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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11) 지식] 무엇을 알 것인가? '경험의 빈곤'과 '정신적 쇠약'에 대처하는 정신분석적 방법
[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11) 지식] 무엇을 알 것인가? '경험의 빈곤'과 '정신적 쇠약'에 대처하는 정신분석적 방법
  • 김소연 l 영화학 박사
  • 승인 2015.07.31 13: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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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으로 포장하다>, 2010 - 안미경

무한한 정보, 무한한 경쟁, 무한한 속도. 그렇게 온 세상이 한통속이다. 그러니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온 국민이 공부(해야)한다. 온 나라가 바쁘다. 온종일, 온 신경이 예민하다. 이런 세상, 달리고 달려도 끝없는 자기계발의 길이 온몸과 마음을 좀먹는 세상, 결국에는 백기를 흔들게 만드는, 온통 루저들 뿐인 세상. 이 위험하고도 피로한 세상, 정녕 당신은 살 만한가?

여기가 서울이라서,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했던 그 서울이라서 더욱 그런 인상을 받는지는 모르겠다. 어느 동네를 가도 각종 학원들이 내건 간판과 홍보용 현수막들을 피할 수 없다. 입시철 무렵이면 어느어느 대학에 들어갔다는 누구누구의 자랑스런 이름들이 내걸린다.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의 실태 조사에서 이미 사교육계 전체 종사자수는 전체 공·사립 초·중·고 교원 수인 39만5천명을 넘어서는 60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되었다. 만일 예전 5공 시절의 어느 날처럼 느닷없이 전국민 사교육 금지가 선포되기라도 한다면 졸지에 밥줄이 끊길 이들이 그만큼이나 많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2014년 기준 국내 사교육비 시장을 23조5천억원 규모로 추정했다. 이는 서울시의 2014년 총예산 24조5천억 원에 육박하는 액수다. 정말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 온다면, 그래서 2014년 기준 학생 1인당 명목 월사교육비 24만2천원(통계청 집계)(혹은 사교육에 참여한 학생들로 범위를 좁혔을 때 중학생 1인당 월평균 39만1천원, 고등학생 46만5천원)을 다른 용도로 쓸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 번이라도 더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여행을 가거나 고통 받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교육 예찬론을 펼칠 때마다 정작 한국의 네티즌들이 냉소적인 댓글 달기를 주저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신세계는 영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지금 이 나라에서 학력 인플레는 이미 하늘을 꿰뚫었다. 대학 진학률이 70퍼센트를 넘었다. 고졸자가 할 수 있을 일에 대졸자나 석사학위자가 몰리고 대졸자나 석사학위자가 할 수 있을 일에 박사학위자가 몰린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한 자리 잡기가 그토록 어려우니 대한민국 청춘들에게 유일한 정언명령은 스펙 쌓기뿐이다. 당연히, 노동시장에서 팔리는 인력이 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여타 경험의 가능성은 모두 기각된다. 서글프다. 그들(우리)에게 허용되는 경험이 ‘경험의 빈곤’의 경험일 뿐이라니. 그래서일 것이다. 요즘 대학에서는 입후보자가 아무도 없어 총학생회나 단과대 학생회 선거가 무산되었다는 공고가 심심찮게 나붙는다. 군사정권 아래서 해체되었던 총학생회를 재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배 대학생들이 투쟁하고 헌신했던가. 그런데 역사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물론 사태가 이리 된 것을 ‘요즘 젊은이들’ 탓으로만 떠넘길 수는 없다. 그러나 청춘의 열정이 오직 자신의 교환가치를 섬세하게 따지고 드높이는 일로만 소비되고 있다는 진단은, 그리고 앞으로도 더더욱 그러하리라는 예감은 뼈아프다. 내가 ‘예술가’라고 두둔해주곤 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학생들은 대학 안에서 점점 더 희소해지고 있다.
