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파리의 정치적인 거리 이름들
파리의 정치적인 거리 이름들
  • 에릭 아장
  • 승인 2016.05.02 0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교권 개입 반대자와 드레퓌스 지지자들은 신성모독죄로 사형당한 장프랑수아 바르를 기리기 위해, 사크레쾨르 대성당 오르막길 로지에 거리를 '슈발리에들라바르(Chevalier de la Barre;바르의 수호자)'로 바꿨다.
 
파리의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생마르탱 운하에 가려면, 보르페르 거리나 레옹주오 거리를 거쳐야 한다. 니콜라 보르페르는 프랑스혁명 당시 멘에루아르도(道)에 주둔한 보병연대를 지휘했고, 1792년 9월 프러시아군에 포위된 메츠시의 수비대를 책임졌던 장교의 이름이다.

니콜라 보르페르는 메츠시의회가 항복을 결정하자,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프랑스의회는 그의 유해를 팡테옹에 이장해 안치했다. 한편, 레옹 주오는 1947년 반정부 대파업 때, 미국의 자금으로 프랑스에 국제노동기구(ILO) 지부를 창설했다. 그는 이 공로로 195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파란색 간판에 새겨진 파리의 거리 이름들은 주민 수와 시대정신, 명예와 불명예에 따라 지어진 것들이다.
 
물론,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다. 파리의 거리 이름들은 오랜 세월 동안 정치와는 무관했다. 라방디에르생트오포르튄, 지르쾨르, 샤키페시, 블랑망토 등 중세나 앙시엥 레짐(1) 때 생긴 동네에서 보던 시적인 이름들은 거리의 세부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었다. 이들 이름은 누구를 추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지명을 가리키는 것들이었다. 물론 루이 도팽이 루이 13세로 등극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왕실 가족들의 이름을 붙인 도핀 광장과 거리, 그리고 훌륭한 재상들을 기리기 위해 붙인 리슐리외, 콜베르, 마자렝 거리처럼 드물지만 예외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거리 이름들은 이들 유명인사들이 그곳에 세운 호텔과 연관이 있다.
 
루와 도레(Roi Doré, 루이 13세의 황금빛 흉상), 륀(Lune, 달), 콜옹브(Colombe, 흰 비둘기), 아르브르섹(Arbre-Sec, 마른 나무) 등처럼 종종 가문의 문장들이 거리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다. 또한 시몽르프랑, 오브리르부세, 베르텡푸아레 등처럼 현지 토호들의 이름을 딴 것들도 있다. 때로는 페론느리(금속), 베르르리(유리), 쿠텔르리(칼), 그랑드 트뤼앙드리(대규모 걸인 부락)처럼 직업을 상기시키는 거리 이름도 있고, 노냉디에레스와 오드리에트 수녀회, 생세브렝이나 생마르텡 사제회 등 생마르텡 대수도회, 즉, 현재 예술·공예 음악원으로 이어지는 길들처럼 성당이나 수도원 이름에서 유래한 것들도 있다. 
 
프랑스혁명은 거리 이름에서 성인을 상징하는 ‘생(Saint)’을 지워버렸고, 지나치게 앙시엥 레짐 분위기를 풍기는 거리 이름을 없앴다. 그래서 노트르담데빅투와르(승리의 노르트담) 거리는 빅투와르나쇼날(국민의 승리) 거리로, 호텔 이름을 딴 방돔 광장은 창을 상징하는 피크 광장으로, 왕실을 상징하는 루와얄 거리는 혁명을 상징하는 레볼뤼시옹 거리로, 부르주아를 상징하는 프랑부르주아 거리는 시민을 상징하는 프랑시투아엥 거리로 바뀌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때 임시로 쓴 지명들 중 위대한 순교자들의 이름을 딴 샤리에 광장(현 소르본 광장)과 마라 거리(현 에콜데메드신 거리)가 유일하게 남았다.
 
