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2차 대전 패전 이후의 안보정책을 대전환해 '전쟁할 수 없는 나라'에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아베 정부는 1일 '집단적 자위권을 갖고 있으나 평화 헌법의 정신에 맞지 않아 행사할 수 없다'라는 역대 내각의 공식 견해를 바꿔,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헌법상 허용된다'라는 견해를 채택했다. 이로써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정세는 더욱 위험한 내셔널리즘으로 치달을 우려가 짙다. 가리 타니 고진은 "내셔널리즘은 망상이며, 세계시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저는 스스로를 ‘오사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게 상당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저는 예전에 칸트의 책을 읽다가 그의 생각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국가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내셔널리즘은 ‘망상’에 지나지 않으며 근절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내셔널리즘과 비교해 세계시민주의를 거론하고 있는 점은 이해하지만, 특히 제가 놀란 부분은 칸트가 세계시민주의와 함께 조국애를 거론한 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곧 저는 그가 말한 조국애(patriotism)가 근대국가의 내셔널리즘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국애라기보다는 향토애라고 말하는 것이 오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향토란 국적과 인종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생활하는 지역 공동사회(게마인샤프트)입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은 내셔널리즘과 대립되지만 향토애와는 양립하는 개념입니다. 즉 사람은 향토애를 가지면서 세계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세계시민은 구체적으로 다양한 문화를 가져야 합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세계시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지금은 러시아에 속한 이 변방도시(칼리닌그라드)는 당시 정치적으로는 약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발트해의 교역을 통해 번영했던 곳입니다. 그가 말하는 향토애란 말하자면 쾨니히스베르크에 대한 사랑입니다.
베를린, 혹은 도쿄,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향토애가 없습니다. 만약 향토애가 있다고 해도 바로 내셔널리즘으로 직결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사카나 부산의 사람들을 세계 흐름에 뒤처지고 좁은 지역에 갇혀있는 존재라고 여기며, 자신들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세계란 결국 내셔널리즘이라는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사의 구조와 동아시아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세계사의 구조’ 속에서 고찰하기 위해 세계체제의 역사를 간단하게 자료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먼저 표1과 같이, 세계=제국과 세계=경제를 구별해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세계=제국은 교환양식 B가 지배적이고 세계=경제는 C가 지배적입니다.
세계=제국은 군사적인 정복이 기반이 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제국이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약탈이나 강제가 아닌 일종의 교환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복 당한 쪽이 중심에게 복종해 공납을 바치는 대신 보호를 받는 ‘교환’, 이것이 교환양식 B입니다. 이러한 교환이 불가능해지면 제국은 붕괴하고 새롭게 형성됩니다. 세계=제국에는 중심, 주변, 아주변 그리고 권외라는 공간적 구조가 존재합니다.
이 경우 제국의 중심이 주변·아주변을 직접 수탈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주변국가들이 중심에게 조공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오히려 공납한 것 이상의 혜택을 얻습니다. 이는 조공이라는 형태의 교역입니다. 제국은 각 국가·공동체 간에 평화와 교역을 가져다주고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겁니다.
한편 세계=경제는 표 2의 교환양식 C를 기반으로 두고 있습니다. 즉 상품교환을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서도 윌러스틴이 제창한 것처럼 중심, 반주변, 주변이라는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세계=제국과는 전혀 다릅니다. 먼저 권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가 세계=경제에 둘러싸이는 것입니다. 또 이전의 세계=제국도 여기서는 주변부에 위치하게 됩니다. 세계=경제의 특징은 공납이 아닌 상품교환을 통해 잉여가치를 빼앗는다는 점입니다. 세계=경제는 중심부가 교역을 통해 주변부를 수탈하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세계=제국은 고대부터 존재했고 세계=경제는 근대에 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세계=경제는 고대에도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가 그렇습니다. 그리스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세계=제국의 아주변에 있었습니다.
‘주변’ 한반도는 중심의 문명을 받아들여
세계제국 주변과 아주변의 구조에 대해 고찰할 때 저는 동아시아를 예로 듭니다. 다른 세계제국과 달리 중국에 풍부한 사료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중화제국의 ‘주변’부터 생각해봅시다. 터키계(흉노), 위구르, 거란, 몽골, 만주인(여진) 등은 주변에 있는 유목민이지만 중심에 종속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중화제국의 바깥에 제국을 건설하거나 침략을 통해서 제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중심’이 된 것입니다. 오히려 전형적인 ‘주변’은 한반도와 베트남입니다. 이 두 나라는 모두 중심에게 지배당하고 또 이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도 제국의 책봉 하에 있었습니다. 또한 중심의 문명제도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민족입니다.
이것을 주변적인 나라의 전형이라고 한다면 일본은 조금 다릅니다. 일본도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이지만 한반도나 베트남과 다르게 선택적 수용 방식을 취했습니다. 일본인은 중국의 문화·제도를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수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폐기, 배제하지도 않으면서 필요한 만큼만 유지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또 일본인은 그러한 일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다른 국가와 달랐던 점은 제국의 중심에서 온 문화·제도를 외견상으로는 채택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시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독자적인 노선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이 중심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도 그렇지만 한반도 같은 ‘주변’에는 중심으로부터의 압력이 직접적으로 가해집니다. 이러한 압력이 일본에 간접적으로 가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변’을 특징짓는 요소입니다.