한 명의 선생으로서 나 역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가상하다. 그들의 물샐틈없는 필기 솜씨는 신출귀몰할 지경이다. 지난 학기에는 강의를 녹음했다는 학생도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0.1점 차이에도 A학점과 B학점이 갈리는 상대평가의 잔혹함에 맞서는 최선의 조치였으리라. 그렇다. 대한민국의 대학에서는 상대평가를 실시한다. 온라인 성적입력 시스템은 선생의 판단과 재량 따위 아랑곳없다. 수강생 전원이 똑같이 성실했더라도 A는 정확히 35%의 학생들에게만! 그러니 동료들은 성취의 협조자가 아니라 궁극의 경쟁자다. 왜 학생들은 이런 시스템을 묵묵히 받아들일까? 왜 선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신탁인양 받아 적고 있을까? 왜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주장하는 용자(勇者)를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려울까? 내가 인생에서 나의 선생들에게 한 번도 주지 않았던 전폭적 추종을 이제 선생이 되어 학생들로부터 받는 일이 나는 왜 황홀하기는커녕 답답할까?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는 건 고3들일 거다.” 내가 고3이던 어느 날 한 선생님께 들은 말씀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학위가 하나둘 더 생길수록 나는 이 단언을 떠올리곤 했다. 맞는 얘기였다. 나는 지금 한반도 역사와 세계사의 시시콜콜한 사실들은 물론이고 수학과 화학, 물리학의 온갖 법칙들과 문제풀이 방식들도, 제2외국어의 단어와 문법도 다 잊었다. 그렇다면 오직 먼지처럼 흩어져버릴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만 초등학생 6년, 중고등학생 6년 동안 그토록 꾸역꾸역 외우고 또 외웠단 말인가. 결과의 관점에서 보면 참 억울하고 허망한 일이다. 그러나 경험의 관점에서 보면, 혹은 즐김(enjoyment)의 관점에서 보면, 그 모두는 결코 무용하거나 무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우리에게 허용되는 경험이란 ‘경험의 빈곤'
벤야민이 인용하는 프루스트의 편지는 우리의 경험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존경하는 부인, 방금 저는 어제 귀댁에 깜빡 잊고 제 지팡이를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디 그 지팡이를 이 편지를 전하는 사람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추신: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그 지팡이를 찾았습니다.” 이런 편지를 쓰고 보내는 일은 전혀 쓸데없지 않다. “그 많은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벤야민이 생각했던 “경험의 정수”였다. 하지만 오늘날 ‘도구적 이성’은 마치 영화 <픽셀>의 거대 팩맨처럼 정체와 지연과 우회와 일탈과 도약과 비상을 경험할 가능성을 모두 먹어치우고 있다. 그러니 주어진 루트만을 달리다가는 고스트 역시 결국 팩맨의 먹이가 되고야 말 터이다. 결정적인 순간, 날 수 있어야 한다. 미분적 경험과 적분적 경험을 통약할 수 있어야 한다. 늘 한국교육의 맹점이라 일컬어지는 ‘창의성’이란 바로 그런 통약의 역량과 상통하는 개념이 아니겠는가.
아침부터 밤까지 사교육 시장의 불이 꺼지지 않는 것, 너무 많은 고등학생들이 떠밀리듯 대학에 진학해 청춘을 소모하며 취업(혹은 실업)형 인간으로 틀지어지는 것,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의 공부가 선생들의 공부의 판박이가 되는 것, 이 모든 현상들은 다 한국사회의 오랜 증상들이다. 환부는 점차 커져가고 난치병은 거의 불치병의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물론 이는 대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라는 전쟁터에서 한국인들은 어쩌면 모두가 고3이고 대학교 3학년(사망년)이다. 눈을 더 크게 떠보면 이것이 비단 한국사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이제 지구상에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닿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
사실 한국인의 교육열은 달리 보면 “한국사회의 역동성의 근원”인 “평등주의 에토스”의 소산이다. 김종엽에 따르면, 식민지 해방, 농지개혁,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이 뒤흔들린 상황에서 평등주의 에토스는 한편으로는 민주화 프로젝트로, 다른 한편으로는 지위 상승의 열망을 담은 성장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한국현대사에서 적어도 정치적 정당성과 경제적 수행성은 한국인들의 집단적 욕망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는 두 축이 되었다. 익히 아는 증거 하나. 참여정부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민주적이었음을 인정받았으면서도 이른바 CEO 출신 대통령에게 바통을 넘겨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 경제적 수행성에 대한 보수언론의 지속적인 공격이 다수 국민을 견인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1987년 6월 항쟁의 (부분적) 성공이 기초가 된 ‘87년 체제’와 IMF 외환위기가 계기가 된 ‘97년 체제’를 겪으면서 정치적 정당성과 경제적 수행성 간의 균형이 깨졌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욕망의 무게중심은 경제적 수행성 쪽으로 확연히 옮겨갔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 아래에서 한국 대중들의 평등주의 에토스는 민주화 프로젝트라는 집단적 승화의 방식보다는 지위 상승 프로젝트라는 개인주의적 성공 논리의 추구로 환원되고 말았다. 한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게 해주었던 교육열은 극심한 사교육 경쟁으로 변질하여 절대로 개천에서는 용이 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이제 과잉교육은 과잉학벌과 과잉노동(혹은 과잉실업)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다.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그렇게 열심히 지식을 쌓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경험인가?
