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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독립영화를 식민화하나
누가 독립영화를 식민화하나
  • 남다은|영화평론가
  • 승인 2010.01.06 15:55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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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성공 이후 국가지배 시작…뉴라이트, 전용관 운영권 접수?

이 글의 시작은 물론 <워낭소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거의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흥행 돌풍이 일어났을 때, 몇십 년간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독립영화’라는 이름, 혹은 담론이 마치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난 진귀한 물건처럼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역사도 뿌리도 삭제된, 그러나 어느 순간 실체가 되어버린 단어. 각종 언론매체들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이루어낼 수 있는 독립영화야말로 한국 영화 침체기의 진정한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상업영화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상품으로서의 기능을 떠맡아줄 구원자 말이다. 그러니까 그때, 유행처럼 번졌던 ‘독립영화’ 담론은 엄밀히 말해 독립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라는 환상이었다. 그 환상은 최근 얼마간 자본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실패해온 주류 문화, 특히 상업영화의 구멍을 메워주었다.

<워낭소리> 그 이후
<워낭소리>가 인공적인 사운드를 통해 시골 풍경과 워낭소리를 재구성하고 농촌 판타지, 혹은 영화적 환영을 완성해냈을 때, 관객에게 중요한 건 그것이 진짜 현실인지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현실에 근접하는지의 여부였다. 독립영화라는 환상과 <워낭소리>의 환상은 아마도 그렇게 서로에게 겹쳐지고 의존하며 확장되었을 것이다. 주류 문화와 현실의 구멍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혹은 그 구멍 자체로 존재해온 그간 독립영화의 역사는 한동안 그 환상 앞에 무력했다. 이 환상은 말할 것도 없이 ‘독립’이나 ‘문화’가 아닌 ‘상품’에의 친밀성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워낭소리>의 성공 이후,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강한섭·이하 영진위)를 필두로 한 각종 단체들이 독립영화를 화두로 삼을 때마다 ‘독립’이라는 말을 비상업, 다양성 따위의 단어로 바꿔야 한다며 벌인 논쟁은 우습기는 해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정치색을 제거한 저예산 영화에 대한 일련의 논의들은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말로 포장되곤 했지만, 그것이 자본의 다양성이라는 사실은 분명했고 대체로 틈새시장 공략 같은 모양새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위의 환상이 확대재생산되는 데 기여한 정부 관계자들 혹은 언론매체들과 그들의 갑작스러운 환대를 의심하는 독립영화인들 사이에도 한 가지 공통된 견해는 있었던 것 같다. 독립영화의 위기론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다. <워낭소리>와 뒤를 이은 <낮술> <똥파리> 등을 계기로 이루어진 독립영화 담론의 활성화를 두고 독립영화의 위기가 마침내 극복의 길을 찾았다는 여론이 한동안 지배적이었다. 단 한 번도 위기를 사유한 적 없는 자들이 터뜨리는 샴페인의 거품이야 그렇다 쳐도 오랫동안 그 위기론과 싸우던 자들이 보인 안도감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개별 작품의 흥행 성적과 독립영화 전반에 대한 제도적 차원의 지원이 별개의 문제이며, 나아가 저예산 영화의 수익 창출 예가 미래의 독립영화들에 유일한 제작, 평가 기준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는 차치하고서라도, ‘위기와 그에 대한 극복’이라는 전제에 대해서만은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이 시대, 죽음의 문턱을 밟지 않은 인문학이 더 이상 인문학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듯이, 위태로움을 포기한 독립영화가 더 이상 독립영화로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왜 우리는 위기를 끌어안고 사는 법을 고심하지 않고 매번 위기 저 너머의 안정만을 꿈꾸는가.

