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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6) 사랑] 왜 우리는 사랑하기가 점점 더 힘들까?
[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6) 사랑] 왜 우리는 사랑하기가 점점 더 힘들까?
  • 정지은 l 홍익대 예술학과 초빙교수
  • 승인 2015.03.04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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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려운/불가능한 시대의 사랑

“나는 아직 사랑이 참 어렵다”고 한다. 어느 시의 제목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랑의 경험을 했고, 지난 세월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랑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30대나 40대다. 이들에게 사랑은 여전히 사적이며 개인적인 서사에 속한다. 사랑이 소설을 통해 대중 앞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소설 속의 사랑은 사랑에 로맨틱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였을 뿐 한 번도 공적인 방식으로 취급된 적이 없다.(1) 따라서 위의 시 제목에서 사랑의 어려움은 연인들이 각자 자신의 환상 속에서 만들어낸 완전한 사랑을 현실에서 실현시키려고 할 때의 어려움, 두 연인 각자의 사랑이 공존할 때 생겨나는 어려움이지 사랑 그 자체의 어려움이 아니다.

그런데 그 어려웠던 사랑이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 2013년 20년 넘게 장기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에서는 사토리세대라는 신개념이 등장했는데, 사토리는 꿈도 목표도 실현하기 힘든 세대가 도달한 “깨달음”이나 “득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토리 세대는 무의미한 소비에 종지부를 찍을 뿐 아니라 일체의 소비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자동차를 사려 하지도 브랜드 옷을 입으려 하지도 않고, 스포츠나 술이나 여행 뿐만 아니라 연애나 결혼에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돈을 많이 벌겠다는 의욕도 없다.(2)

한국에서는 청년노동자를 가리키는 88세대 담론이 있었고, 이 세대를 가리키는 삼포세대라는 또 다른 명명법이 생겨났는데, 삼포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삼포세대가 우리의 주목을 끈 이유는 가족의 재생산이라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우려 속에서 한국의 삼포 세대가 일본의 사토리 세대처럼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는데, 사토리세대는 삼포세대와는 다르게 강제된 선택이라기보다는 체화된 문화로서 어쩌면 사회적으로 더 안 좋은 결과를 낳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토리세대의 일체의 욕망에 대한 무관심은 죽음의 충동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욕망과 연애에 대한 무관심은 경제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에서 다뤄질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에서 매우 진지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의 주제인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랑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욕망의 주체를 탄생시키는 계기일 뿐 아니라, 일반적인 관점에서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지탱하는 가장 건전한 버팀목이다. 열정적 사랑, 낭만적 사랑, 불법적 사랑 등, 사랑이 아무리 다양하게 열거된다고 해도, 또한 낭만적 사랑에서처럼 사랑이 때로는 비극성을 내포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본질은 사랑하는 자를 욕망의 주체로서 움직이게 하는 데 있다. 만일 사랑의 기능이 사회와 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주체를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제 사회의 공적 자원이라고 불려도 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사랑의 무엇이 주체를 욕망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는 것인가? 라캉은 그것을 현실에서 조우할 수는 없지만 현실 안에서 어떤 유한한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상실된 대상, 대상a(3)라고 부른다.

 

사랑의 대상 선택

타자 안의 무엇이 나를 매혹하고,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가? 우리는 스쳐가는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 중에서 사랑의 대상을 선택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이 발생하는 순간 그 사랑은 마치 선택 이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나타난다는 것을. 그것은 대상a가 지닌 필연적 특징 때문이다. 손이 닿을 수 없는 보물이라는 의미에서 아갈마라고도 명명될 수 있는 대상a는 타자 안에서 타자보다 더한 것, 타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대상a는 그 전에 주체가 영원히 상실한 대상이고, 타자 안에서 주체를 매혹하는 욕망의 원인이다. 대상a는 타자 안에서 감춰진 채로 주체를 매혹하지만, 일단 그것이 타자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순간부터 타자의 모든 것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 그(녀)의 냄새, 생각, 취미 등이 사랑하는 자를 매혹한다. 한 마디로 대상a는 사랑을 발생시키는 촉발자와 같다.

