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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증상 읽기(8) 직업] 직업은 세상의 빛을 고루 나누고 있을까?
[한국사회의 증상 읽기(8) 직업] 직업은 세상의 빛을 고루 나누고 있을까?
  • 이성민 l 철학자
  • 승인 2015.04.30 17:1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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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켤레의 구두>, 1886 - 빈센트 반 고흐

현대인에게는 아주 중요한 자유가 있다. 바로 선택의 자유다. 예전에는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현대인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당연한 어떤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는 말이다. 가령 우리는 우리가 입을 의복을 일반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옷은 종종 사람을 말해주므로, 중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의복처럼 직업도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의 직업이 나의 직업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헌법 제15조에 따르면 오늘날 “모든 국민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경제학자는 이런 자유를 다만 경제적 자유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직업을 통해서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구입한다. 이른바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시대이므로 꼭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에 들거나 필요한 옷을 고르는 일이 다만 경제활동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경제적 중요성만을 갖는 선택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는 직업을 선택하는 일도 그렇다. 우리는 교사나 의사로 태어나지도 않으며, 요리사나 엔지니어로 태어나지도 않으며, 환경미화원이나 공무원으로 태어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때가 되면 선택을 해야 하며, 이 선택은 (남아 있는 새로운) 인생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선택이 된다.
 

직업선택의 자유

직업에는 한 개인의 삶의 의미나 사회의 건강함과 관련된 본질적 측면이 있다. 직업의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사회학자 뒤르케임은 이렇게 말했다. “개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적합한 목적이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을 때, 그는 도덕적 비참의 상태로 전락하며 이는 그를 자살로 이끈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이와 같은 경고는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목적으로 삼았던 것은 일반적으로 가족이었다. 뒤르케임은 친족 공동체의 소멸과 더불어 부부가족으로 축소된 오늘날의 가족은 점점 더 그러한 도덕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을 단단히 붙잡아줄 정도로 충분히 그 개인과 가까우면서도, 그에게 광대한 관점을 허용할 정도로 충분히 지속적인 단 하나의 집단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집단은 직업 집단이다.”(1)

그런데 뒤르케임의 희망과는 달리, 오늘날 직업의 이러한 측면은 점점 더 침식당하고 있다. 오늘날 직업의 현실은 뒤르케임이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알다시피 요즘에는 가족을 단위로 하는 불평등이 사회에서 극심해졌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달라지거나 애당초 주어지지 않기도 한다. 또한 선택하고 싶은 직업의 종류와 양도 줄어들고 있다. 가령 “좋았던 옛날” 각종 가게 주인들이 했던 일들을 오늘날은 대형마트 종업원들이 하고 있다. 또한 인기 드라마 <미생>이 잘 보여주었듯이, 직장인의 현실은 합리적이고 성숙한 일의 보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봉건적이고 퇴행적인 인간관계를 견뎌내면서 작은 보람 한두 조각 건지는 데 있는 것도 같다. 오늘날 우리는 직업선택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직업선택의 자유에 부정적으로 간섭하는 두 가지 잘 알려진 요인이 있다.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명성이다. 돈은 직업 선택의 중요성을 흐려놓으며, 그 자체가 직업 선택의 주된 기준이 되기도 한다. 돈을 많이 벌 수 없는 직업은 직업의 본래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폄하되거나 천시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잘 알려진 요소는 오늘날 “인기”라고 불리는 상상적 명성이다. 이것은 특히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이른바 연예인이 되기를 원한다. 게다가 인기에는 돈도 따라오기 마련이므로 금상첨화인 셈이다. 이 상상적 나르시시즘의 세계가 욕망을 더 많이 빨아들일수록 현실에서는 그만큼 욕망이 빠져나가기 마련이며, 본래적인 직업의 세계는 빈곤해지기 마련이다. 오늘날 직업은 다만 돈을 버는 경제적 활동일 뿐이며, 직업의 세계는 삶의 의미가 전개되는 생생한 장소가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청소년들은 그러한 생생한 장소가 있다면 그곳을 TV 화면 저 너머의 연예계라고 생각한다.