국가지배의 예감, 그리고 적중
수많은 타자의 위기로 스스로의 안정을 도모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위기의 극복을 쉽게 믿는 자들은, 혹은 학문은, 혹은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자본의 관대를 바라게 되고, 그도 아니면 자본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 자신에 대한 포기를 합리화하는 데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워낭소리>의 성공이 있은 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을 논하는 자리에서 “지원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고 확실한 쪽을 밀어주는 게 낫다”라는 견해를 피력했을 때, 예리한 독립영화인들은 이제 독립영화계에 대한 공적자금 지원에서 화두는, 적어도 몇 년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선택이 아닌 배제의 문제에 맞춰질 것이라고 예감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조건을 당신들의 기준보다 더욱 풍요롭게 해서 선택될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가진 조건을 당신들의 기준에 따라 버림으로써 배제되지 않을지의 문제 말이다. 둘은 똑같은 맥락처럼 들릴 수도 있으나, 전혀 다른 문제다. 영화가 태생적으로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때 영화가 자본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자율성을 보장받고 행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감은 맞았다. 독립영화라는 환상, 혹은 <워낭소리>라는 영화가 우리에게 안겨준 위기 너머의 안정에 대한 환상이 궁극적으로 독립영화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은 얼마지 않아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립영화’에서 ‘독립’이라는 말을 다양성, 비상업 등으로 교체하고 근 몇십 년간 독립영화인들이 피땀으로 쌓아온 독립영화의 장을 점취하려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의 무기는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공세였다. “좌파가 영화계를 망쳤다”는 수준 이하의 발언들이야 웃으며 넘길 수 있지만, 문제는 그 발언들이 놀랍게도 독립영화계에 현실적인 직격탄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올해 7월 16일 영진위의 단체사업지원 대상자 발표에서 인디포럼, 인권영화제, 서울 국제노동영화제 등 그간 영진위의 지원으로 유지되어온 단체들이 대거 탈락했다.

지난 몇 년간 행사를 진행하고 사후적으로 지원금을 받아 운영해온 단체들로서는 단체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만한 중대 사건이었다. 문제는 영진위 쪽에서 특정 단체들의 탈락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한편, 재심의 가능성을 몇 차례 언급했을 뿐인데, 그 사이 영진위는 강한섭 체제에서 조희문 체제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사업 진행 과정에서 별다른 문제제기를 받지 않은 단체들의 입장에서는 탈락의 원인을 이명박 정권하, 촛불시위 참여 혹은 그와 관련된 사안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올해 초 기획재정부가 ‘2009년 예산 및 기금운용 계획’을 통해 불법 시위를 주도하거나 참여한 단체에 한해 보조금 지원을 제한해야 한다는 집행 지침을 내린 바 있으니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닐 것이다. 영진위의 새로운 단체사업 지원 대상자 중 일부가 뉴라이트 문화예술재단과 관련이 있다는 점도 그런 의혹을 부추긴다.

그들의 정책이 단순히 독립영화계에 대한 지원금을 삭감하는 수준이 아니라, 기존 독립영화계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의도하는 것으로 읽히는 이유는 더 있다. 2007년 11월부터 활발히 운영되어온 독립영화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2009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폐관된다. 독립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이던 독립영화 전용관이 문을 연 뒤, 지난 2년간 인디스페이스는 다방면에서 독립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장을 성장시켜왔다. 한국독립영화협회의 배급지원센터가 영진위와 지정위탁 계약을 맺어 운영해온 인디스페이스는 극장이 단순히 영화-상품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 특히 독립영화에서 극장은 늘 그 이상의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 곳이었다. 개봉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수많은 영화들이 발굴되어 인디스페이스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물론, 매해 이곳저곳을 떠돌던 독립영화제들이 마침내 장소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시작 단계인 독립영화관의 역사가 독립영화 전용관을 지정위탁제에서 공모제로 전환한다는 영진위의 갑작스러운 결정 앞에 또다시 단절을 겪게 된 것이다. 이는 인디스페이스뿐만이 아니라, 영상미디어센터(미디액트), 서울아트시네마 등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현실적 어려움과 싸우며 관객·시민과 영화-공간을 구축해온 단체들에도 일방적으로 통고된 사안이다. 영진위는 사업의 공정성이나 국정감사 등을 이유로 공모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지만, 그 주장을 납득할 만한 구체적 근거도, 체계적 자료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지난 11월 영진위는 사업 주체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고 기존 독립영화 단체들이 지원했지만, 며칠 전 사업 모집 결과 발표를 통해 독립영화 전용관, 영상미디어센터를 운영할 적정 단체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재공모 의사를 밝혔다.)