사랑이 그렇게 발생한다면, 이제 그 사랑은 어떻게 진행될까? 과연 사랑은 사랑받는 자를 변화시킬까?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감정에 의한 여러 가지 변양들을 다루는데, 비록 그의 목적이 신에 대한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었을지라도, 사랑이나 증오, 치욕, 자부심 등을 정신분석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스피노자가 논하는 사랑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타자 안의 무엇이 내게 기쁨의 원인이 될 때, 나는 타자를 사랑한다(반대로 타자 안의 무엇이 내게 슬픔의 원인이 될 때, 나는 타자를 증오한다).(4) 그때 사랑받는 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응답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사랑받을 정당한 원인을 타자에게 제공했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타자의 사랑을 통해 자기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사랑받는 자의 첫 번째 응답, 스피노자의 정리 33과 34에 대한 해석). 그렇지만, 만일 그가 타자의 사랑을 받을 아무런 원인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는 응답으로 타자를 사랑할 것이며, 타자의 사랑을 되돌려 줄 것이다. 요컨대 그는 사랑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 바뀔 것이다(두 번째 응답, 스피노자의 정리 41에 대한 해석).(5)

사랑받는 자의 첫 번째 응답의 결과는 자기 사랑, 즉 나르시시즘이다. 사랑받는 자는 자신이 기쁨의 원인임을 안다. 그러한 자기만족 속에서 사랑받는 자는 아무런 결여를 겪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사랑을 되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결여 없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자는 신밖에 없으며, 스피노자의 신은 그 자체로 완결적이기에 인간의 사랑에 굳이 응답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그런 경우 나르시시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의 편에서 보자면 타자는 언제나 온전히 기쁨의 원인이기에 사랑에 완전히 빠진 자는 거의 신을 사랑하듯이 타자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숭고함이 여기서 비롯된다.

두 번째 응답의 결과는 환유다.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쁨의 원인이 무언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의해 사랑받으며, 그로 인한 당혹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사랑하는 자를 모방함으로써 사랑을 돌려주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결여의 주체가 된다. 이 두 번째 응답에서 사랑은 사랑으로서 실현된다.

사랑의 상호성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 즉 “자신의 결여”를 돌려주는 행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요구는 필요와는 다른데, 필요가 충족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랑의 요구는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자들은 자신이 상실한 대상a를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에게서 영원히 추구할 것이다. 만족이 불가능한 사랑, 대상a를 매개로 한 사랑은 낭만적 사랑으로 종종 나타나며, 보다 비극적으로는, 벤야민을 따를 때 “첫 눈에 반한” 사랑, 발생하는 순간 끝나버리는 사랑의 충격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낭만적 사랑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낭만적 사랑을 사랑의 전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은―정신분석이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처음부터 있지 않았다. 낭만적 사랑은 개인의 쾌락이 중요해지고, 그러한 쾌락이 사회적 제도나 법과 충돌하는 근대 이후에 생겨났다. 낭만적 사랑은 금지에도 불구하고, 혹은 금지 때문에 유지되는 것으로서 타자 안의 무엇을 더욱 반짝이게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금지된 사랑이나, 심지어 불륜의 사랑이 더욱 강렬한 이유는 바로 그 금지가 타자 안의 아갈마를 더욱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 <색계>에서 정보부장 ‘이’를 파멸시키기 위해 스파이 역할을 했던 막 부인이 마음을 180도 바꾼 순간이 ‘이’가 그녀에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넨 다음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몇 캐럿이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반지는 조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사랑을 금지당한 막 부인 그녀 자신에게서 ‘이’ 부장이 발견한 아갈마의 은유니까 말이다.

그렇듯 낭만적 사랑은 언제나 결혼제도와 결부되어 나타났으며, 우리 시대에 더 이상 낭만적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이면에 결혼제도의 몰락, 결혼제도의 탈성화(脫聖火)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제도이기에는 너무나도 비즈니스적인

니클라스 루만에 이어 낭만적 사랑과 친밀성에 대해 연구했던 앤서니 기든스는 근대 이후 생겨난 낭만적 사랑은 남자와 여자에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성차에 따른 낭만적 사랑의 차이는 가정과 여성을 나란히 놓는 빅토리아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은데, 남자는 결혼 외부에서 낭만적 사랑을 찾음으로써 열정적 사랑을 보존할 수 있었던 반면에, 가정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던 여자는 낭만적 사랑을 가정 내부에서 추구했다. 낭만적 사랑이 만일 “첫 눈에 반한”, 하지만 마치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과 같은 사랑이라면 그건 결혼과 무관한 사랑이었겠고(남자), 낭만적 사랑이 만일 “우리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영원히”라면 그건 바깥으로 향할 수 없는 아내의 사랑이었을 것이다(여자). 하지만 남자와 여자에게 모두 결혼은 남녀 관계의 원리적 제도처럼 존재했다.

낭만적 사랑의 종말과 결혼제도의 탈성화(脫聖火)를 명확하게 드러낸 소설이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이다. 지금은 혼인 시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혼인정보업체를 이용하는 남녀들이 늘어났지만, 결혼을 제도라기보다는 하나의 비즈니스로 바라 본 정이현의 소설은 발표될 당시인 2003년에는 꽤 새로웠다.

