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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신철학’ 지지, 스타 향한 이종결합
푸코의 ‘신철학’ 지지, 스타 향한 이종결합
  • 마이클 크리스토퍼슨|현대사 전문가
  • 승인 2009.12.03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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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학자들 좌파 비판, 미디어 만나 시대 풍미
푸코, 무늬만 비슷해도 극찬…들뢰즈와는 결별

프랑스에서 반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1973~81)를 주창한 신철학은 분명 한 시대를 풍미한 신사조임이 분명하다. 과연 신철학은 상반된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 사이에 어떤 가교 역할을 했고, 특히 스탈린의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 증오심을 가진 좌파 지식인들과 어떤 정신적 유대관계를 가졌는가?


프랑스 미디어 지식인의 역사에서 1977년은 분명 ‘신철학자들’의 해로 기록될 만하다. 특히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앙드레 글뤽스만이 철학계의 혜성으로 떠오른 해다. 좌파 이념을 공격한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이들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앙리 레비의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La Barbarie à visage humain)이 발간 2주 만에 3만7천 부가 팔린 데 이어, 글뤽스만의 <대사상가들>(Les Maîtres penseurs)도 출간 한 달도 채 안 돼 3만 부가 팔렸다. 이 책들은 1년 사이 각각 8만 부가 나갔다. 이 책들의 성공은 프랑스 반전체주의 시대 도래의 신호탄이었다.

신철학자들이 좌파 정책과 좌파 이데올로기를 겨냥한 비판은 과장되긴 했어도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신철학’은 좌파연합 내부에 최대 위기가 닥치기 시작한, 정확히 1977년 5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다. 1977년 3월 12일과 20일에 치른 시의원 선거에서 프랑스사회당(PS)과 프랑스공산당(PCF)이 압승하고, 모든 이들이 197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파의 승리를 점치던 가운데, 선거의 승리는 오히려 좌파 진영에 경쟁과 분쟁을 심화시키고 내홍을 겪게 했다. 이에 PCF가 서둘러 양당 공동 프로그램을 운영하자고 요구해 5월부터 양당 대표의 협상이 시작됐지만, 협상은 그해 11월 23일 결렬됐다.

언론들의 뜨거운 관심

1977년 봄과 여름, 신철학자들은 좌파의 이런 위기를 상기시키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토론 방식을 제안하면서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도처에서 열린 신철학 관련 토론이 정치적인 핵심 이슈가 됐다. 프랑스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아포스트로프>는 ‘신철학자들은 우파인가 아니면 좌파인가?’란 제목으로 신철학자들을 조명했다. 시사주간지 <누벨옵세르바퇴르>는 1978년 대선을 예측하기 위해 잡지에 ‘목표 78’이란 토론의 장을 신설했고, 신철학자들은 이 지면을 통해 의견을 개진했다.

또 일간 <르몽드>도 이들의 정치적 태도를 다뤘다.(1) 최고 지식인들로 손꼽히는 저명인사들은 신철학을 용인하며,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이들 또한 신철학이 정치적으로 시의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혁명적인 담론이나 계획에선 전체주의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인식했다. 1977년 프랑스의 좌파 연합 당시,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 강조되면서 이같은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신철학의 성공 요인을 단순히 지식인들의 삶 속에서 커지고 있는 미디어의 역할로 한정할 수만은 없다. 비록 도서출판 그라세(Grasset)의 발행인과 이 출판사의 시리즈물 책임자인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그라세 소속 저자들을 홍보하기 위해 신철학을 창안해냈지만, 신철학이 지적 영역 자체를 상대로 외적인 언론플레이를 통해 이념의 삶의 터전(지식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철학이 인정받게 된 것은 정치 및 문화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유명 지식인들에 의해 홍보되고 토론되며,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미치는 정치적 파장 때문이었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롤랑 바르트가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옹호하기 위해, 또 장프랑수아 르벨이 신철학을 전반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개입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바르트는 레비가 내린 <역사적 초월의 위기>라는 진단에 동조하며, 레비의 글쓰는 방식(2)에 “반했다”고 토로했다. 르벨은 좌파연합 반대 투쟁을 벌이는 신철학자들을 지지하며, 신철학자들이 전체주의에 대한 분석을 담은 자신의 저서 <전체주의의 유혹>에 공감한다고 여겼다.