한반도의 경우 한나라 때부터 직접적인 지배를 받았습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은 원래 한의 군현제도에 따른 구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삼국 중에서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압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과 결탁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중국에서 독립함과 동시에 중국화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지만 제국으로부터 받는 위협은 언제나 존재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제국의 책봉을 받아 적극적으로 중심의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존립을 꾀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은 ‘아주변’, 동아시아제국 안에 있으면서도 외부로 존재
그런데 일본에서는 탈중국화가 시작됩니다. 8세기 때 이미 그러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오키미(大王)를 ‘천황(天皇)’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습니다. ‘천황’이라는 호칭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황제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는 뜻이니까요. 주변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야마토 조정은 중국에 보내는 공식문서에 위와 같은 호칭을 사용했지만 당 제국이 이를 허용한 이유는 단순히 일본이 지리적으로 멀었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천황, 일본과 같은 명칭은 일본이 동아시아 제국 안에 있으면서도 외부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변’이라는 것입니다.
탈중국화라고 해도 물론 외관상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국문명을 모방하고 관료제 국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라·헤이안 시대에는 관료육성기관인 다이가쿠료(大学寮)가 설립됩니다. 그러나 결국 관위는 태생적 신분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와 같은 제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의 경우 신라시대에는 일본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고려시대 들어서는 과거제도가 상당히 확대되었습니다. 이후 문무양반 관료체계가 정비되었습니다. 게다가 문관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고 문존무비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관료제가 약했기 때문에 무사정권이 탄생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의 관료제는 약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왜 일본에서는 유교가 정착되지 않았을까요? 이는 고대일본 국가 그리고 천황제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제사장=수장이었던 오오키미가 천황으로 바뀌었다고 했지만 천황은 실제적 권력 없이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존재했습니다. 실권을 가진 것은 귀족이었고 그 후에는 무사였습니다. 게다가 무사 정권도 가마쿠라 시대부터 도쿠가와 시대까지 계속 교체되었습니다. 하지만 천황은 계속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중국이나 주변 국가에서는 없었던 일입니다.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가 계속 있었고 왕조교체를 정당화하는 관념이 발전했습니다. 그것은 유교(맹자)를 기반으로 하는 역성혁명이라는 개념입니다. 역성혁명은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닌 정치적 이념 문제입니다. 왕조의 정통성은 천명이 부여하는 것이고 천명은 바로 민의입니다. 민의에 반하면 왕조는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실제로 중국의 새로운 왕조는 민중의 반란을 계기로 탄생되었습니다. 원이나 진과 같은 정복왕조 역시 민의=천명을 실현하지 않으면 존속할 수 없었습니다. 무력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유교를 공부한 관료가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통일신라, 고려, 조선왕조라는 변화는 왕조 교체이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이 필요했습니다. 당연히 문관, 유학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유학이 필수불가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겉보기에는 유학이 있고 관료도 있었지만 필요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왕조 교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히데요시 침략 계획 배후에는 동남아 광역통상권 존재
일본에서 무사정권이 탄생했다는 것은 중앙집권·관료체제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봉건제는 주군이 토지를 부여하는 한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개인 간의 계약관계에 입각한 제도입니다. 이는 지배-복종 관계임과 동시에 호수(쌍무)적 관계입니다. 주인이 신하의 활동에 대해 포상을 내리지 않으면 관계는 끝나 버립니다. 무사정권은 이러한 관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15~16세기에 붕괴됩니다. 일본사회에는 집권적 국가에 의한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교환양식 C, 즉 시장경제가 확대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지에 도시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는 일본의 내부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이 시기에 ‘세계=경제’가 일본에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멕시코를 경유해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교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일본인들도 교역을 위해 동남아시아로 건너갔습니다. 사카이(堺) 등 자립적인 도시가 융성했습니다.
이와 함께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조총의 도래와 보급입니다. 서양에서는 조총 보급으로 인해 기사가 그 존재 이유를 잃었는데 일본의 무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사들이 포상을 기대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일대일로 싸우는 광경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무사는 불필요해진 것입니다.
수많은 봉건영주(다이묘) 간 경쟁 속에서 패권을 쥔 오다 노부나가는 특히 조총을 잘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부나가나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는 가마쿠라 시대와 같은 봉건제 혹은 호수적 주종관계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히데요시의 경우 천민 출신이라는 설이 유력한데 이러한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고위직인 간파쿠다이죠다이진(관백태정대신)에까지 올랐습니다. 이는 ‘하극상’의 정점이라 할 수 있으며 봉건적 주종관계나 신분제가 소멸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16세기 말에는 서양의 절대왕권 같은 체제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교역, 선교사와의 교류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노부나가는 스스로를 절대적 주권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부나가의 지위를 계승한 히데요시는 반대로 황실에 접근해 간파쿠의 지위에 올랐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명나라를 정복해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위해 한반도를 침략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허황된 과대망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계획의 배후에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강화된 군사력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광역통상권이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당시 바깥으로 향하지 않고 폐쇄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명을 대신해 광역통상권을 제패하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렇게 별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 당시 이미 일본은 ‘대항해시대’의 세계=경제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이 메이지 이후에 하려 했던 일을 히데요시는 한발 앞서 실행했고 먼저 좌절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데요시 생전에는 그에게 복종하고 그의 사후에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바로 그러한 노선을 철회했습니다.
