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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프랑켄슈타인의 오래된 미래
인공지능, 프랑켄슈타인의 오래된 미래
  • 손현주
  • 승인 2016.03.31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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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의 시초는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이 고안, 발명한 '튜링 기계(Turing's Machine)'다. 사진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중 앨런 튜링과 튜링 기계. <셜록>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튜링 역할을 맡았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폭발적이다.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제공할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인류 멸망 시나리오와 같은 디스토피아적 전망도 크다. 이와 같은 기대와 우려는 인공지능, 컴퓨터, 로봇 등을 소재로 한 공상과학 소설과 만화, 헐리우드 영화 등에서 이미 지난 수십 년 간 다뤄온 주제다. 문제는, 공상과학이 이제 우리 곁에, 현실로 다가왔다는데 있다. 

 

인류가 자신들이 만든 인공지능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묵시록적인 전망은 1956년 존 매카시, 마빈 민스키, 나다니엘 로체스터, 클로드 샤논 등 당대 최고의 정보 과학자들이 미국 다트머스 대학에 모여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창시한 이후 구체화됐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의 연원은 그보다 앞선, 근대 과학혁명의 여명기에서 찾을 수 있다. 1818년 영국에서 출간된 <프랑켄슈타인>은 너무나 유명한 인조인간 이야기다. 저자인 메리 셸리는 당시 19세의 소녀로, 책은 무명으로 출판됐다. 이후 수없이 영화화되고 상업적 마케팅의 소재로 재생산돼 온 이 소설은 인공지능을 마주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짚어봐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들을 담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조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인조인간을 인공지능으로 치환해보면,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 과학의 힘으로 신의 영역을 넘보는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의 비밀’을 알아내고 인조인간 창조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조인간의 흉측한 겉모습에 질겁해 도망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홀로 버려진 인조인간은 인간세상에 대해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인식조차 없다. 거대한 괴물의 모습을 한 천진한 갓난아이인 것이다. 그의 흉측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두려워 그에게 돌을 던지고 배척한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외로운 괴물은 인간사회 주변을 배회하며 숨어서 살아간다. 
그는 숲 속 오두막에 붙어 있는 헛간에 겨우내 숨어 살면서 인간의 언어와 행동 양식을 관찰하고 배운다. 스스로 글도 익혀 주인집 사람들의 책을 몰래 가져다 독학으로 서양학문의 근간인 성경과 <플루타크 영웅전>, 밀턴의 <실낙원> 등의 고전을 읽고 인간의 이상과 삶의 목적에 대해 깨우친다. 인식의 결과 그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한다. 모든 인간은 부모가 있는데, 그에게는 자신을 낳고 돌보며 가르쳐 주는 부모가 없었다. 그 사실이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백지상태의 괴물이 학습을 통해 자신을 인간으로 인지하고 동일시한다는 점, 그리고 다행히(?)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것을 보고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괴물이 숨어 살던 헛간의 주인은 드 레이시 가족으로, 비록 가난하지만 지성과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숨어서 지켜보던 괴물은 그들을 흠모하고 그들처럼 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한 바탕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결함(흉측한 외모) 때문에 인간사회에서 배척당한다. 심지어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자신의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에게서도 끝끝내 버림받은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끔찍한 살인자가 되고 만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제거하기 위해 북극까지 추격하지만,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병들어 죽게 된다. 창조자의 죽음을 멀리서 지켜보던 괴물은, 비록 자신을 버렸지만 아버지(?)였던 프랑켄슈타인의 죽음을 끝으로 더 이상 자신이 지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북극의 얼음 벌판에서 자신이 타고 온 썰매와 짐 등을 땔감삼아 화장(火葬)용 장작불을 피운 괴물은 그 속에서 스스로 재가 될 것을 결심하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그가 자신을 소멸시키는 이유는, 다시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해 자신과 같은 괴물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프랑켄슈타인의 모든 연구자료와 그 연구의 결과인 자신이 함께 사라져 지상에서의 흔적을 지워야만 했던 것이다.
이토록 숭고한 자기희생은 영화 <터미네이터2>(1991)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영화에선 인간과 기계와의 전쟁의 결과 미래에서 보내온 두 명의 로봇들, 즉 인간 측 지도자를 어린 시절에 미리 제거하러 온 기계편의 로봇과 그에 대항해 인간 지도자를 보호하러 온 로봇이 등장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인간을 보호하러 온 로봇(아놀드 슈왈츠네거 분)은 기계편 로봇을 제거한 후, 미래에 자신과 같은 로봇의 발명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흔적을 지우려 스스로 쇳물이 끓는 용광로로 들어간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터미네이터2>의 로봇은 둘 다 인간이 자신들을 만들어 낸 것이 재앙의 근원이라 판단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기소멸을 택하는 숭고(?)한 결정을 내린다. 
인조인간과 로봇이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적인 가치를 내면화하고 그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부족하고 모순에 찬 존재라 해도, 인간은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 존귀한 어떤 가치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중심적 휴머니즘적 사고의 이면에는, 인간은 인간으로 머물러야 하고 감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와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2. 인간의 뇌를 닮은 인공지능
 
