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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작아지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작아지게 하는가
  • 이정신
  • 승인 2016.03.0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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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비상경보기>
▲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당당한 자세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고도(Godot)’가 바로 자신이라는 걸 끝내 모르고 죽을 것이다.
 
2012년 12월,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대표가 당선된 직후, 한 젊은이가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한진중공업에 다니던 젊은이였다. 사측에서 그가 몸담고 있던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걸었고, 노조원 대부분은 사측과 가까운 노조로 적을 옮겼다. 그는 계속해서 원래의 노조를 지키고 있었다. 친(親)재벌적 정권이 다시 이어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 앞에서 그는 목숨을 던졌다.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명이 목숨을 끊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조직부장을 지냈던 사람이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가 무자비한 폭력 진압을 당한 충격과, 앞서 한진중공업 젊은이의 죽음이 또 한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이어서 또 한 명이 목숨을 끊었다. 시민운동에 열심이었던 사람이었다.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 앞에서 벌어진 도미노 같은 죽음들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배가 가라앉았다. 세월호다. 295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직도 9명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배가 침몰하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가 됐지만, 그 누구도 그들을 구조하지 않는 모습을 전 국민이 지켜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황망하기 그지없는 죽음들이었다.
그리고 1년 뒤, 한 농민이 사경을 헤매는 상황이 일어났다. “쌀값이 너무 내려가, 우리 농민들 못 살겠다”고 외치던 한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을 세운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밀양에서는 일흔이 넘은 한 노인이 평생 살아온 터전에 송전탑이 박히는 것에 반대하다 목숨을 끊었고, 또 다른 노인이 같은 이유로 목숨을 내놓았다.
 
무언가 말하려면,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시절이다. 크레인에 올라가고, 옥상에 올라가고 굴뚝으로 올라서 수백 일을 지내고 천막을 치고 수백 일을 버틴다. 1987년을 기준으로 잡아도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세워진 지 30년이다. 정말로 이곳에 민주주의가 뿌리박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철학자 강신주가 써낸 <비상경보기>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는 참 ‘치사한’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치사하다는 것! 압도적인 외적 환경이나 권력자 앞에서 생존을 확보하기 위해 치욕을 참을 수밖에 없을 때 쓰는 말이다.” 거대한 권력과 자본을 가진 기득권자들의 치사한 모습, 부정의가 판치는 꼴을 목격해야만 하는 치사한 시절인 것이다. 치사하지 않기 위해 기득권 세력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만, 집회나 시위 현장에선 경찰차가 어김없이 차벽을 세운다. 헌법에도 보장된 권리를 도로교통법과 집시법을 운운하며 제한하려 든다. 애국심을 증명해야만 공무원이 될 수 있다고 하질 않나, 이제는 테러방지법을 운운하며 비판적인 시민들을 모두 잡아들일 태세다. 저자는 계속 묻는다. 이곳이 정말 민주주의 사회냐고. 그리고 계속 시끄럽게 경보한다. 점점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는 심각한 위기의 시절이라고, 자본의 맹위와 전체주의의 냄새가 짙게 나고 있다고, 점점 말하는 입을 가진 우리들이 작아지고 있다고.    