앎은 힘이다. 근대 초기에 앎의 힘은 신적 질서에 맞서는 인간 주체의 무기가 되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선견은 절반만 맞았다. 일찍이 미셸 푸코가 앎은 근대 규율권력이 작동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지적했듯이, 신의 죽음이 선포된 세계에서 앎은 또 다른 지배의 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이렇듯 지식이 지배의 알리바이가 되는 세계를 자크 라캉은 대학 담화(discourse)의 구조로 설명한다. 라캉에게 ‘담화’란 “언어 위에 정초된 사회적 관계”를 의미한다. 대학 담화는 라캉이 60년대 말에 제출했던 네 가지 담화 이론에 나오는 담화 구조의 하나다. 그는 근대 이후의 상호주관적 관계를 주인(Master) 담화, 대학 담화, 히스테리 담화, 분석가 담화로 구분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근대성의 헤게모니적 담화가 주인 담화에서 대학 담화로 바뀌었다는 데 있다.
주인 담화가 전혁명적 구체제(혹은 독재체제)의 지배 형식이라면 대학 담화는 후혁명적 새 주인, 즉 과학적 담화로써 지배관계를 합법화하는 지배 형식이다. 주인 담화의 주인은 ‘나는 내가 말하는 바다’라는 선언만으로도 어떤 다른 이유 없이 권위(권력)를 인정받을 수 있다. 반면 대학 담화에서 권력을 갖는 것은 바로 지식이며, 따라서 대학 담화의 시대에는 “지식의 새로운 전제(專制)”가 이루어진다. 지식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가정되고 바로 이 중립성을 근거로 지식은 초자아의 무조건적 명령과 연결되어 지식-권력화한다. 따라서 대학 담화의 시대에 나타나는 새 주인, 즉 자신을 다만 지식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이자 집행자로만 간주하는 지식-권력의 작인(agent)은 전문지식을 통해, 즉 교육과 면허를 확보함으로써 주인의 자리를 벌어야 한다. 대학 담화 시대의 주인, 즉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부모, 보모, 교사 등)가 자신을 기꺼이 주인이 아니라 하인의 위치에 놓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대학 담화는 교육 현장에서 전형적으로 구현되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보면 현재 우리가 자본주의-민주주의의 결합으로서 경험하고 있는 체제가 정확히 대학 담화의 지배 형식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학 담화 시대의 새로운 주인을 혹여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정치적 지도자의 위치로 치환해서는 안 된다. 주인 담화에서 대학 담화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주인의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것은 관료들의 전문지식에 힘입어 운영되는 국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학 담화는 여러 면에서 기만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식이 결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우선 경제적 차원에서 보자. 근대의 지배계급은 자본가 계급이며 따라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지식을 (소용)없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효과적인 착취를 수행한다. 정치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 담화 시대의 주인은 권력에 기초한 정치적 결정인 것을 마치 상황에 대한 중립적 통찰에 입각한 선택인 것처럼 제시한다. 지식은 행위 자체, 사건 자체를 참조하기보다는 그러한 행위와 사건이 초래한 결과들을 정상적인 사태로서 설명할 수 있게 해줄 도구로서만 기능한다. 그러나 사랑이 발생한 사건을 호르몬 변화라는 의학적 지표로 환원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의 고유한 존재를 그녀의 정밀한 유전자 지도로 환원할 수 있는가? 재료와 조리법이 같기만 하다면 누가 요리하든 동일한 맛이 나는가? 대학 담화에서 지식(과학)의 절대적 위상은 이러한 질문에 망설임 없이 ‘예스’라 답함으로써 확보된다. 설명할 수 없는 X의 존재는 애초부터 아예 없었던 것처럼 봉합되어버린다. 이것이 대학 담화가 기만적인 두 번째 이유다.
그러나 X는 끝내 무(無)로서라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 <루시>에서 자기 뇌의 100%를 쓰게 된, 드디어 우주만물의 진리를 알게 된 루시가 육체 없는 존재, 그럼으로써 오히려 “모든 곳에 있는” 존재가 된 것과도 같다. 그러니 대학 담화의 봉합은 결코 매끄러울 수가 없다. 지식은 아직 사회적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 피교육자를 동화시켜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를 재생산하는 주체로서 확립하고자 하지만 정작 산출되는 결과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지식과 실재 사이에서 분열된 주체다.
 
글: 김소연
중앙대에서 영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서강대 영상대학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실재의 죽음>, <환상의 지도>, <라캉과 한국영화>, <라캉과 지젝> 등이, 번역서로는 <삐딱하게 보기>, <영화에 관한 질문들>, <진짜 눈물의 공포> 등이 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분석한 저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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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l 영화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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