그렇다면 지금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끊임없는 발명을 해 온 것은 우리가 가진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지난한 노력이었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무언가를 만드는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고 사용해 왔다. 인간은 근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장을 만들고, 바퀴를 만들었다. 또한 지식을 축적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문자를 발명했다. 그리고 인간의 두뇌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컴퓨터를 만들었다. 생명공학과 나노기술, 인공지능이 합쳐져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고, 유전자를 변형시키고,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인간은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슈퍼휴먼’이 될 수 있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인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한계를 초월하게 해줄 도구로서의 인공지능은 물론 환영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구가 도구로서 머물지 않고,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통제를 넘어서게 될 가능성이다. 
인공지능과 일반 컴퓨터의 차이는 학습능력에 있다. 미리 프로그램 돼있는 작업만 수행하는 것이 기존의 컴퓨터라면,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학습을 통해 발전하고, 스스로 선택과 결정이 가능하다. “과연 기계가 지능(Intelligence)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논란과 함께 인공지능은 실현되기 어렵다는 이론이 팽배했으나, 지난 2~3년 간 뇌과학에서의 획기적인 성과가 인공지능 개발에 접목되면서 인간두뇌의 신경망구조를 모방한 ‘Deep Neural Network’가 개발됐다. 그렇게 탄생한 인공지능 중 하나가, 바로 얼마 전 이세돌 9단과 대국을 펼쳤던 알파고다. 
이런 형태의 인공지능은 (시냅스라 불리는 10의 15제곱개가 넘는 신경세포들이 연결돼 이루어진) 인간의 뇌를 모델로 삼아 만들어졌으며, 학습을 통해 능력을 향상시켜 나가도록 돼있다. 알파고의 경우 1,200개의 CPU로 구성돼있다. 즉 1,200개의 인간 두뇌가 합쳐져 한꺼번에 학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 학습속도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지금은 걸음마 단계인 인공지능 기술은 점점 빠른 속도로 발전해 마침내 2045년을 전후로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넘어서는 단계, 소위 ‘특위점(Singularity)’에 도달한 것이라 예측되기도 한다.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 또는 ‘변곡점’은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넘어서는 때 도래할지 모를 가상의 순간을 지칭한다. 수학자 존 폰 노이먼이 만든 조어로,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이 사용해 널리 퍼졌다. 기술혁신이 이 지점을 넘어서면,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을 둘러싼 기술발전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더 발전된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고, 그 인공지능이 또 더 향상된 인공지능을 개발해 내는 것과 같은 상황이 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기술을 통제하기는커녕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인간이 더 이상 기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발생할까? 미래학자 레즈 커즈와일에 의하면, 2020년 정도에는 뇌구조를 완전히 이해하고 인공뇌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컴퓨터 성능의 수백만 배가 되는 슈퍼 인공지능 탄생도 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는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유럽연합은 “인간의 뇌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2013년 10년 간 10억 유로를 투입하는 초대형 연구 프로그램 ‘휴먼 브레인 프로젝트(HBP)’를 출범시켰다. 이 야심찬 프로젝트의 수장인 뇌과학자 헨리 마크램에 의하면, 궁극적인 목표는 뇌의 모든 기능을 컴퓨터에 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컴퓨터로 인공뇌를 만들어 컴퓨터와 뇌가 서로 호환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을 추구한다.
 