유명 지식인들, 신철학 옹호

그러나 이들보다는 또 다른 두 유명 인사의 역할이 신철학을 인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글뤽스만의 <대사상가들>을 찬양한 미셸 푸코의 역할뿐 아니라, 자신의 문학잡지 <텔켈>을 통해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신철학이 주도하는 투쟁에 동조한 필리프 솔러스의 역할이 그것이다.

푸코는 <누벨옵세르바퇴르>를 통해 <대사상가들>을 극찬했다. 한발 더 나아가 1977년, 푸코는 글뤽스만이 <요리사와 식인종>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자신의 저서 <광기와 비이성>을 활용해 ‘굴락’(Goulag·극동 러시아의 수용소 군도)과 지난 고전시대에 자행된 ‘대대적인 감금’을 비교한 것을 용납했다. 하지만 푸코의 글뤽스만 지지는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푸코는 클로드 모리아크와 질 들뢰즈가 자신을 비판하자, 자신의 견해(3)를 재고하기보다는 이들과 친교를 단절해버렸다.

글뤽스만의 견해, 특히 권력과 이성에 대한 그의 개념은 푸코 자신이 더욱 엄격한 분석을 통해 정의한 개념과는 달랐다는 점에서 푸코의 그런 태도는 한층 수수께끼 같다. 글뤽스만은 권력을 국가와 동일시하며 권력과 국가, 두 기관으로부터 소외된 대부분의 평민을 지지한 반면, 푸코는 혁신적인 자신의 가설을 통해 권력이 분산돼 있다고 봤다. 푸코의 미시구조(micro-structures)적인 접근 방식은 통치자들에게 집중된 통치권 개념에 명백히 반대 태도를 취하고 있다. 더욱이 글뤽스만은 (철학 및 헤겔적인) 이성과 학문을 통치와 완전히 동일시하며, 푸코의 계보학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다.

왜 푸코가 글뤽스만을 지지했는지 설명하고 싶다면, 푸코의 미디어 활용, 즉 그가 자신을 신성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1960년대, 교수로서 명성을 얻은 푸코는 지식 잡지와 문화 매체를 통해 자신의 명성을 문화계로 더 광범위하게 확장한다. 푸코는 그의 저서 <말과 사물>의 출간과 함께 순식간에 슈퍼스타 지식인 반열에 올랐다. 언론이 이 책을 놓고 장기간 토론을 벌이며, 이 책은 1966년 여름 베스트셀러가 됐다. 문화계에서 얻은 이 명성이 중요한 계기가 돼, 푸코는 1970년 프랑스 국립고등교육기관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골수 반공주의자 푸코

1970년대, 푸코는 여전히 지식인 사회에 명성을 알리는 데 목말라했다. 그는 급기야 동시대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 저서를 집필했다. 비록 글뤽스만이 푸코의 이념을 왜곡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명성을 좇는 푸코에겐 좋은 동반자였다. 특히 이들의 동반자 관계는 1976년 출간된 <성의 역사>의 제1권 <앎의 의지>에 대해 언론이 푸코의 기대와는 달리 시원찮은 반응이 보였을 때 두드러졌다. 글뤽스만은 서평 기고문을 통해 푸코의 저서를 극찬했다. 그는 푸코가 마르크스 이후 처음으로 <현대 세계의 가장 직접적인 본질>(4)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푸코가 글뤽스만을 지지한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골수 반공산주의자인 푸코는 좌파가 68혁명에서 우연찮게 승리를 쟁취하자 걱정이 된 듯, “공포를 주지 않는 권력 행사를 고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코는 1978년 국회의원 선거 전날 좌파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묻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좌파에 합류할 것이 아니라 지난 15년 동안 자신과 여타 사람들이 재설정해놓은 정치적 정의(定義)에 좌파가 적응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는 반공세력을 옹호하는 집회에 낀 지식인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다.