직업선택의 자유의 실현을 가로막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앞의 것과는 성질이나 종류가 조금 다른 것이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메슬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2) 직업상담사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로버트 시먼스는 바로 이 말을 직업에도 적용한다. 즉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에게는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줄 무언가가 필요할 것이다. 시먼스는 직업상담을 받아보라고 조언한다.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직업상담사가 아니다. 대신에 나는 철학자로서 상담 말고 다른 것을 제공하려고 한다. 가령 교사가 되는 것과 엔지니어가 되는 것은 분명 너무나도 다른 선택이다. 이 선택에 걸려 있는 것은 다만 돈이 아니다. 그 점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다른 것일까? 우리는 이 두 선택이 왜 근본적으로 다른 길의 선택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것이 또한 직업선택의 자유가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즉 직업에 대한 철학의 부재에서 오는 장벽.

나는 여기서 직업의 선택이 다만 다른 길의 선택에 불과하지 않고 다른 세계의 선택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직업의 선택이 세계의 선택일 경우, 첫째 이제 우리에게는 그곳이 어떤 세계인지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성이 생긴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돈과 인기를 획득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변경하지 않는 한―계속 살아가게 될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세계를 들여다보면 틀림없이 우리의 선택과 삶에 대한 태도는 성숙하고 정확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즉 사람들이 점차로 세계로서 직업을 선택하게 되면, 직업의 각 세계에는 돈과 상상적 명성이 내몰았던 직업의 의미, 즉 반짝이는 직업의 이념=이데아들이 다시 찾아와 깃들게 될 것이다.
 

인간과 자연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진부하기까지 한 어떤 구분에서 시작해 보도록 하자. 아이들이 자라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직업의 선택은 아니더라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된다. 즉 인문계열과 자연계열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구분은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것도 같고, 또한 최근에는 계열 통합에 관한 논의도 생겨나고 있다. 더 나아가 현재 많은 대학에서는 인문계열 학과의 축소나 통폐합이 진행되고 있다. 나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보이는 이러한 현실적 경향을 직접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는 인문계열과 자연계열의 구분 그 자체를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한다.

학문의 구분으로 말해보자면 그것은 인문학과 자연학의 구분이다. 인문학은 인간과 관계된 학문이다. 반면에 자연학은 자연과 관계된 학문이다. 의학이 인간을 다루면서도 자연학인 이유는 자연으로서의 인간, 즉 인간의 몸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을 다루는 것과 인간을 다루는 것의 차이는 무시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요즘은 교육이나 육아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으므로, 사람들은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 구분에 입각해서 직업을 분류할 경우, 세상의 모든 직업을 분류할 수는 없어도 상당히 많은 중요한 직업들을 분류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직업을 일차적으로 인간을 다루는 직업과 자연을 다루는 직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을 다루는 일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일은 인간의 성장을 다루는 일이다. 인간은 문화적 동물이며, 그렇기에 매우 긴 성장 기간을 필요로 한다. 아이는 이러한 성장의 과제를 혼자 해결할 수 없으며, 어른들이나 동기간이나 또래집단을 필요로 한다. 예전에는 대체로 그 어른들의 역할이라는 것이 그것에 특화된 직업을 가진 어른들의 역할은 아니었으며, 아이들은 마을공동체에서 보고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이 점점 더 전문적인 직업의 기능이 되어가고 있다.

오늘날 인간을 다루는 직업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육아도우미, 보육교사, 유치원교사, 초등학교 교사, 중고등학교 교사, 교수, 심리상담사 등이 포함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직업들을 포함하는 직업군을 “제1직업군”이라고 부르겠다. 부모는 (아직) 직업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부모가 직업인 세상이 도래한다면, 다시 말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가족이 사라진다면, 그곳에서 부모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제1직업군에 속할 것이다. 제1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경제적 관점에 물든 사람들은,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령 “성장이냐 복지냐” 같은 대립 구도에 익숙하다. 이때 “성장”이란 인간의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성장을 말한다. 반면에 인간의 성장을 주되게 떠맡고 있는 영역은 고유한 이념과 모험과 반짝임을 상실한 채 다만 시혜적 어감과 더불어서 모호하게 “복지”의 영역으로 지칭된다.