나폴레옹 제국주의 치하에서 처음으로 거리의 이름들이 광범위하게 체제 예찬을 위해 이용됐다. 로디, 카스티글리온, 마랑고, 리볼리, 오스테르리츠, 이에나 같은 승리한 전투 이름과 마랑고 전투에서 사망한 드제와 오스테르리츠 전투에서 사망한 부르동, 카스텍스, 모르랑, 발위베르처럼 전사한 영웅들의 이름이 지명으로 사용됐다. 나폴레옹 3세도 삼촌처럼 오스만이 새로 건설한 도로에 크리미아 전쟁터인 알마, 말라코프, 세바스토폴 등의 이름과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 치른 전쟁터인 마젠타, 솔페리노, 팔레스트로, 튀르비고 등의 이름을 붙여 두 전쟁의 승리를 체제 예찬에 이용했다.
 
제3공화정 초반, 오스만이 도로정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시내 중심가 도로뿐만 아니라 오퇴이에서 몽마르트까지 그리고 바티뇰에서 벨빌까지, 즉 파리와 수도권을 잇는 파리를 둘러싼 외곽도로들까지 완공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이 많이 필요했다. 도로에 붙일 이름 목록을 두고 교권 개입 반대파와 급진파 그리고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시의원들 간에 다툼이 생겼다. 그러자 센주 주지사(현 파리시장)였던 오스만은 내무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도로의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프랑스의 식민지 서사를 예찬하자는 일종의 합의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알제리(스말라 거리, 무자이아 거리, 콩스탕틴 거리 등)에서 베트남 통킹(송타이 거리)까지, 심지어 중국(팔리카오 거리)까지 예찬하는 식민지 서사 캠페인 속에서 수많은 장교들, 예를 들면 뷔조, 라모리시에르, 라미, 마르샹, 구로, 망젱, 페데르브 등이 진급해 장군이 됐다.
 
교권 개입 반대자와 드레퓌스 지지자들은 1766년 예배 행렬을 신성모독죄로 사형당한 장프랑수아 바르를 기리기 위해, 몽마르트 언덕에 건설 중이던 사크레쾨르 대성당 오르막길 로지에 거리를 ‘슈발리에들라바르(Chevalier de la Barre;바르의 수호자)'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외에도 1546년 무신론을 전파한 죄로 화형당한 인본주의 인쇄업자 에티엔 돌레의 이름을 메닐몽탕 성당으로 가는 작은 거리에 붙였다. 심지어 좌파 의원들은 일부 파리코뮌(2)의 주역들, 예를 들면 샤를 드레스클뤼즈, 외젠 바르랭, 쥘 발레스, 장 바티스트 클레망, 쥘 조프랭 등의 이름을 거리와 광장 이름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시의원들의 호기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었다. 프랑스혁명과 연관 있는 도로명을 지어야 했던 이들은 프랑스혁명 정치가 당통(1759년 10월 26일~1794년 4월 5일) 지지자들, 즉 당통을 포함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카미유 데물랭, 극작가 파브르 데그랑틴, 에로 드 세셀과 지롱드파 의원인 베르그니오, 페티옹, 콩도르세들을 선택해 추앙했다. 이들은 심지어 테르미도르 반동(프랑스혁명 기간 중 혁명력 제2년 테르미도르 9일째인 1794년 7월 27일에 시작된 반란. 이 반란으로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고 혁명의 열기와 공포정치가 막을 내렸다)에 연루된 캉봉, 카르노, 부와시 당글라 등도 추모했다. 하지만 마라, 로베스피에르, 바르레 혹은 바뵈프 등의 이름은 파리 시내가 아닌 구 파리 외곽벨트에 붙여졌다. 파리에 생쥐스트 거리가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오노레 드 발자크 고등학교 뒤편과 외곽도로 사이에 끼어 있어 찾기도 힘들고, 바티뇰 공동묘지 입구 벽을 따라 뻗어 있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다.
 