비상경보기를 켠 인문학자의 경고
 
<비상경보기>는 그 제목처럼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문학자가 지금 여기에 울리는 경보들을 글로 담아 모은 책이다.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울리는 경보는 바로 인간이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하는 반인문주의, 반민주주의에 대한 경보다. 그리고 불안과 염려 속에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곳, 즉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에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자본과 전체주의의 기운에 대한 경보다. 
반인문주의과 반민주주의에 대한 경고와 이에 대한 극복이라는 주제는 저자가 전작들에서도 갈파해왔던 핵심적인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20세기 한국의 시인 김수영을 허용된 자유가 아닌 억압과 지배에 저항하는 자유를 외치는 혁명적 인문정신으로 읽어낸 것도(<김수영을 위하여>),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에티카>와 문학을 통해 욕망과 감정을 숨죽이게 하는 지금의 억압 체제에 대한 비판적 태도 속에서 감정을 주요한 주제로 읽어냈던 것도(<강신주의 감정수업>), 13세기 중국의 선불교 텍스트 <무문관>을 통해 개인 모두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을 때 찾아오는 불교의 화엄 세계에서 모두가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개념을 이어 버리는 것도(<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모두 저자가 지닌 민주주의에 대한 감각과 인문학에 대한 입장을 드러낸다. 다만 이번 책은 가장 직접적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혹은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오롯이 우리 모두가 권위와 억압을 딛고 바로 서서 목소리를 내는 것, 누군가가 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대변하는 것으로서의 원칙적 민주주의를 강조한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고도’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인문 정신의 강조다. “보호를 필요로 하는 나약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아가 아니라 스스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어른이 돼야 한다. (…) 누가 감히 나를 보호하려고 하는가? 누가 감히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가? 내가 나 자신을 보호할 것이고,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할 것이다. 이런 당당한 자세가 없다면, 우리는 자신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고도(Godot)’가 바로 자신이라는 걸 끝내 모르고 죽을 것이다. ‘고도’가 바깥에 있지 않은 것처럼, 구원자도 외부에서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도래해서는 안 된다. 벤야민이 절규했던 것처럼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메시아가 되는 날, 바로 이 순간 파시즘의 어둠은 가시고 민주주의의 여명이 제대로 열리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이 바로 현재라는 시제다. 자꾸만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조장하는 자본과 권위주의적 체제의 ‘미래완료 시제’는 지금의 시간을 향유하지 못하게 하고, 내일을 준비하느라 오늘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 하물며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도 신경을 쓸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염려는 누군가 함께 있으면서도 그와 공감하고 유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항상 억압 체제는 다수의 사람들을 깨알처럼 분리시키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 자신의 미래만을 신경 쓰면 쓸수록 우리에게는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은 그만큼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 결국 현재는 타자와의 공감과 연대가 가능해지는 시제라는 점이 중요하다.”
강신주가 쓴 책의 저자 소개문에는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라는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혹자들은 “오글거린다”고 하고, ‘감성적 인문팔이’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저자가 가장 자주 강조하는 단어이기도 하고, 그가 말하는 자유란 “억압적인 외부의 환경-이것은 가족이든 직장이든 체제든 어디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에서의 자유를, 사랑이란 타자일 수밖에 없는 많은 이웃들의 삶을 힘들어도 끈덕지게 마주하고 손을 내밀자는 연대”로 이해된다. 결국 모든 이가 주인이 되는 것, 그리고 그들이 함께하는 원칙으로서의 민주주의인 셈이다.  

다시, 민주주의를 향하여
 
그는 이 책에서 보다 구체적인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직접민주주의의 정신, 그리고 현실적 제도로서의 간접민주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는 지점이다. 책 전반에서 저자가 분명히 선을 긋는 지점은 많은 이들이 주지하고 있듯, 절차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효율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제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간신히 가능한 제도”이며 직접민주주의의 정신이 없는 간접민주주의라는 형식은 민주주의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간접민주주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50보와 100보는 같지 않으며, “모 아니면 도”도 아니라고 한다.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는 이야기도 아니라고 한다. 차선 역시 우리의 관념 속에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정에 있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 이념에 100보 물러서 있는 후보와 50보 물러서 있는 후보를 같다고 보면 안 된다. 대표자를 뽑는 일체의 선거는 신념과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삶의 문제다. 민주주의 이념에서 50보 물어나 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오히려 당장 개선할 수 있는 문제를 두고, 이상만을 읊조리는 이는 정치적 무기력만을 유포하기에 더 해로울 수 있다고도 한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간접민주주의, 그러니까 선거라는 형식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선거만이, 투표만이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투표는 우리를 대표하는 누군가를 뽑는, 현실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표자와 대표되는 자들의 거리를 좁히는 일, 그러니까 한 걸음 더 직접민주주의의 정신에 다가갈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누가 대표자가 되든, 대표자가 우리를 대의하지 못한다면 끌어내려야 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투표로 탄생한 왕”에 불과함이 자명할 테니. 대표자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독재의 시대에 사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사실 이 책을 읽다 보면 사실 민주주의는 귀찮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치지 않고 이 비상경보기는 민주주의의 주체는 우리를 대의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여야 한다고 시끄럽게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선거기간에 투표 한 번으로  주인 노릇을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한가. 하지만 이 주인 노릇이 썩 녹록치가 않다. 거리와 인터넷에 대표되지 않은 자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대표자가 우리의 눈치를 보게 하려면 그들을 늘 지켜보고 압박하고 비판을 해야 하는 게 좀 귀찮은 일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능한 한 더 많은 목소리가 들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자체로 존중받으며 행복하려면 민주주의에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니. 누가 이번 총선에서 대표자가 돼야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누가 대표자가 되든 그 다음 매일매일의 정치를 감당할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글·이정신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실은 음식 만드는 일을 더 좋아하고 음식 먹는 일은 더더욱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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