직업을 일차적으로 인간을 다루는 직업과 자연을 다루는 직업으로 분류할 때, 이제 이 분류법 속에서 남은 것은 자연을 다루는 직업이다. 자연을 다루는 직업에는 알다시피 농수산업 종사자나 각 분야의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속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직업들을 포함하는 직업군을 “제2직업군”이라고 부르겠다. 제2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이 다루는 것은 인간의 자연(=아이)이 아니라 대자연이다. “대자연”이라는 표현이 오늘날에는 부적절해 보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오늘날 자연과학자들은 아주 작은 것들의 영역에도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일차적인 직업 분류가 끝났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법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인간을 다루느냐 아니면 자연을 다루느냐에 근거한 이와 같은 분류법은 가령 공무원, 정치인, 언론인, 법률가, 은행원, 경찰, 군인, 조종사, “삼성맨”이나 “현대맨”, 연예인, 운동선수, 기업가 같은 직업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따로 구분해주지는 않는다. 당분간 이와 같은 직업들을 편의상 “제3직업군”으로 분류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일차적인 직업 분류는 비록 완전한 분류는 아니더라도 그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즉 이와 같은 분류법이 없었다면 할 수 없던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분류법에 입각했을 때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제3직업군의 직업들이 기능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분명 우리 사회는 혼동에 빠지거나 퇴보하거나 따분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1직업군과 제2직업군의 직업들이 기능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사회는 단적으로 소멸할 것이다. 제2직업군의 직업들이 없다면, 문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나 자원이 공급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에볼라나 자연재해 같은 자연의 위협에 대처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제1직업군의 직업들이 없다면, 아무도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을 것이고, 문화=문명이 전수되지 않을 것이고, 바로 그 과학자나 엔지니어도 양성되지 않을 것이고, 사회적 재생산이 멈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한 사회에서 제1직업군과 제2직업군의 중요성이 제3직업군에 비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차적인 직업 분류법을 통해 알 수 있게 된 사실이다. 그런데 현실을 들여다보면 직업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가 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제1직업군이나 제2직업군에 비해 터무니없이 훨씬 더 좋은 평가나 대우를 받는 직업들 다수가 제3직업군에 속한다. 하는 일에 비해 과도한 돈이나 명성을 얻는 사람들은 대체로 제3직업군에 속한다.
▶제1직업군이 인문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할 때, 오늘날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내가 여기서 제1직업군의 핵심적 가치나 이념으로 보고 있는 것, 즉 인간의 성장 사이에는 분명 괴리가 있다. 이러한 괴리는 오늘날―인문학의 존재 이유를 부정할 구실이 아니라―인문학의 타락을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다.
 

직업의 세계지도

이와 같은 분류법 덕분에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그려볼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이 그려볼 수 있다.

제1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은 가족이나 학교 같은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일을 한다. 아이들은 바로 그곳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성장한다. 성장을 하면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그리하여 그 아이들이 이제 성년이 되면 직업의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제1직업군에 속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게 되는 세계를 제1세계 또는 공동체라고 부를 것이다.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제2직업군에 속하는 직업을 선택할 것이다. 즉 그들은 공동체에 남지 않고 공동체를 떠날 것이다. 그들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세계를 나는 제2세계 또는 연합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같은 길을 선택한 동료들과 더불어서 자연을 탐구하고 자연과 대결하고 자연을 개조하거나 보존하는 일을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이 자연에게 요구하는 것을 획득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미래에 인간이 지구 바깥으로 나아가야 할 때, 이를 인도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 당연히 자연과학이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성년이 되어 연합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성장한 세계인 공동체에 남아서 이제는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하는 일에서, 아이들의 성장과 배움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은 교사 같은 공동체적 직업을 선택할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에 남아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는가를 놓고 실천과 탐구를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 당연히 인문학이 도움을 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관점을 얻었다. 즉 직업을 선택하는 일은 다만 온전한 경제생활을 영위한다는 의미를 넘어, 앞으로 살아갈 세계를 선택하는 문제다. 제1직업군에 속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장차 자신이 성인으로 살아가면서 욕망을 펼칠 세계로 선택한다. 제2직업군에 속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사람은 자연과 직면하는 공동체 외부를 자신의 세계로 선택한다.