그저 그런 평범한 집에서 태어난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처녀성과 탁월한 연애 노하우를 이용해서, 상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결혼을 꿈꾼다. 그녀에게 사랑은 정치고 결혼은 비즈니스다. 결혼이 결과야 어떻든 과거에는 낭만적 사랑으로 시작되었다면 그 소설에서 결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즈니스다. 결혼이 제도성을 잃어버리고 비즈니스처럼 되어버린 그 소설에서 주인공은 여자다. 남자들이 여전히 결혼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남녀관계의 원리처럼 생각하고, 결혼 바깥의 낭만적 사랑을 꿈꿀 때(결혼을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이 생각할 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게 여자라는 점은 꽤 흥미롭다. 이제 여자에게 결혼은 그 안에서 낭만적 사랑을 꿈꾸게 하는 장소도 아니고, 어떤 고귀한 원리로서 지켜져야 하는 제도도 아닌 것이다. 물론 정이현의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의 비즈니스는 실패하지만, 이 소설은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여자 편에서 얼마나 급진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6) 정이현의 소설에서 또 주목할 점은 낭만적 사랑 역시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앤소니 기든스는 남자보다는 여자 편에서 로맨스-추구(The quest-romance)가 더 잘 나타난다고 말하지만, 여하간 사랑이건 결혼이건 사회적 실험을 시작하는 것은 여자라고 말한다면 잘못일까?

연애와 성 담론을 이끌어가면서 시청자의 고민을 들어주는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이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들 네 명이 모두 남자다. 게다가 그들은 기혼남, 이혼남, 독신 등 다양하다. 고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연애상담 프로그램이 낭만적 사랑은 사라지고 결혼제도가 몰락한 지금에도 꾸준히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7)

지금 한국을 바라보면 사랑과 성과 관련해서, 양극단을 오가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무구한 썸남썸녀가 한 편에 있고, 파렴치한 성폭력자들이 다른 한 편에 있다.(8) 성적 아이콘들이 TV나 광고를 도배하는 동안, 정답을 찾지 못하는 오래된 사랑 고민들이 여전히 이야기된다. 이 아이러니는 왜일까?

 

오인된 사랑과 욕망의 충동대리물들

우리는 사랑의 욕망과 성충동을, 완전한 사랑의 불가능성으로 인한 자기 고통과 성충동의 지배로 인한 타자 폭력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사랑하는 자는 욕망의 원인인 대상a로 인해 타자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대상a는 사랑을 발생시키지만 도달할 수는 없는 어떤 것이며, 타자 안의 대상a는 그(녀)의 인격 전체를 매혹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인격으로서의 사랑 대상은 무작위로 선택되지 않는다. 사랑 대상은 사랑하는 주체가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으로서 자아 이상(9)에 가깝다. 첫사랑의 대상이 교사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욕망의 원인인 대상a는 이것을 포함한다고 여겨지는 인격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충동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시선으로부터 분리된 응시는 시관충동(pulsion scopique)를 일으키는데, 충동의 항상적 압력을 받아, 주체는 자기자신을 응시 아래에 놓으려는 노출증과 같은 도착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욕망의 원인인 대상a가 충동의 부분대상이 되면서 욕망의 주체는 충동[과 부분대상]의 노예가 된다. 욕망이 만족될 수 없는 것이기에 자신의 한계와 금지를 결정해야 한다면, 충동은 언제나 만족을 발견한다. 충동은 항상적 압력이고 대상a의 주위를 도는 순환 자체에서 향유를 산출한다. 물론 이때 충동의 대상은 인격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분대상이고 그때의 향유는 특별한 종류의 만족이다.

바로 그러한 특별한 종류의 만족인 향유는 또한 자본가들이 노리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향유는 이성을 넘어서는 어떤 압력에 의해 반복적으로 추구되는/소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걸그룹 소녀의 핫팬츠 아래로 노출된 흰 다리나 광고 속 키스를 부르는 입술, 남자아이돌의 다리에 꼭 달라붙은 스키니 바지 등은 무의식적 충동의 대상이 됨으로써 시선의 주체에게 향유를 가져다준다. 게다가 보통의 소녀들과 소년들은 그런 옷차림을 모방함으로써 자신이 매력적이게 보일 수 있다고 믿는다. TV에서나 현실에서나 사람은 사라지고 충동의 부분대상들이 넘쳐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꼰대스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러한 비판에 대해, 얼마 전 수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비긴 어게인>의 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응수하고 싶다. 영화 속에서 성인 여자인 그레타는 사춘기 소녀인 바이올렛이 사랑하는 남자아이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고민하는 것을 보고서, 그녀가 옷차림을 바꾸도록 도와준다. 그리하여 바이올렛이 핫팬츠와 끈 나시 티의 노출이 심한 옷차림에서 그보다는 정숙하지만 자연스러운 소녀의 옷차림으로 갈아입자, 짝사랑 상대였던 남자아이가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고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녀의 새로운 옷차림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욕망의 원인, 대상a는 은폐됨으로써만 기능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원인-대상a가 노출되었을 때 욕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욕망 원인의 담지자인 인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충동의 부분대상들만이 부유한다. 성을 무조건 억압하자는 게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성을 사랑을 위해 사용하자는 것이다. 오로지 충동을 만족시키는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회적 자원

