 적극 인정받는다. 피노키오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계속 거짓말을 하며 코를 인위적으로 길고 크게 만든다. 그 코로 인해 피노키오는 몸을 주체하는 것도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거짓말은 모두의 생존과 희생을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된다.

클로징에서도 비슷한 양가적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자신만의 길을 찾아 저 멀리 사라지는 피노키오의 뒷모습은 가벼우면서도 불안하게 보인다. 어딘가엔 새로운 전쟁의 씨앗이, 또 어딘가엔 다른 모습의 파시즘이 싹트고 있을테니.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김희경
영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