조선 같은 신분 사회에서는 직업 선택의 자유와 의복 선택의 자유가 오늘날처럼 크지 않았다. 오히려 정해진 신분에 따라서 태어나면서 직업이 미리 결정되고 성인이 되면 그 직업과 신분에 따라 의복도 정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알다시피 오늘날 개인은 공식적으로 직업과 의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가운데서 의복의 선택은 세계의 선택과 무관하지만 직업의 선택은 그렇지 않다. 물론 경찰이나 군인처럼 직업에 따라서 따로 의복이 정해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더 나아가 그 의복 때문에―가령 제복이 멋있어서!―직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오늘날 직업의 선택과 의복의 선택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것의 선택이 곧 세계의 선택이 되는 것은 직업의 경우에만 타당하다.
 

무한도전

우리는 직업이 세계라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고 직업의 세계를 다 둘러본 것은 아니다. 내가 편의상 제3직업군으로 분류한 직업까지 포함한다면 직업의 관점에서 본 세계 지도는 그림1이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채로울 것이다. 하지만 다채롭다고? 우리가 현실에서 접하는 직업의 세계가 과연 그럴까? 그곳에서 다채롭고 매력적인 빛이 발산되고 있을까? 장차 그중 하나를 자기 직업으로 선택하게 될 아이들의 눈을 반짝이게 하고 아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침이 되면 우리는 집을 떠나 직업의 세계로 향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직업의 세계를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 온 가족이 TV를 시청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그 온 가족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여하간, 한 신문 기사를 참조하면, 바로 그 황금시간대라고 불리는 시간에 한국과 일본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이 다르다.

알다시피 한국의 경우 예능 프로그램이 대세여서, 가령 무한도전, 불후의 명곡, 스타킹 등이 방영된다. 일본의 경우 대담과 특집 등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주목을 끄는 하나가 NHK의 “超絶凄技”이다. “기절초풍 초정밀 기술” 정도의 의미라고 한다. 주된 내용은 제조업의 초정밀 기술을 두 개의 팀이 나눠 겨루는 것이다. 알다시피 제조업 하면 떠오르는 두 나라가 있다면 바로 일본과 독일이다. 이 프로그램은 독일 중소기업과의 대결도 방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사람들로 하여금 직업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만든다.(3)

한국의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은 무엇을 할까? 모든 것을 다 한다. 그들은 가령 농사를 짓기도 하고, 레슬링도 하고, 봅슬레이도 하고, 회사원도 되어도 보고, 가수도 하고, 환경을 걱정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추격전을 벌이기도 하고, 달력을 만들기도 하고, 한식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멤버들끼리 얼굴 자랑을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무한도전”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들은 가치를 전도시키고 있다. <무한도전> 애청자들이 농사나 레슬링이나 봅슬레이나 직장인이나 환경 같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결국 그때뿐일 것이다. 반면에 그들은 <무한도전> 멤버들에게 항구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이 프로그램은 직업이 아니라 몇 명의 별 문제없는 개인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각종 직업을 이용하면서 말이다.

이 프로그램이 아이들만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면 어쩌면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들이 나와서 아이들처럼 행동하는 이 프로그램은 세계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세계에 나와서 자신만의 능력을 키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에게 굽신거리게 만든다. 왜냐하면 빛은 바로 그들에게서 발하며 그들이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하루를 같이 보내면 명성을 얻기 때문이다.
 

공적 관심

<무한도전>의 직업에 대한 관심은 NHK 프로그램이 제조업에 보이는 관심에 비해 가짜 관심 혹은 본말이 전도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 대부분 무한도전 자체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 프로그램은 나르시시즘의 함정에 빠져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다.