처음으로 돌아와 보자. 한국의 삼포세대가 일본의 사토리세대로 발전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으로 이 글을 시작했다. 욕망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희망을 포기한 세대, 그래서 행복한 세대. 확장보다는 수축을 추구하는 사토리세대는 불가능한 희망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연애와 결혼에도 관심이 없다. 언뜻, 불가능한 희망을 깨끗하게 포기하는 태도는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건을 사기 전에 꼼꼼하게 따져보는 자본주의 사회의 새로운 합리성과 비슷한 유형 같은 합리성.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통계자료에 따르면, 사토리세대는 그 어느 때의 세대보다 큰 행복감을 느끼지만 불안감도 마찬가지로 크게 느낀다고 한다. 한 마디로 역설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 행복감과 불안감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욕망의 주체는 신경증적 주체이다. 병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상적인 모든 주체는 신경증적 주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욕망의 주체는 항상 결여 속에 있는데, 이는 주체의 욕망이 도달 불가능한 타자의 욕망(10)이기 때문이다. 또한 욕망의 주체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기에 행복할 수 없는 주체이다. 타자의 욕망은 결여의 주체가 실재와 조우하는 것을 가로막는 방패막이가 되기도 한다. 만일 주체가 불안감을 느낀다면, 이는 실재와 가까워졌기에 울리는 일종의 경계경보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섹스는 어떨까? 사랑에는 타자의 욕망이 개입한다. 사랑하는 주체가 정의상 욕망(결여)의 주체라면 사랑받는 주체는 사랑을 되돌려 주면서 자기 차례에서 욕망(결여)의 주체가 된다. 마르크스가 “네가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너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11)하다고 말할 때, 그는 사랑하는 인간과 욕망의 주체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듯이 사랑은 두 결여 주체가 만들어내는 어떤 표현형태를 가진다. 사랑의 표현형태 안에 포함되지 않은 섹스, 충동을 만족시키기만 하는 섹스에는 날 것의 살덩어리만이 있을 뿐, 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충동의 대상들이 항상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인간을 고독과 폭력 속에 노출시킬수록, 사랑은 사회적 자원으로서 관심있게 다뤄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인간과 인간을 건강한 방식으로 매개하고 인간을 욕망의 주체로서 존재케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려되는 점은 내가 사랑의 잘못된 현상만을 나열하면서, 긍정적 사랑을 간과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모방하면서 실현되는 것, 건강한 사랑을 하는 연인들이 사방으로 전파되기를 바랄 뿐이다.

 

글․정지은

프랑스 디종 부르고뉴 대학에서 메를로-퐁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홍익대, 추계예술대, 대진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건국대 몸문화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도서출판b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유한성 이후>와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번역했고, 현상학과 정신분석학과의 접점 속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1) 18세기 이후 등장한 낭만적 사랑이 소설의 발생과 유관하다는 주장은 여러 사람이 하고 있다.
(2) <프레시안> 2013. 4. 15일자 신문에서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기 침체적인 경제 상황에서 비롯된 일본의 사토리세대를 소개하는데, 이러한 모습을 한국의 삼포세대의 미래로서 바라본다.
(3) 대상a(objet a)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용어로서 타자와의 관계를 매개하는 부분대상들 가운데 주체의 욕망이 걸려있는 대상을 가리킨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정해 놓은 젖가슴, 똥 이외에도 응시와 목소리를 거기에 추가시킨다.
(4) 우리가 사랑 아니면 증오라고 흔히 표현하듯이 사랑은 언제나 증오로 역전될 수 있다.
(5) 정신분석에 의한 스피노자의 해석은 다음의 책에서 빌려왔다. 미란 보조비치, <암흑지점>, 이성민 역, 도서출판b.
(6) 자신의 마지막 처녀성을 비즈니스를 위해 선물로 줌으로써 결혼-비즈니스에 성공할 수 있다는 여자 주인공의 믿음에는 남자들은 결혼을 여전히 성스러운 제도로 여길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7) “왜 20대는 연애상담에 열광하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벌인 토론에서 박권일은 <마녀사냥>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는 이유를, 20대들이 자신의 연애를 검증받고 연애를 매뉴얼화하기를 원하고, 그럼으로써 치명적일 수도 있을 실패를 미연에 방지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2014년 10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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