도쿠가와, 세계 연계된 상인 자본주의를 거부
도쿠가와 체제는 기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떤 의미로는 히데요시가 벌려놓은 일들을 뒤처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이 망가트린 동아시아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히데요시의 침략과 파괴행위가 있은 뒤였기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이에야스는 진지하게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노력했습니다. 쇼군의 교체와 동시에 조선통신사를 맞이한 것이 그 예입니다. 조선왕조와의 관계 회복은 조선을 책봉하는 명, 청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아시아의 제국과 그 주변이라는 세계 질서를 회복하려 한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 체제는 절대왕정에 가까운 성격을 가졌지만 도쿠가와는 그러한 방향성을 부정한 것입니다. 서유럽의 절대왕권은 영주의 봉건적 특권을 빼앗고 그들을 궁정귀족·관료 속에 편입시켰습니다. 노부나가도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쿠가와는 봉건영주(다이묘)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또 절대왕정이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해 부국강병을 꾀한 것과 대조적으로 도쿠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먼저 ‘쇄국’ 정책을 취했습니다. 물론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지속했고 중국·한반도와의 교역도 이어졌지만 그 정도의 해외교역으로는 16세기와 같은 경제발전이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제를 만들어 상인을 최하위에 두었습니다. 실제로는 끊임없이 상인의 힘에 굴복했지만. 어쨌든 도쿠가와는 이처럼 16세기에 세계시장과 연계되어 개화한 상인자본주의를 억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에야스는 조선왕조의 주자학을 도입해 막부의 공인된 교의로 삼았습니다. 유교를 우위에 두는 것은 전국시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악(禮樂)을 무(武)보다 중시하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야스는 문관에 의한 관료제 국가를 만들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무사계급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무가정권의 정통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또 도쿠가와는 존황(尊皇)을 제창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봉건영주(다이묘)가 선수를 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쿠가와 체제에서는 고대 율령제가 살아남은 것입니다.
게다가 도쿠가와 막부는 군사적 발전을 정지시켰습니다. 다른 봉건영주(다이묘)는 물론 막부가 철포 등을 개발하는 것까지 금지시켰습니다. 즉 도쿠가와는 절대왕권이라면 실행에 옮길 일들을 모두 그만둔 것입니다. 도쿠가와의 원칙은 경제 발전이든 군사적 발전이든 확대주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16세기에 세계시장 혹은 근대를 향해 나아가던 일본사회는 도쿠가와에 의해 발이 묶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도쿠가와 막부는 16세기에 열린 세계=경제(교환양식 C)가 침투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있는 힘껏 노력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세계=경제는 내부에서부터 도쿠가와 체제를 침식하는 동시에 외부에서 개국을 강요하는 미국의 구로부네(黒船, 검은 배)라는 형태로 찾아 왔습니다.
‘중화’ 의식에 집착한 ‘주변’ 조선
메이지 유신 후에 일본은 급속도로 산업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메이지 시대에 시작되었다기보다는 16세기에 이미 존재했었고, 그 후 도쿠가와 시대에 억눌려 있다가, 그 멍에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얻게 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메이지 시대의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 히데요시를 받들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편 한국은 어땠을까요? 히데요시 군을 격퇴한 조선은 그 후 성가신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들이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여진(만주족)의 누르하치가 명 왕조를 몰락시키고 청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이에 조선인들은 진정으로 명의 문화를 계승하는 것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조선이 바로 ‘중화’라는 관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청이 나름대로 서양화를 꾀하려 했던 시절 강한 ‘중화’ 의식을 가진 조선은 개국을 거부합니다. 이는 어떤 의미로는 ‘주변’ 특유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변인 한국과 아주변인 일본이 1870년대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그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제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라타니 고진
일본의 문예평론가, 사상가. 본명은 가라타니 요시오(柄谷善男)로 고진은 필명이다. 호세이대, 킨키대에서 교수를 역임한 뒤 예일대, 콜롬비아대 등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1969년 소세키 론으로 ‘군조오(郡像)’ 신인문학상을, 1978년에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으로 가메이 가쯔이찌로 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은유로서의 건축>, <역사와 반복>, <네이션과 미학>, <세계공화국으로> 등 다수가 있다.
이 글은 지난 5월 23일, 부산대 인문학연구소와 HK ‘고전번역+비교문화학연구단’이 기획한 ‘주변, 석학에게 듣다’라는 강연회의 첫 순서로 초청된 가라타니 고진의 발표문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 주최 측의 허락을 받아 본지에 게재한다. ‘세계사의 구조와 동 아시아’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고진의 발표문은 내년에 다른 강연자들의 글과 함께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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