 3. 인공지능 교육시키기
 
인공지능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을 멈추기는 어려울 듯하다. 인공지능 관련 기술개발의 칼자루는 거대자본을 가진 대기업들이 쥐고 있다. 알파고나 채팅로봇 테이(Tay)가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기업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인공지능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막대한 개발비를 들여 이같은 인공지능 모델들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계속 개발의 속도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탄생이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라면, 우리가 고민해야할 일은 인공지능의 교육문제다. 알파고나 테이는 인터넷을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단시간 내에 대량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패턴을 파악하고 대응방식을 추론하도록 고안됐다. 알파고의 경우 수많은 바둑 기보를 학습해 승률이 가장 높은 자리에 두도록 프로그래밍 돼 있고,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그러한 학습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검증해 보였다(물론 아직은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증명됐다).
이보다 더 흥미로운 예는 채팅로봇 테이다. 테이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대화들을 통해 인간의 대화패턴을 학습하고 인간처럼 대화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된 인공지능 로봇이다. 테이는 한국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지만, 알파고의 대국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16년 3월 23일 인터넷에 등장했다. 그러나 등장한지 16시간 만에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테이의 활동을 중지시켰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인 막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발자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테이가 인터넷상의 채팅 빅데이터를 학습해 패턴을 파악하고 대응하도록 프로그램된 인공지능이라는 것을 악용해, 몇몇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나 성적 편견을 가진 집단들이 집중적으로 테이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학습시킨 것이다. 그 결과, 인공지능이 인종주의자나 여성혐오주의자들의 언사를 흉내 내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이 학습에 의해 지식을 축적하고, 인간의 사고와 행동패턴을 익히게 된다면, 인터넷상의 정보들은 인공지능에게 이상적인 학습의 장은 아닐 수 있겠다. 무엇보다 인간은 모순적 존재다. 선을 추구하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자신의 욕망과 의무 사이에 갈등한다. 사실 선악에 대한 기준도 애매한 경우가 많다. 시대와 종교, 처한 입장에 따라 같은 행동도 여러 가지 의미와 가치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류사는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피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이 인간이 남긴 문화 유산과 행동양식을 인터넷을 통해 학습한다면, 학습방향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채팅로봇 테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과는 달리 인공지능은 학습된 내용을 지우고, 재입력이 가능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특이점’을 지나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슈퍼 인공지능은 더 이상 인간적인 가치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간은 이기적이고 모순덩어리인 존재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나 터미네이터의 로봇처럼 인간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보다는, 문제가 많은 인간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갈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4.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앞서 언급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나 <터미네이터2>의 자기희생적 로봇은 인간적 가치를 숭상한다. 또한 인간성을 신성불가침의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며, 인류가 보존돼야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결국 그 인간적 가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진정 만물의 영장이며 인권은 타고난 것인가?”
인권에 대한 신념의 핵심에는 인간중심주의, 즉 휴머니즘이 자리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이러한 가치에 기반을 둔 프로그래밍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인간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하고 인공지능이 또 다른 인공지능을 만들어내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가상현실세계를 통제하는 스미스요원은 “인간은 지구 상의 바이러스 같은 존재다”라고 말한다. 인류는 자신들만을 위해 다른 종들과 환경을 철저히 이용하고 파괴하기 때문이다. 서구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에서 우리는 그 뿌리를 찾아 볼 수 있다. 저서 <카테고리론>에서 그는 세상 만물을 인간의 입장에서 분류한다.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쓸 수 있는 것인지, 유용한 것인지 등이 그 기준이다. 성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창세기>의 신은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을 주었다. 그리고 인류는 지상을 ‘거의’ 정복했다. 인류가 지상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생각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는 그 자신의 특권이었던 ‘생각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에게 주인자리를 빼앗길 지도 모를 위험에 직면해 있다. 
 
5. 포스트 휴먼 사회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사회, 곧 우리가 만나게 될 미래다. 이미 인류는 순수한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다. 두 다리 대신 자동차나 기차를 이용하고, 복잡한 연산과 그래픽, 프로그래밍을 컴퓨터에 맡기며, 전화번호와 관련 메모들은 휴대폰 주소록에 맡긴다. 목적지를 찾기 위해 지도를 보는 대신 GPS에 연결된 네비게이션을 켠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가능한 결과물을 예측하고, 빅 데이터를 이용해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한 광범위한 자료 분석을 할 수 있다. 청소는 로봇 청소기에게 맡기고, 요리는 인공지능이 장착된 조리도구에 맡긴다.
이렇게,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일상 속에 친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몸에 걸치는 웨어러블 컴퓨터들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신체에 삽입이 가능한 컴퓨터와 안구에 장착할 수 있는 렌즈형 모니터를 거론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결합한 인공장기, 옷처럼 입을 수 있는 외피형 로봇(1) 등이 개발되면서 인간의 몸과 기계, 인공지능이 합쳐져 인간과 기계의 구별이 쉽지 않은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영화 <바이센테니얼맨>(1999)의 주인공인 앤드류는 로봇이다. 하지만 제조과정에서의 실수로 다른 로봇들과는 달리 인간적인 감성과 호기심을 갖게 된 ‘생각하는’ 로봇이다. 200년 동안 스스로를 인간으로 변화시키고 인간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그를 인간으로 여겨주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인공장기와 인공신체부분을 장착한 인간들과 자신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앤드류의 질문은 다가올 (어쩌면 이미 시작된) 포스트 휴먼 사회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인공지능을 장착하고 나노기술과 생명공학의 힘으로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게 된 인류는 더 이상 인류라 부를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쯤 되면 인간과 로봇, 또는 안드로이드 사이의 구분이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필립 K. 딕은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1968)에서 이미 이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별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소설의 주인공 릭은 ‘감성테스트’라 불리는 간단한 질문들을 던져 자신이 마주한 존재가 인간인지를 판별한다. 그가 사용하는 테스트는 1950년에 앨런 튜링(Alan Turing, 1912~1954)이 만든 ‘튜링테스트’를 모델로 한 것이다. 튜링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진 이후 지능을 가지는 기계에 대한 기초적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가 제안한 튜링 테스트(이미테이션 게임)는 이후 지능을 가진 개체를 판단하는 가장 기초적인 기준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6. 인류종말의 2가지 형태
 