독립영화마저 뉴라이트에?
누가 극장의 운영 주체가 될 것이냐, 그러니까 누가 주인의 권력을 행사할 것이냐에 모든 초점이 맞춰진 현 상황은 독립영화의 저변 확대, 배급 지원의 활성화와 같은 독립영화 공간의 가장 시급한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인디스페이스 원승환 소장의 말처럼, 독립영화 전용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있다면 그건 수익 창출을 또 다른 수익 창출로 확장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창출된 수익을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영화들에 배분하고 지원하는 구조를 정립하는 데 있다. 하지만 독립영화를 특정한 실체로 규정하고 그 실체를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저들의 비뚤어진 주인의식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아니, 어쩌면 그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일말의 희망을 거는 것 자체가 정당하지 않은 일인지 모른다. 패배자의 넋두리가 아니라, 희망을 걸 수 없는 곳에서 희망을 보려고 하는 것, 무엇이 이 시대를 이토록 어두컴컴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지 않고 그 어둠이 쉽게 밝혀질 것이라고 믿는 것, 그것은 환상이다. 시스템도 역사도 밀쳐두고 오직 환상의 거품을 즐긴 후의 대가를 이제 우리는 충분히 경험했다.
 
기존 독립영화계에 대한 저들의 비판이 독립영화의 정치성에 맞춰질 때마다, 그에 대한 대항 논리를 비정치성에서 찾는 건, 이미 그들의 틀을 승인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독립영화는 오히려 더욱더 정치적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정치적 이슈를 영화의 소재로 취하거나, 영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시도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영화의 정치’에 대한 사유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물론 모호하고 어려운 일이다. ‘영화의 정치’라는 것은 특정 실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닐뿐더러 명징한 단어나 소재로 형상화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독립영화에 대한 고정된 정의로 환원되는 무엇이 아니라, 독립영화로 불리는 담론·사람들·역사·기억 등의 주변에서, 그 주변으로서 살아남아 이 세계에서 거부당하고 망각된 존재와 시간들을 현재로 불러들이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올해 독립영화의 한편에는 자본주의가 향수하는 아름다운 ‘워낭소리’와 잃어버린 경험의 풍경(<워낭소리>)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구원도 타락도 그 의미망을 잃어버린, 말하자면 질서와 언어 자체가 사라지고 오직 소멸의 노이즈만으로 존재하는 풍경(<고갈>)이 있었다. 전자는 ‘보편적인’ 지지를 받았고, 후자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고 개봉 기회조차 박탈당할 뻔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둘 중 어느 영화가 독립영화의 조건을 충족시키는지의 문제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각 영화의 미학과 윤리에 대해 비평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는 두 영화 사이에 천국과 지옥만큼의 거리가 있다고 믿는 자들의 논조에 동의하는 대신, 이 시대 안에서 저 두 풍경이 교차되는 지점, 휴머니즘과 반휴머니즘이, 삶과 죽음이 서로를 잠재하고 있는 어떤 순간, 혹은 두 영화의 경계에 대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워낭소리>와 <고갈>이라는 세계에 대한 양극단의 판타지가, 판타지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다면 세계에 대한 형상화가 이 세계 안에서 어떤 지도를 그려내고 있는지를 보는 행위, 바로 그 행위에 독립영화가 있을 것이다.

글•남다은
연세대 비교문학협동과정 박사과정. 2004년 <씨네21> 영화평론가상 수상. 현재 인디포럼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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