해방과 함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시의회는 주요 도로에 코랑탱 카리우와 코랑탱 셀통, 막스 도르무와 샤토브리앙에서 총살당한 장피에르 탱보, 1945년 알자스 전선에서 전사한 파비엥 중령, 초창기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끈 그룹 중 하나인 인간박물관(Musée de l’Homme) 소속의 레옹 모리스 노르드망 등 전사한 레지스탕들의 이름을 붙였다. 이런 도로명 목록에 폴란드 집단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다니엘 카사노바, 즉 여성도 한 명 끼어 있다. 더 나아가, 시의회는 1946년 자코뱅 수도원과 로베스피에르가 자주 사회자로 등장해 대중들에게 연설을 했던 유명 클럽 자리에 붙였던 로베스피에르 광장을 생토노레 시장 광장으로 개명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도로명은 겨우 4년밖에 버티지 못했다. 왜냐하면 1950년 우파가 시의회를 장악하며 파리 지도에서 싫어하는 이런 이름들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 주변에 새로 조성된 지역을 이례적으로 현대문학에 헌정했지만, 선택된 작가들의 이름을 보면 시의원들의 문학적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장 폴 사르트르, 장 주네, 사무엘 베케트, 미셸 푸코 등의 이름은 빠지고 프랑수아 모리악, 장 아누이, 조르주 뒤아멜 그리고 마그리트 뒤라스를 추앙하는 거리들이 생겼다. 
 
요즘은 이름을 붙여야 할 새로운 도로 건설이 거의 없어, 일반 네거리에 이름을 붙이고 있다. 예를 들면, 벨빌 네거리에는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와 폴란드 출신 프랑스 노동운동가 앙리 크라쉭키의 이름을, 생 제르맹 데 프레 네거리에는 제5공화정 총리 미셸 드브레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파리시의 수치로 여겨지는 도로명들을 제거한다면 금상첨화일 것 같다.
 
이를테면 파리 북역(Gare du Nord) 앞에 있는 나폴레옹 3세 광장이나 제3공화정의 원수(元首)·2대 대통령·얼간이 공증인이자 파리코뮌을 총칼로 진압한 마크 마옹의 이름을 기리는 대로명과 제 3공화정 1대 대통령을 지낸 아돌프 티에르를 기리는 도로명이 존재하는 한, 인종개량주의자로서 비시정부를 지지했던 엉터리 학자이자 191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알렉시스 카렐 거리가 파리에 생기지 말란 법도 없기 때문이다. 도로명에 이름을 올린 71명의 장군들 중, 파리 시민을 처형한 망나니들도 끼어있다. 이들의 이름은 묻혀져야 한다. 우리는 이들 망나니들의 이름 대신, 파리 지도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성녀와 수녀들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올릴 수도 있다. 우리들 자신이 원한다면 말이다. 거기에다 낭만적인 이름들, 가령 발자크의 작품 <인간희극> 속의 야심찬 주인공 뤼시엥 드 뤼방프레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샤를 스완의 이름도 추가했으면 좋겠다. 이들의 이름이 부르주아적·학술적인 낡은 예찬에 이용되고 있는 도로명들보다 훨씬 확실한 명분을 갖췄기 때문이다.  


글·에릭 아장 Eric Hazan
프랑스 작가이자 편집자

글·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 7대학 언어학 박사.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독해 등을 가르치고 있다. 
(1) Ancien regime;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정치·사회 체제
(2) Paris commune; 1871년 3월 18일~5월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민중들이 세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 정부

<참고서적>
이 기사 작성을 위해, 알프레드 피에로의 저서 <파리의 거리 이름에 대한 역사와 추억>(Parigramme, 1999년)과 자크 일레레의 저서 <파리의 거리 역사에 꼭 필요한 사전>(Editions de Minuit, 1961년)을 참고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에릭 아장
에릭 아장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