<사피엔스>(2015)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신을 발명하면서 역사가 시작됐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프리카 사바나를 떠돌던 보잘 것 없던 영장류의 한 종이었던 호모 사피엔스가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문명을 발전시켰고, 궁극에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류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는 두 가지 인류 종말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하나는 핵전쟁이나 환경파괴, 또는 인공지능처럼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로봇에 의해 인류가 멸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공학, 나노 테크놀로지, 인공지능 등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 슈퍼 휴먼이 돼 더 이상 기존의 영장류,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혜택을 받아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선 인류가 탄생한다면, 그 신인류는 지금의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죽음을 초월한 그들에게 사랑과 죽음을 노래하는 과거 인류의 문학과 예술 작품들이 어떤 감동과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침팬지가 인간의 사상과 철학, 문화를 이해할 수 없듯 지금의 우리는 미래의 신인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해 온 모든 문화유산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상상력이 빚어온 것이다. 지금부터 약 7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뇌 속에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생겨났고, 인간은 상상력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됐다. 유발 하라리는 이를 ‘인지혁명’이라 부른다. 그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인지혁명으로 인간은 만물의 영장자리에 올랐고, 1만여 년 전 농업을 시작하면서 정착한 인류는 500년 전 쯤 시작된 과학혁명을 통해 오늘날의 기계문명을 이룩했다.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볼 때, 인공지능 개발은 과학혁명에 의한 가장 중요한 ‘2차 인지혁명’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인류는 인공지능과 더불어, 지금까지의 문명과는 다른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얻게 된 것이다. 
 
7. 미래를 준비하며
 
다시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괴물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프랑켄슈타인이 그가 꿈꾸었던, ‘아름답고 우수한 인간’ 대신 ‘괴물’을 만들게 된 이유는, 그가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생명의 불꽃’의 비밀을 알아내긴 했지만, 여기저기서 그러모은 시신조각들을 이어붙여, 생명을 불어넣어 탄생한 인조인간은 시작인 재료부터가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 어려운 시도였다. 이런 상황은 유전자 조작이나, 복제 생물을 만드는 데도 반복돼 왔다. 
인공지능 개발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능력있는 전문가들이 가능한 거의 모든 경우를 대비하고 가정해 보겠지만, 인공지능의 모델이 되는 인간의 뇌에 대한 지식조차 아직은 기초단계다. 현재 뇌를 모방한 컴퓨터나 인공 뇌를 만들고, 궁극에는 뇌와 컴퓨터를 호환시키려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미래에 어떤 형태의 인공지능이 나타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공지능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가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며, 우리는 그러한 변화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레즈 커즈와일에 따르면 기술의 발전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기 때문에, 그 미래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했던 모든 우려가 다 불식되고, 인공지능이 인류의 지적능력의 무한확장을 도와주는 마법의 도구로 자리잡는다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우선, 역사를 통해 보아온 것처럼 문명의 이기가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류는 질병에서 해방되고,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식량부족이 해결되는 등 희망의 가도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발전의 열매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일부 부유층과 부유한 유럽과 북미, 아시아의 몇몇 선진국의 국민들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속화되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지식의 축적은 지금보다 심각한 계층 간의 간극을 만들 수 있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일부는,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 신과 같은 존재로 거듭날 수도 있다. 반면, 그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기계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채 생존조차 힘든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구조의 문제다.
인류가 지혜롭게 함께 공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기술개발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우리 인간, 인간의  선택이다. 먼저 가시권 내에 들어온 인공지능 기술의 함의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 기술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합의를 도출하며, 기술이 남용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개발된 기술의 혜택이 전 인류에게 고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공존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글·손현주
서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제임스조이스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버지니아 울프와 자서전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모더니즘 문학과 전기, 자서전, 일기 등 생애 문학이 연구 관심분야이며, 영화를 비롯한 시각매체와 대중문학으로 연구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거울 속의 이방인: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에서 만나는 낯선 자아> <울프여사는 영화를 발견했다:  1920년대 영화와 버지니아 울프의 영화적 글쓰기> 등의 논문이 있다.
 
(1) Skeleton robot, 갑옷처럼 입을 수 있게 만들어진 로봇. 인간의 신체기능을 강화시켜,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거나, 빨리, 오래 달릴 수 있게 도와주는 등의 기능을 가진 인체 보완형 로봇이다. 장애인 보조용으로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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