푸코는 권력을 20세기의 본질적인 문제로 파악했다. 그는 권력 문제가 과거에 잘못 이해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현대적인 권력의 양식을 이해하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선 권력에 대한 개념의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감시와 처벌, 그리고 ‘굴락’

푸코는 아마도 글뤽스만처럼, 통치권력을 등한시할 정도로 규율권력의 중요성에 심취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따금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자행된 권력 행사의 가장 끔찍한 순간들이 서구에서 자행된 권력 행사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비쳤을 것이다. 푸코는 자신의 저서<감시와 처벌>에서 ‘굴락’과 서구의 형무소를 ‘수용소 군도’처럼 묘사하며 서로 견주었다. 또 소비에트연합에서 활용된 억압적인 정신의학이 “정신의학의 활용을 왜곡”한 것이 아닌, 그게 정신의학의 “근본적인 프로젝트”라고 주장했다.(5)

그가 러시아의 굴락과 서양의 <대대적인 감금> 사이를 견주며 가장 우려했던 것은, 이런 비교가 모든 박해의 이미지를 혼탁하게 하는 데 쓰이지나 않을까, 또 이를 구실로 PCF가 곤경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좌파는 이를 빌미로 자신들의 기존 담론을 수정하지 않고 고수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푸코는 재출간된 <감시와 처벌>에서 ‘수용소 군도’란 용어를 삭제했다. 푸코는 <요리사와 식인종>은 이런 정치적 덫에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자신과 굴락 그리고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분석 작업을 해본적이 없던 푸코는, 글뤽스만의 저서 <대사상가들> 속에서 그 자신이 주도적으로 비판했던 적들(공산주의자,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및 국가)에 대한 규탄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분명 이 책을 극찬했던 것이다.(6)

글·마이클 크리스토퍼슨 Michael Christofferson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수. 곧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될 <좌파에 맞선 지식인들, 프랑스의 반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Les Intellecuels contre la gauche. L‘idéologie antitotalitaire en France, 2009)의 저자. 이 글은 그의 저서를 간추려 발췌한 것이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르몽드>, 1977년 5월 27일.

(2) 롤랑 바르트, <베르나르앙리 레비에게 보내는 편지>.

(3) 미셸 푸코, <말과 글 1976~1979>, 갈리마르, 파리, 1994, p277~281, 418~428. 클로드 모리아크, ‘희망은 죽이지 말아야 한다’, <르몽드> 1977년 7월 7일. 질 들뢰즈, ‘신철학자들’, <르몽드> 1977년 6월 19~20일.

(4) Niilo Kauppi, <French Intellectual Nobility: Institutional and Symbolic Transformations in the Post-Sartrian Era>, 뉴욕주립대 출판부, Albany, 1996, p.134~136. David Macey, <The Lives of Michel Foucault: A Biography>, Pantheon, 뉴욕, 1993 p.189 sq. 미디어에서 성공을 거둔 <말과 사물>, 앙드레 글뤽스만의 <대사상가들>, 그라세, 파리, 1977, p.237.

(5) 미셸 푸코, <섹스 킹에게 ‘NO’를 외쳐라> <1976년 1월 1일 강의> <말과 글 1976∼1979>, op. cit.,p266~267, 189 및 335, <감시와 처벌>, 갈리마르, 파리, 1975, p.305.

(6) 미셸 푸코, <1976년 1월 7일 강의> <소련을 비롯한 여타 국가에서의 범죄 및 징벌> <권력 및 전략> <말과 글 1976∼1979>, op. cit., p.166~167, 69, 418~421,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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