직업에 대한 또 다른 가짜 관심이 있다. 최근에 우리는 그 가짜 관심이 연예인의 입담과 방송 카메라를 통해서가 아니라 CCTV라는 또 다른 카메라의 형태로 구현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카메라는 스스로 요란하게 말하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사람들의 “무한도전”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러한 관심은 내가 제1세계라고 불렀던 곳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촉발되었다. 한 어린이집에서 발생한 아동학대 장면이 CCTV에 찍혀 공개되었고, 이후에 사람들은 모든 어린이집에 CCTV를 설치해야 한다는 요구를 통해 제1세계에 대한 “관심”을 표출했다. 물론 보육교사의 인권 및 열악한 처우를 언급하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이야기의 결론에서 가장 비극적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드러나는―장면은 모든 어린이집에 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장면도 아니고 결국은 앞으로 CCTV가 모든 어린이집에 설치되는 장면도 아니다. 오히려 보육교사들이 CCTV 설치에 차라리 찬성하는 장면이다. 전국보육교사총연합회 김명자 대표에 따르면 많은 교사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CCTV에 찬성하고 있으며, 오히려 반대하는 것은 치부가 드러날 것을 염려하는 어린이집 원장들이다.(4)

그렇다면 보육교사들의 찬성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는 무엇일까? 첫째, 로크나 루소나 헤겔 같은 쟁쟁한 근대 철학자들은 여자와 아이들이 있는 공간을 사적인 공간으로 따로 규정하고 싶어 했다. 그들의 그러한 소망은 너무나도 간절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가족으로 국한되지 않는 그 공간, 즉 제1세계가 사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둘째, 바로 그 세계가, 철학자도 정치인도 실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그 세계가, 오히려 경제인만이 앞으로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도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까 하고 관심을 기울일 것만 같은 그 세계가, 오늘날 바로 그 공적 관심의 심각한 결핍을 겪고 있다. 공적 관심이 심각하게 결핍된 상태에서, 그것을 대체할 것은 감시 말고는 없다. 슬프게도 감시가 공적 관심의 유일무이한 현실적 대체물이다.

예전에 나는 인공위성이 한국과 북한의 밤을 찍은 사진을 보았다. 북한 지역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양 암흑이었고, 남한 지역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직업의 세계를 찍는 인공위성 카메라가 있다고 하자. 내가 세 가지로 분류해놓은 세계에서 어느 곳이 가장 밝게 빛날까? 미국의 경우 제2세계는 확실히 밝게 빛날 것이다. 하지만 한국도 그러할까?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스웨덴은 제1세계가 밝게 빛날 것이다. 하지만 한국도 그러할까? 한국의 경우 제3세계의 일부가 아주 밝게 빛날 것이고, 나머지 세계는 어둡거나 컴컴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빛을 재분배할 수 있을까? 나는 세계의 예능화를 멈추는 것이 한 가지 길이라고 생각한다. 제3세계부터 말이다. 빛으로만 희망의 싹이 터서 자라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물을 주어야 한다. 나는 그 누군가가 우선은 직업 세계의 시민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이성민
서울시립대 대학원 철학 전공. 도서출판 b 기획위원. 저서로는 <사랑과 연합>, <권태>(공저), <라캉과 지젝>(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라캉의 주체>,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 등 다수가 있다.


(1) Emile Durkheim, “A Durkheim Fragment”, The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 70, no. 5 (Mar., 1965), pp. 534, 535.
(2)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정영목 옮김, 은행나무, 2012, 125쪽에서 재인용.
(3) 이석봉, ‘기절초풍 초정밀 일 제조업 vs 예능 천국 한국’, <헬로디디>, 2015년 3월 29일자. http://www.hellodd.com/news/article.html?no=52629
(4) 정주영, ‘CCTV, 많은 교사들은 찬성… 치부 두려운 원장들이 반대,’ <중앙선데이>, 2015년 3월 15일자.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7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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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 l 철학자
이성민 l 철학자 info@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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